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한국모델’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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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한국모델’의 모색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3.0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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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보고서] ■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연구총서_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한국모델’의 모색〉

■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연구총서_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한국모델’의 모색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인문정책연구총서의 하나로 연구보고서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한국모델’의 모색> (연구책임자: 황정아 한림대 교수, 참여연구진: 한림대 이경구, 서울대 이혜경)를 지난달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경제 · 인문사회연구회 2020년도 인문정책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연구과제 중 하나이다.

코로나19라는 전무후무한 위기가 전 세계를 덮친 지난 1년 동안 수많은 코로나19 관련 논의와 전망이 쏟아졌다. 세계가 끊임없이 바이러스와 분투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K-방역’을 둘러싼 상반되는 평가와 백신 접종에 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오로지 당면한 재난의 종식에만 초점을 맞춘 채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내다보는 목소리가 팽배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각종 문제와 취약점이 위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작금의 현실은 감염병 유행이 끝난다고 해서 저절로 종식될 리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연구보고서는 팬데믹 1년을 돌아보며 한국사회가 떠안은 다양한 고민과 과제에 대한 성찰과 함께 한국이라는 장소의 감각에 충실하게 기반해 이를 대전환으로 돌파할 계기, 곧 ‘한국의 길’을 탐색한다.

황정아 교수의 이 연구는 민주주의라는 관점을 통해 한국의 팬데믹 대응을 재점검하고 민주적 시민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모델’을 제시한다. 한국의 방역이 최고라는 ‘국뽕’적 해석이나 첨단기술로 개인의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기술 디스토피아적 해석, 권위에 순응하는 유교문화적 산물이라는 시각 등 K-방역을 둘러싼 국내외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나가는 이 연구는 한국의 경험을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고 그 성과를 온당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특히 팬데믹의 위기가 공동체와 집단 주체성을 새롭게 사유하여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심화할 것을 요청하는데, 서구의 팬데믹 담론들이 이런 요청에 응답하지 못한 채 국가 공동체를 개인과 대립하는 통제기구로 보거나 포함과 배제의 프레임에 가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나아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촉구하는 동시에 그런 개입 자체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시민들의 주체적 역량과 민주화, 즉 민주주의 자체가 팬데믹 대응의 핵심임을 힘주어 말한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우애’를 새로운 공동체의 이념으로 재발굴하는데, 정치적 우애를 통해 공동체를 새롭게 이해하고 집단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팬데믹 시대 민주주의의 과제로 제시한다. 우애가 서로를 향한 배려와 책임, 그리고 돌봄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 것이 K-방역의 성과임을 밝히며 민주주의적 우애를 실천한 결과물이 꾸준히 쌓이면서 실현될 한국모델을 제안하는 것이다.

* 이 연구보고서의 개요와 결론부를 소개한다.

<개요>

본 연구는 팬데믹 시대가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를 ‘커먼즈’(commons)로서 다시 사유하고 ‘정치적 우애’를 통해 집단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민주주의의 과제로 제시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논의의 출발점은 서구 팬데믹 담론들의 한계를 비판하는 작업이다. 팬데믹 선언 이래 쏟아진 다수의 인문학 담론들은 생명정치와 예외상태의 발동을 우려하면서 방역조치 일반을 푸코식의 감시와 통제 패러다임 내지는 탈국가 프레임으로 조명하거나, 아니면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통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국가/공동체 vs. 개인이라는 구도를 떨치지 못한 채 현재의 위기가 요청하는 집단 주체성을 대담하게 상상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이른바 ‘아시아’의 상대적 방역 성공을 두고 유교적 정치유산이나 개인주의 결핍이라는 등 낡은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이나 체제경쟁에 따른 냉전적 시각마저 노정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듯 팬데믹의 위기는 저항에 대한 강박으로 민주주의적 실천을 대체함으로써 체제적 대안의 사유를 방기한 담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 연구는 위기의 시대에 국가나 공동체의 책임 있는 개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개입을 요청하는 동시에 그 개입에 다시 개입하는 집단 주체를 절실히 요구한다는 사실에 착목한다. 먼저, 계속해서 혁신되고 재구성되는 공동체에 관한 구상을 ‘커먼즈’(Commons) 논의를 통해 뒷받침한다. 커먼즈란 단순히 공유지나 공유자원 같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이 스스로를 주체화함으로써 공적인 영역을 만들어내고 변화시키는 과정 자체를 뜻한다. 다른 한편, 그와 같은 커먼즈의 주체, 즉 자기통치하는 민주주의의 집단 주체들이 단순한 권리 주장을 넘은 협동적 창조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커머닝’의 작업을 가장 충실히 표현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프랑스혁명의 세 구호 가운데 가장 소홀히 취급 받아온 ‘우애’임을 밝히고, 정치적 우애를 우리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민주주의적 가치임을 주장한다. 나아가 엄밀히 ‘형제애’를 가리키는 ‘fraternity’에 비해 번역어인 우애가 오히려 ‘형제애’에 새겨진 남성중심성을 비판하고 친밀함 속에 미리 보편의 영역을 기입하는 이름이라는 점도 아울러 논한다. 

그런 논의를 거쳐 이 연구는 K-방역을 우애의 서사로 의미화하며 그 서사가 최소한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촛불혁명은 우애가 자유와 평등의 선취를 가능하게 하는 가치임을 실증했으며 그 생생한 우애의 경험이 재난의 극복과 민주주의의 심화를 하나의 과제로 수행하는 K-방역의 방식을 추동했다. ‘한국모델’은 더 많이 법제화된 민주주의나 더 우수한 방역성적이 아니라 우애의 ‘커머닝’이 지속적인 밀도를 갖고 살아있는 공동체를 가리키며 우애가 기본적인 권리임을 굳건히 인정하는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삶을 위협하는 어떤 재난과 위기가 기다리고 있든 그것을 빌미로 민주주의의 유예를 정당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그것의 극복을 민주주의의 진전과 연결시키겠다는 약속이다. 그런 의미의 한국모델을 적절히 의미화하는 작업을 서구 담론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에 K-담론의 필요성이 있다. 

 

<결론: 우애의 권리와 ‘한국모델’>

K-방역과 관련한 웹 조사와 기사 분석은 어디까지나 ‘코로나19가 우리를 어떻게 바꿔놓았나’라는 문제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는 코로나19가 조사에서 밝혀진 모든 경향과 변화들을 추동한 원인으로 가정되었고, 이 보고서가 방역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제로 제시한 ‘종합국면’적 고려를 담고 있지는 않다. 즉 한국사회가 어떤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팬데믹을 맞이했는가 하는 더 광범위한 맥락을 분석에 포함하지는 못한 것이다. 맥락이 소거되자 K-방역이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방역과 민주주의의 결합 양상 역시 코로나19가 원인이 되어 야기한, 다시 말해 극심한 재난의 상황이 만들어낸 예외적인 사건처럼 설명된다. 감염병이 그런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재난, 이를테면 전쟁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를 앞에 두고 함께 싸워나가는 경험, 공동체의 중요한 일에 참여하는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이다. 전시에 사람들이 들뜨고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코로나 19 방역전에서 시민들은 전시 고양감을 저강도로 경험하는 것 같다. [천관율,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의외의 응답편」]

하지만 종합국면적 시야를 차치하고 표면적으로만 보더라도 이 설명은 가령 ‘중국모델’을 설명하기에 더 어울리지 않는가? 전시 체제가 사람들을 단순히 이념적으로가 아니라 정동적으로 동원하는 기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대대적인 애국주의적 캠페인 속에서 ‘고양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비자발적’ 상태와 흡사하다. 그리고 대개 전시 상태는 공동체 내부의 고양감 못지않게 외부를 향한 ‘적대감’을 동반한다. ‘공동의 목표’라기보다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생성되는 경험인 것이다. 코로나19가 그런 식의 ‘적’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런 설명은 왜 어떤 곳에서는 고양감이 발휘되고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밝혀주지 않는다. 

전시 고양감과의 유비는 이 조사가 강조하고자 한 ‘연대’의 성격이 매우 제한임을 다시금 드러낸다. K-방역에서 발휘된 ‘연대의 시민성’이라는 것이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커머닝의 실천이자 민주주의적 주권의 행사와 이어져 있음을 간과한 결과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애’가 더 적합한 개념이라는 것이 이 보고서의 주장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와 같은 우애의 집중적 발현은 서구의 일부 팬데믹 담론이 이야기하듯 신자유주의적 폐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었다는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라, 팬데믹 이전부터 고조되어온 민주주의적 커머닝의 기세라는 맥락과 연결해야 제대로 해명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팬데믹과 맞닥뜨린 때는 촛불혁명이라는 대대적인 민주주의의 고양이 생생히 남아있는 시점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촛불혁명의 가장 인상적이고도 압축적인 구호는 ‘이것이 나라냐’하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구호의 민주주의적 함의는 사실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커머닝을 통해 국가라는 공동체의 체질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 국가란 인민주권이 상시적으로 발동되는 ‘커먼즈’임을 수행적으로 현실화하는 선언이었다. 더욱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주요 나라들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전히 다른 모든 대안을 비웃고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우상’이면서 동시에 ‘텅 빈 상투적 개념’으로 퇴조한 시점에서 터져 나온 구호였기에 그것은 사실상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영혼’을 열정적으로 다시 살려내는 주문과도 같았다. ‘이것이 나라냐’하는 거대한 책무의 요청이 여전한 반향으로 실재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정부가 그 어떤 나라의 정부보다 더 책임 있게 방역의 전선에 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혁명 역시 민주주의적 우애의 서사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집중된 주권의 발휘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많은 문제점들이 오히려 터져 나왔고 갈등은 더욱 가시화되었으며 어떤 면에서 불만도 더욱 커진 듯 보인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촛불혁명 당시에도 집단주체로서의 정치적 효능감이 상승함에 따라 차이에 대한 감각과 배제에 대한 의식 또한 그만큼 예리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주권자임을 깨닫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주권자로서 불러내는 그 과정이야말로 ‘창조적 협동’으로서의 커머닝의 현현이었고 광장을 열어 온갖 의견과 이슈들에 발언권을 만들어준 집단적 행위는 정치적 우애가 무엇인지 새롭게 정의하는 경험에 다름 아니었다. 거기서 발화된 것은 대부분 자유와 평등의 결핍에 대한 개탄이었고 그것들의 실현의 지연을 향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결핍과 지연이라는 부정성의 확인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광장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어떤 고양감이었고 이 고양감은 적에 맞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서, 그리고 동료 시민들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었다. 촛불혁명에 이르는 과정의 출발점에는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그간의 사회적 참사, 특히 세월호 참사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시민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스스로나 동료시민들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이 있었다. 촛불시위는 바로 그런 (자기)불신과 무기력을 떨쳐내는 계기였던 것이다. 

촛불광장은 정권교체를 거의 성취하고 시대교체의 과제를 분명히 한 데 더하여 우리 자신과 화해하고 동료를 향한 신뢰를 재발견하게 해준 점에서 혁명의 시간이자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간 이곳이 ‘헬조선’임을 실감케 하는 ‘갑질’이 어떠했으며 처절한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자조는 어떠했던가. 아니 각자의 도생마저 번번이 꺾어놓는 상황이었기에 광장의 시간은 더 놀라웠으며 지나온 많은 나날들과 다른 ‘비연속성’으로서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또한 새삼스런 경이로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와 연대감 같이 사라진 듯 보인 민주주의적 감정들이 ‘잠재성’의 형태로 실재해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아주 없음”이 된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황정아,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김금희와 황정은의 최근 소설들」 『창작과비평』 175 (2017) 54-5면. 인용문 안의 인용은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년) 42면]

그렇듯 촛불혁명은 우애가 커먼즈적 공동체의 작동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공동체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역량임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또한 우애란 자유와 평등이 부정될 때조차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선취’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런 ‘선취’의 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정을 살아있게 하는 가치임을 보여주었다. 자유와 평등이 법과 제도에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확고하게 보장받는 권리로 정착되는 것을 용이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 그렇듯 법과 제도로 보장받기까지 무시되기 쉽다는 것, 따라서 그런 보장을 위해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애가 법적이지도 제도적이지도 않다는 것은 오히려 법과 제도로 정착되는 것과 무관하게 ‘즉각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언제든 실현될 수 있는 우애는 또한 그 효력에 기대어 발동된 자유나 평등의 ‘즉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촛불혁명이라는 응축된 우애의 실천이 있었기에 팬데믹 앞에서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 다.”(2020년 6월 9일자 문재인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라는 예외적 다짐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 다짐이 얼마나 현실화되었는지는 논란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K-방역에 대한 자부심도 많이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실제로 뒷걸음질 쳐서가 아니라 고양된 우애의 경험에 비추어 일상이 너무 더디게 바뀌는 탓이다. 더불어 우애를 가로막는 장애가 무엇인지도 속속 새롭게 밝혀지는 중이다. 그렇듯 한국사회는 팬데믹의 와중에도 계속해서 공동체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런 문제제기들이 정치적이고도 정동적인 파장을 이루며 동료 시민들의 우애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 

‘한국모델’이란 반드시 더 많이 법제화된 민주주의나 더 우수한 방역성적이 아니라 그렇듯 민주주의와 우애의 ‘커머닝’이 지속적인 밀도를 갖고 살아있는 공동체를 가리킨다. 촛불혁명 이후에 더욱 본격화된 온갖 싸움들이나 마찬가지로 K-방역의 지루한 과정 역시 우애의 역량을 검증하는 시험대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모델’의 성패는 우애가 자유와 평등 못지않게 기본적이고 당당한 정치적 권리임이 얼마나 넓고 확고하게 인정받는가에 달려있고 ‘한국모델’이라는 명명은 사실상 그런 인정을 위한 분투의 매개에 다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아직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팬데믹의 위기는 같은 위기가 더 많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심지어 더 큰 위기가 임박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전조이다. ‘한국모델’은 재난과 위기를 빌미로 어떤 커머닝의 억압도 정당화하지 않겠노라는 선언과도 같다. 그것은 글로벌하고 로컬한 그 모든 위기와 재난을 민주주의의 퇴보도 유예도 아닌, 도리어 그것의 고도화와 연결시키겠다는 약속을 가리키며 그런 약속이 실현되는 만큼만 소급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K-담론은 그런 의미의 한국모델을 바로 그런 성격으로서 의미화하는 담론을 지칭하기 위한 표현이다. K-방역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 서구 담론 어디서도 그 점에 관해 제대로 해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커머닝에 대해 독자적으로 해명하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그런 해명을 다시 커머닝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그것은 서구 담론을 다양하게 참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날카롭게 짚어내고 전통 담론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 보고서가 시도한 공동체와 우애의 해석도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이런 작업이 아직 미흡하며 이후 더욱 심화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황정아 한림대·현대영미소설

서울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D. H. 로런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서 현대 영국소설과 한국소설 및 비평이론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개념비평의 인문학』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편저) 『소설을 생각한다』(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아메리카의 망명자』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도둑맞은 세계화』 『이런 사랑』 『컬러 오브 워터』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쿠바의 헤밍웨이』 『패니와 애니』(공역) 『역사를 읽는 방법』(공역) 『종속국가 일본』(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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