근대 이성의 역사: 데카르트, 칸트,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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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성의 역사: 데카르트, 칸트, 헤겔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3.2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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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35강>_ 김상환 서울대학교 교수의 「근대 이성의 역사」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35강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강연 중 서론 부분을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근대 이성의 역사: 데카르트, 칸트, 헤겔

김상환 교수는 근대에 고유한 이성이란 “어떻게 탄생, 진화”하였으며 “근대 사상 속에서 이성은 어떤 형태를 띠고 변형”되어왔는지, “그리고 이런 근대 이성이 우리 시대에 이르러 다시 변형될 조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 같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세 철학자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소환한다. 요컨대 “수학적 합리성”과 “법률적 합리성”, “유기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의 이성은 서로 상이할 수밖에 없는바 그 세 형태의 이성을 각기 “방법적 이성, 비판적 이성, 사변적 이성”이라 칭할 수 있다면 세 가지 유형의 이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세심히 살펴본다

지난 1월 30일, 김상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3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서론: 근대 이성의 세 유형

초보적인 의미에서 이성은 초-감성적인 진리,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서양 철학, 특히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의 철학에서 이성은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 철학을 떠나 통속적인 관점에 서더라도 이성의 중요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학문을 비롯한 인간 문화의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성취가 대부분 이성에 힘입고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정확한 의미에서 이성이란 무엇인가? 이성의 힘은 어디에 있으며, 그 한계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방법적 이성, 비판적 이성, 사변적 이성

사실 이성은 언제나 동일하게 이해되어오지 않았다. 시대마다 학문 영역마다 서로 다르게 파악되고 적용되어온 것이 이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다른 시대와 구별되는 근대 고유의 이성은 어떻게 탄생, 진화해왔는가? 근대 사상 속에서 이성은 어떤 형태를 띠고 변형되어왔는가? 그리고 이런 근대 이성이 우리 시대에 이르러 다시 변형될 조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물음을 위하여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세 철학자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이 세 철학자는 모두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에 서 있고, 그런 만큼 이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옹호하는 이성은 확연히 서로 다른 지향점을 지닌다. 가령 데카르트의 이성은 수학적 합리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성은 법률적 합리성을, 헤겔의 이성은 유기적 합리성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세 철학자의 이성은 서로 다른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세 형태의 이성은 각각 방법적 이성, 비판적 이성, 사변적 이성이라 불린다. 그렇다면 이 세 유형의 이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 다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데카르트의 방법적 이성은 자명한 사태로 돌아가 무한한 발견의 여정을 꿈꾼다. 다른 한편 칸트의 비판적 이성은 모든 진리 주장의 조건과 권리 범위를 묻는 사유의 법정을 자처한다. 마지막으로 헤겔의 사변적 이성은 생명의 논리로 돌아가 과거 철학 전체를 기억하는 동시에 근대적 삶의 모든 내력을 담을 거대 체계를 열망한다. 이런 차이가 각 철학자의 개인적 취향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부응했던 당대의 요구에서 온다. 이성 역시 시대의 아들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세 철학자의 이성을 다음과 같이 소묘할 수 있다.

― 먼저 데카르트 철학은 근대 과학이 막 태어나는 시기의 과제와 맞닿아 있다. 방법적 이성은 유년기의 근대 과학을 당대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성숙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데카르트의 이성은 직선처럼 곧게 뻗어나갈 과학의 미래를 꿈꾼다.

― 다른 한편 칸트 철학은 근대 문화의 분화 과정에서 엉클어진 질서에 새로운 일관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성에 호응한다. 비판적 이성은 이론, 실천, 예술을 자신의 법정에 소환하여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가리켰다. 칸트의 이성은 근대 문화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한다.

― 마지막으로 헤겔 철학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근대인의 열망에 최후의 답변을 제시코자 했다. 사변적 이성은 자유의 이념이 역사-문화적 삶 속에 현실화되는 드라마를 개념적으로 연출했다. 헤겔의 이성은 역사가 숨 쉬는 천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근대 이성의 역사를 서술할 때는 당대의 역사적 현실 못지않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학문 모델의 역사다. 시대마다 학문의 세계를 주도하던 분야, 다른 학문에 대하여 모델로 부상하던 분야, 그래서 철학에 새로운 영감을 주던 분야가 달라져왔다. 17세기는 과학 혁명의 시대다. 이 시기 철학에 가장 커다란 문제는 앎과 지식의 문제였다. 철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학문은 수학이었다. 18세기는 경제 혁명과 정치 혁명의 시대다. 사회적 질서가 급격히 재편되는 와중에서 당대의 철학에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삶과 실천의 문제였다. 철학에 가장 커다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경제학과 법학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이성과 칸트의 비판적 이성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들 각각은 수학적 합리성과 법률적 합리성을 대변한다. 헤겔의 사변적 이성이 유기적 합리성을 추구했던 이유도 비슷한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18세기 후반기에 태동한 근대 생물학이 철학에 가져온 충격의 산물이다. 헤겔은 인간 공동체의 역사적 삶을 생명의 논리에 따라 풀어내고자 했다. 철학은 이렇게 한편으로는 시대마다 달라지는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마다 달라지는 학문적 지형의 중심과 관계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이성을 창조해왔다.

이성의 두 가지 근본 관심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 칸트, 헤겔 사이에는 뚜렷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들의 이성이 언제나 두 가지 근본 관심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어떤 관심인가? 하나는 자기 인식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자에 대한 관심이다. 언제나 하나로 수렴되는 이 두 가지 관심은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의 철학을 구조화하는 중심이기도 하다. 근대 이성의 역사는 이 동일한 구조가 과거와 판이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근본 관심은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을 처음 계획하던 무렵 적었던 문장을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

“저는 신께서 이성의 사용을 허락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성을 사용하되 한편으로는 신을 알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애쓰는 데 가장 중요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형이상학적] 연구를 시작하고자 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입니다. 나는 만일 이런 길을 통해 자연학의 기초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그 기초를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과 신을 아는 것, 이것은 이미 말한 것처럼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의 철학을 구조화하는 구심점이다. 소크라테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알키비아데스』에 등장하는 두 가지 명령에 대응한다. 그 두 가지 명령은 “너 자신을 알라!”와 “너 자신을 돌보라!”다.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명령은 자기 인식의 명령이다. 그 자기 인식의 명령은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의 이론학을 끌고 가는 이념이다. 왜 그런가? 대상 인식의 조건이 이성 자체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대상 인식의 조건을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대상 인식은 이성의 자기 인식에 의해 완성된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명령은 자기 도야의 명령이다. 그 도야의 명령은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의 실천학을 끌고 가는 이념이다. 왜 그런가? 자신을 형성해가는 극기의 훈련이 맹목에 빠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기 도야는 이상적인 삶과 가치에 대한 물음과 함께 간다. 특히 혼돈의 시대일수록 자기 도야는 자기 정향의 문제로 귀착된다.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에서 자기 정향의 문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라는 물음을 통해 첨예화된다. 자기 도야는 신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였다.

푸코는 서양 윤리학의 역사를 소크라테스의 두 가지 명령이 계승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그 두 명령이 시대마다 어떤 형태로 실행되는지, 그리고 그 두 명령이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를 복원코자 했다. 이런 푸코의 계보학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두 가지 명령이 서로 분리되는 사건이다. 데카르트 이전에는 자기 인식과 자기 도야가 언제나 하나를 이루는 문제였는데, 데카르트 이후부터 두 명령이 서로 다른 문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데카르트 이후에는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도 얼마든지 좋은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옳은 지적이다.

특히 도야의 기술(실제의 금욕적 훈련을 위한 테크닉)에 대한 관심이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에서는 점점 약화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도야의 문제 자체는 계속 유지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자기 인식과 신 인식이라는 두 가지 물음에 의해 조직된다. 이때 신 인식은 이성의 존재론적 기원인 동시에 실천적 자기 정향의 원리다. 그런 이유에서 신 인식은 결코 자기 인식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칸트와 헤겔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근대 이성에 대하여 대상 인식은 언제나 자기 인식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인식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성의 자기 인식은 실천적 자기 정향의 원리인 무한자와 관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근대 이성은 세 가지 축에 의해 구조화된다. 하나는 과학적 인식의 대상인 외부 사물과 관계하는 축이다. 이것을 대상관계의 축이라 부르자. 다른 하나는 대상 인식의 원리를 담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축이다. 이것을 자기관계의 축이라 부르자. 마지막으로는 실천적 삶의 정향 원리인 무한자와 관계하는 축이 있다. 이것을 원격관계의 축이라 부르자. 근대 사상사에서, 특히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의 철학에서 세 가지 축은 언제나 함께 얽히면서 서로 제약하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근대 사상사에서 소크라테스의 두 가지 명령이 분리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근대 문화에서 과학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해가고, 마침내 독자적인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는 시점에 일어난 사건일 것이다. 한때 철학적 이성 내에 정초되던 과학이 언젠가부터 이성 바깥에 정초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확히 바로 이때부터 철학은 인식의 문제보다 실천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철학적 이성은 대상관계보다는 원격관계와 공명하면서 자기관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칸트 이후 이런 추세는 “실천 이성의 우위”라는 말로 정식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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