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에 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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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에 관한 명상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1.03.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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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흔히 ‘바다의 쌀’로 부르는 물고기가 있다. 작은 크기에 비해 몸에 단백질과 지방질이 알차게 들어 있어 예로부터 수많은 해양생물의 훌륭한 먹잇감은 물론 인간에게도 널리 사랑을 받아온 물고기는 바로 정어리다.

정어리를 영어로 ‘사딘(sardine)’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지방에서 많이 잡힌 탓에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 명태가 함경북도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을 한 어부가 처음 잡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정어리는 바다 속에서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물고기로도 유명하다. 수많은 포식자들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한 집단 방어 체제다.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을 흔히 한국어에서는 ‘콩나물시루 같다’나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다’는 관용어를 쓰지만, 영어에서는 ‘정어리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crammed like sardines)’고 말한다.

정어리가 많이 잡히는 황금 어장 중 하나로 남아메리카 동쪽 남대서양에 있는 포클랜드 제도가 꼽힌다. 이 제도에 가장 인접해 있는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영국이 자기네 땅이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섬이다. 독도를 언급할 때면 가끔 입에 올리는 섬이기도 하다. 그래서 1982년에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포클랜드는 황금 어장이라서 영국 어부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인데도 그 근처로 정어리를 잡으러 온다. 어부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정어리를 잡아 배에 가득 싣고 영국을 향해 출발한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영국 항구에 막상 도착해 보니 정어리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포클랜드 제도에서 영국까지 줄잡아 1만 3000킬로미터나 되니 그럴 만도 하다. 정어리가 죽지 않고 영국까지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한 어부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다. 배의 수조에 정어리를 잡아먹는 천적 물고기를 몇 마리 집어넣자는 것이었다. 

어부의 제안대로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어리들은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마치 갓 잡았을 때처럼 눈을 말똥말똥 뜨고 퍼덕거리며 살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어리들은 천적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 방심하거나 졸았다가는 자칫 천적한테 잡아먹히고 말 테니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적당한 스트레스나 긴장이 인간의 삶에 활력을 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할 때마다 자주 이 정어리 얘기를 꺼낸다. 포클랜드 제도에서 영국까지 먼 길을 오는 동안 정어리가 하나같이 시체로 변하는 것은 그동안 바다에서 느끼던 긴장이 모두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이 같은 수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 정어리는 한순간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두고 흔히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가령 이가 아파 치과를 찾아가도 최근 스트레스받지 않았느냐고 묻는 치과의사들이 많다. 그만큼 질병과 스트레스는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오랜 기간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리적·신체적 질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몸에 활성 산소가 증가하고, 이렇게 증가한 활성 산소는 몸 안의 세포를 공격해 방어 능력을 떨어뜨린다. 이렇게 면역력이 떨어지면 외부 세균이나 바이러스 공격에 취약해져서 질병에 걸리기 쉽다. 그런데 최근 적당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관심을 끌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1년이 넘도록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 어쩌면 독감처럼 인간이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전염병은 그동안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래서 ‘BC’의 의미도 조금 달라졌다.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을 그 분수령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에 따른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정어리가 천적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의학의 힘으로 최대한 퇴치하되 퇴치되지 않는 부분은 정어리처럼 삶의 활력소로 바꾸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미시시피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이론을 국내 학계와 문단에 소개하는 한편,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국문학과 문화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목을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이다. 저서로는 『부조리의 포도주와 무관심의 빵』, 『문학이 미래다』,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번역과 한국의 근대』 등 10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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