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 통제 자료로 보는 일본군‘위안부’의 동원과 이송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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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통제 자료로 보는 일본군‘위안부’의 동원과 이송 실상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3.07 2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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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제의 책

■ 화제의 책_ 『식민지 조선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료집 I: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도항 통제 (번역·해제 편/자료 편)』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이영호)은 최근 일제침탈사 자료총서 시리즈의 하나인 <식민지 조선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료집: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도항 통제>를 발간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일본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으로 <식민지 조선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료집> 시리즈를 기획 중이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나온 일본군‘위안부’ 관계 자료에 대한 이해를 수렴한 위에 식민주의와 조선인 ‘위안부’ 피해 문제를 클로즈업해서 해명하기 위한 기획이다. 

이번 자료집은 그 첫 번째 성과로서 ‘번역·해제 편’ I권과 ‘자료 편’ I권으로 엮어 총 2권으로 구성했다. 이번 자료집을 통해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도항 통제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 관계 부서가 접수하고 조선사회에 적용한 공문서를 정리하고, 일본정부·군의 전반적인 도항 정책과 ‘위안부’ 이송 방침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를 수록하여 일제의 도항 정책 속에서 ‘위안부’ 모집과 이송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위안부’의 동원과 이송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식민지의 기능과 식민지 공권력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정부와 군이 생산한 자료와 조선총독부의 자료를 함께 보고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내재된 식민주의라는 것은 단지 조선인 ‘위안부’의 피해실태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일제는 식민지 지역에 차별적인 법 적용이나 법의 불비(不備) 또는 법의 예외 상태를 이용하여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운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일제의 ‘위안부’ 동원과 이송 문제는 단지 ‘불법적인 연행실태’를 밝히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불법 요소를 밝히는 것과 더불어 당대의 합법 외피를 쓰거나 혹은 불법이라고 해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동원과 이송 시스템이 만들어졌는지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일본군‘위안부’ 제도라고는 하지만 그 시스템 차원의 이해는 깊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군‘위안부’제도는 중일전쟁 이후 체계적, 조직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시행 초기에는 군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로 제도화되었다. 곧 일본군의 필요와 요청 하에서 일본의 외무성과 내무성, 척무성, 조선총독부 등이 협조하며 동원과 이송 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이 전개되면서 이러한 기관들의 역할은 약화되었으며, 1940년 이후에는 일본군이 점점 노골적으로 개입하거나 직접 명령하는 양상을 보였다.

자료집에 따르면 중일전쟁 직후 일본정부는 중국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조선인, 타이완인을 귀환시켰다. 점령지가 확대되면서 전쟁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재도항 또는 신도항시켰으며, ‘위안부’모집업자와 그들이 데리고 가는 여성들은 우선적인 도항허가 대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재중국 일본총영사관에서 외무성, 척무성으로 이어지는 통첩을 전달받으면서 업자와 여성들의 중국 도항을 지원하거나 억제했다. 

일본 내무성은 1938년 2월 ‘창기와 사실상의 추업(醜業)에 종사하는 만 21세 이상, 본인 스스로 신분증명서 발급을 신청’하는 경우에만 ‘위안부’ 도항 허가를 한다고 공표했다. 이것은 1938년 전후 시기 유괴방식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는 업자들을 일본 경찰들이 검거하는 소동이 난 뒤의 발표였다. 업자들이 갖고 있던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발급의 신분증명서가 사실이고 이들이 군의 어용업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경찰은 이들에게 도항 편의를 제공했고, 더불어 ‘유괴방식으로 모집’된 여성들도 위안소로 보내졌다.

따라서 일본 내무성이 내세운 ‘위안부’의 도항 허가 조건은 국제사회의 인신매매 금지법을 의식한 것이었으며, 실제로는 만 21세 이하 여성이 도항 허가를 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또한 도항 허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 식민지인 조선이나 만주에서 도항허가를 받는 편법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식민지는 일본이 가입한 국제법에서 제외되어 있기도 했고, 일본에 비해 차별적이거나 불비(不備) 상태이거나 예외 상태인 법의 시행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가장 신뢰했던 민간 위안소 위탁자는 ‘포주’라 불린 유곽업자들이었으며 이들은 공창제 하에서 형성된 인신매매 메커니즘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군은 1938년 3월 4일의 통첩에서 경찰이나 헌병의 ‘긴밀한 연계’를 명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는 ‘위안부’ 동원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곧 일제의 법역(法域) 안의 중층성과 차별성을 활용하여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만들어냈으며, 그 일부를 이루는 것이 도항 통제 시스템이었다. 

이번에 발간된 도항 통제 자료집은 한국의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를 ‘위안부’ 관계 자료로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이미 발간된 ‘위안부’ 관계 자료집에 포함되어 있던 도항 통제 자료를 일본군과 일본정부, 조선총독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위안부’ 피해 실태 연구와 토론이 좀 더 심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박정애 연구위원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지역이 활용되는 방식을 통해 위안부 동원·이송 정책의 식민지성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 시리즈는 인신매매 사건, 전시 유언비어, 식민지 경찰과 공창제 등 자료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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