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일, 사랑,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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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일, 사랑, 사상
  •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철학
  • 승인 2021.03.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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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중세 여성철학자 트리오』 (신창석 지음, 일조각, 416쪽, 2021.01)

20세기 말의 미래학자들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21세기를 “문화” “여성” “철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렇더라도 중세의 여성철학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여전히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교 중심적이고 암울한 분위기가 떠오르는 중세시대에 여성철학자들이 웬 말인가? 중세와 여성철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걷어낼 때, 비로소 동서양의 만남으로 태동한 현대의 “문화” “여성” “철학”이라는 키워드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선은 근본적으로 관찰자의 위치를 알려준다. 수평선이 바뀌었다는 것은 관찰자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지평선이 바뀌기 전에 관점이 바뀐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을 오갈 수 있는 여행자들은 황혼의 성채, 바티칸의 광장, 파리 센 강변의 소르본, 대성당들의 첨탑을 즐겨 셀카의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중세 도시의 고색창연한 실루엣에는 드러나지 않은 심층부가 존재했다. 『중세 여성철학자 트리오』에서는 남성 중심의 관점을 넘어서서 중세의 심층부에 숨겨진 여성철학자들의 일, 사랑, 사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중세 여성철학은 인류가 최초로 경험한 대륙 간의 국제전을 전후로 싹트기 시작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연합과 아라비아가 7차례에 걸쳐 충돌한 십자군전쟁의 와중에, 정확히 1241년 4월 9일 돌연 아시아에서 출발한 몽골군이 유럽의 중심부인 폴란드 레그니차의 지평선에 나타났다. 몽골군은 이슬람 아라비아군과 그리스도교 유럽연합군들의 전선 자체를 쓸어버린 뒤 홀연히 유럽의 지평선에서 사라져버렸다. 유럽인들이 “해 뜨는sol oriens 곳”이라는 의미로 오리엔트Orient라 부르던 동방의 경계는 이제 아라비아에서 아시아로 넓어졌다. 유럽연합을 몰살시킨 몽골군의 전투지역이 라틴어로 코레아Corea라 이름 붙인 고려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세계라는 관점이 바뀐 것이다. 십자군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몽골군이 미련 없이 떠나버린 “해 지는sol occidens 곳”, 즉 유럽의 지평에 예기치 않은 시대적 각성이 싹트고 있었으니, 그것은 전란에 숨죽이고 있던 어린 청년들과 여성들의 의식적 각성이었다. 

12세기에 십자군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유럽 본토에서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감지되었다. 십자군 행렬에도, 대성당의 설교대에도 나설 수 없었던 청년들과 여성들은 가난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청빈운동을 전개했다. 청년들은 개혁수도회를 설립해나갔으며, 학문의 길드이던 콜레기아collegia, 즉 칼리지를 발전시켜 국제적 대학의 창설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청빈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수도회로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발족되었다. 이들 개혁수도회는 대륙의 파리대학, 볼로냐대학, 코임브라대학, 그리고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과 캐임브릿지대학 등을 중심으로 스콜라철학을 이끌어냈다. 라틴어 스콜라schola는 영어로 스쿨school이므로, 스콜라철학은 곧 학교철학으로서 소위 대학과 라틴어를 터전으로 중세 황금시대를 연출했다.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던 십자군들이 연가Minnesang를 부르며 돌아올 즈음, 유럽의 성내에는 여성 의식을 들뜨게 하는 궁정 로망이 무르익었고, 시민들에게는 성모 마리아 공경이라는 현상이 여성을 배려하는 의식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어원부터 독일어로 베긴네Begine라 불리던 여성들의 등장과 결단은 여성 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영성생활을 위한 수도원에도, 학문을 위한 대학에도 초대받지 못했던 여성들은 ‘여성femina’ 자신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모색한 것이다. 소위 인류 역사에 유래가 없던 여성운동가들, 즉 베긴네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베긴네란 신실하고 의식적인 여성들이 공인된 그리스도교 수도회에 소속되지 않은 채 사회에서 무리지어 활동하는 여성공동체의 이름이었다. 베긴네들은 청빈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사랑의 십자가를 따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복지 활동과 신앙생활을 영위하면서 여성들만의 수도회가 탄생하는 터전이 되었다. 비로소 여성들도 영성적이고 학문적 삶을 추구하게 되었으니, 장미 정원을 두른 수녀원이 바로 중세 여성철학자들의 산실이 되었다.

수녀원에서 활동한 중세의 여성철학자들은 뜨거운 신앙과 부드러운 철학을 통해 주로 영성수련과 신비주의에 집중했다. 그들은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존재 지평을 영성으로 보았으며, 영성수련을 통하여 신의 절대적 현시성을 직시하고자 했다. 그들은 예언적 현시visio와 내밀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철학과 신학의 지평을 열어나갔다. 그들은 현대 21세기의 여성주의에 힘입어 비로소 여성철학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철학사는 중세 여성철학자들의 새로운 길을 ‘여성 신비주의’라 부르며, 또 하나의 철학적 기류로 받아들인다. 여기서는 트리오라 이름 붙인 엘로이즈, 힐데가르트 폰 빙엔, 제르트루다의 일, 사랑, 사상을 그들의 원전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사랑의 개혁가 엘로이즈(1095경-1164경)는 귀족가문 출신으로 대학이 형성되던 파리에서 성장했지만 개인교습을 통해 고전교육을 받았다. 엘로이즈는 상파뉴 지역 시토수도회 계열의 파라클레Paraklet 수녀원장을 지냈으며,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에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역시 수도자인 아벨라르와의 비극적 사랑으로 유명하다. 수녀원장이 된 엘로이즈는 특히 수녀원 여성들의 생활방식과 영성생활을 위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으며, 20세기에 와서는 억압되던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노력한 중세 여성지도자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현시를 보는 힐데가르트 Die Seherin Y20L1759

치유의 예언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은 가장 위대한 여성철학자이자 여성신비가에 속한다. 그녀는 이미 생전에 “독일 예언녀”로 알려졌다. 그녀의 작품은 서양사상을 집대성한 『라틴교부총서』에 여성이면서도 「성녀 힐데가르트Sancta Hildegardis」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21세기에 와서야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힐데가르트를 가톨릭 성인이자 ‘교회의 보편적 박사’Doctor Ecclesiae universalis로 추대했다. 힐데가르트는 작곡가, 자연치료사, 의학자, 식물학자로서 당대를 위로하고 치유하였으며, 미술치료, 음악치료, 보석치료의 원조이기도 하다. 특히 힐데가르트는 독일철학사에 여성철학이라는 인상적 족적을 남겼다.

성녀 제르트루다의 현시 Ecstasy of St. Gertrude by Pietro Liberi

예수 성심의 신학자 헬프타의 제르트루다(1256~1302)는 중세의 위대한 여성신비가이자 여성철학자이다. 그녀는 독일 여성신비주의의 산실인 헬프타를 대표한다. 그녀의 영성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에 기초한다. 그녀는 성 베네딕트와 성 베르나르두스와 같은 성인들의 영성을 수련하였으며, 특히 라틴어를 위시하여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에 능통했다. 그녀는 1281년 1월 27일 그리스도 발현의 신비를 체험했다. 제르트루다는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신적 사랑의 전령』, 『영성수련』과 같은 신비주의 저술을 남기면서 삶의 끝까지 신비적 내적 상태로 일관했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철학

독일 1992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부 초빙교수(Brain pool),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전공 교수. 2002년 독일어 저서 『Chang-Suk Shin, Imago Dei und Natura hominis 1993』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교재 선정. 2008년 역서 『삼비아시, 영언여작, 2007』 한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 그 외 저역서로는 『성공적 행위를 위한 테마철학』, 『씨앗은 꽃에 대한 기억이므로』, 『예술에 대한 철학적 담론』,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스콜라철학의 기본개념』. 『중세철학이야기』, 『철학의 거장들 1』, 『인식의 근본문제』 등과 다수의 연구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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