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전회, 또는 물질로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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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전회, 또는 물질로의 도피?
  • 황정아 한림대·영문학
  • 승인 2021.03.2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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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특정한 이론이 하나의 ‘우세종’으로 학계를 지배하는 경향은 현저히 줄어든 이즈음이지만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로 일컬어지는 흐름의 존재감은 비교적 뚜렷하다.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 행위자네트워크이론 등의 이름을 건 일군의 담론들이 때로 결합하고 때로 차별화하면서 하나의 경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전회, 그러니까 물질을 향해 돌아서겠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다른 무언가로 향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는데, 그 ‘무언가’가 물질과 선명한 대조를 이룰수록 물질적 전회가 갖는 의의가 더 커질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넓은 의미의 인문학계에 하나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작동한 것은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가 구축한 전제들이었다. 현실을 향한 접근은 인식과정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인식은 다시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일찍이 프레드릭 제임슨이 표현한 대로 “아무도 미처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라는 듯이, 자명한 사실의 무게로 학계의 판도를 흔들었다. 탈구조주의를 비롯한 그 이후의 중요한 이론 대부분이 이 토양에서 자라났으니 ‘전회’라는 이름에 이만큼 값하는 사건도 드물 것이다. 그로부터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이라 여겨온 것, 또 기술적이라 여겨온 것들 역시 사회역사적·정치적·문화적 구성물이며 그런 한에서 언어적 인식의 산물이라는 이야기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어왔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언어적 전회’를 표적으로 삼아 새로운 전환을 꾀하는 움직임이 뚜렷한 세력과 정체성을 갖추고 등장한다. 언어적 전회의 결과로 인식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고 비판하며 그와 같은 ‘언어의 감옥’이 닫아버린 존재론을 향해 곧장 나아가자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전회는 ‘존재론적 전회’로 지칭되기도 하는데, 이때의 ‘존재론’은 인간 너머로 향하는 강한 극성을 갖는다. 동물을 필두로 한 비인간(non-human) 존재의 역량이 속속 발견되고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물질 자체에 대한 관심이 전면에 나선다. ‘언어적 전회’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물질적 전회’가 물질 속에서 물질에 의존하며 물질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놀라울 뿐’이라는 듯 자명한 사실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는 물질에 대한 재평가가 당연히 수반된다. 물질이 수동적이고 불변하고 정태적이라는 관점, 요컨대 그것을 한갓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에 반대하고 ‘주체’의 지위에 어울릴 어떤 생기, 능동성, 창조성, 생산성, 행위자성 등의 특징을 물질의 속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물질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이 현실의 ‘물질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인류는 원하든 아니든 이미 물질과 새롭고도 문제적인 관계에 돌입했으며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계를 적극 도모해야 할 상황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지루할 정도로 자주 듣게 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은 물질, 사물, 객체 사이의 숱한 ‘평평한’ 관계들에서 다만 일부를 차지할 뿐이며 언어와 인식을 포함한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언어의 실패와 인식의 불가능성에서 주체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인간이 가진 것의 무력함은 이미 숱하게 인정되어왔기에 ‘물질적 전회’가 내놓는 인간중심주의 비판이 더는 특별히 뼈아픈 지적이나 예리한 통찰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의 절반만을 이야기한다는 의구심이 깊어진다. 인간이 물질을 ‘대상화’하며 함부로 훼손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어쩌면 오늘날 삶에서 종종 더 통렬히 체험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물질의 강력한 존재감과 대비되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이다. 물질적 전회는 물질세계의 이런 엄청난 역량을 그대로 되비쳐줌으로써 사실상 물질 스스로 이미 달성한 전회를 추인해주는 데 불과한지 모른다.

물질적 전회 담론들에서 자주, 그러나 실상은 매우 편의적으로, 참조되는 하이데거는 휴머니즘에 반대하면서도 그 이유를 휴머니즘이 인간의 ‘위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을 중심에 놓거나 인간의 역량에 특권을 부여하는 듯 보이는 담론이 실상 인간의 위엄에서 눈을 돌린 것이라면, 인간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휴머니즘의 한계가 적절히 돌파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행위자로서 특권적 역량을 갖고 있지 않음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지금이 오히려 기술적이고 인과적인 사고틀을 벗어나 인간만이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 할 임무를 사유하기에 적절한 시점인지 모른다. 그런 사유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물질적 전회 역시 또 한 번의 ‘전회’를 내걸어 물질로 도피하는 일이 될 것이다. 


황정아 한림대·영문학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D. H. 로런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서 현대 영국소설과 한국소설 및 비평이론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로 동아시아 개념사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개념비평의 인문학>, <코로나19 팬데믹과 한국의 길>(공저),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편저) <소설을 생각한다>(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단일한 근대성>, <아메리카의 망명자>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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