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정책과 민주적 정당성
상태바
탈원전 정책과 민주적 정당성
  • 이 건 한양대·행정학
  • 승인 2021.03.07 2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론]

현 정부 출범 이후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정부와 이해집단 간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탈원전 정책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며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 유권자와의 약속인 공약을 이행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큰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대통령의 선거공약은 탈원전 정책 하나가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이 패키지화되어 있어 표를 준 유권자들이 정확히 탈원전 정책에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라 할 수 있다. 대운하 건설 공약을 가지고 상대 후보에 비하여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 대운하 건설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비등해지자 결국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사업’으로 축소·수정하였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당시 가장 첨예한 이슈 중에 하나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과 관련된 문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안전한 대한민국’을 천명하고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을 공약하였으나 당선 후 이에 대한 집행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7년 6월 27일 국무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신고리 5·6호기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공론화 방식으로 이 문제를 결정하기로 천명하였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추진단을 발족하고 결정에 참여하는 시민참여단 5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총 33일간 숙의 기간 동안 시민참여단에게 원전 이슈와 관련된 자료와 정보 그리고 교육을 균형 있게 제공하였다. 특별히 최종결정을 앞두고 시민참여단은 2박 3일 동안 합숙을 하며 종합토론회 등의 숙의 과정을 거쳤다. 시민참여단은 숙의 과정을 통해 획득한 지식과 태도를 기초로 각자 자유롭게 결정에 참여하였다. 시민들의 최종결정은 두 가지로서 건설 중에 있는 신고리 5·6호기는 재개되어야 한다는 것과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은 중장기적으로 ‘원전 축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결정은 정부에서 즉각 수용되어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재개되었고 탈원전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즉,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탈원전 정책은 대통령 선거공약이자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이중적으로 확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전 이해관련 집단 및 일부 매체를 중심으로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고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공론화 단계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공론화 단계에서 일부 매체가 보여준 논리는 정부가 결정해야 할 사안을 시민에게 전가하여 책임을 시민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민주주의 원리를 도외시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주로 자신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투표 참여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은 투표를 통한 정치참여 이외에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 특정 이슈에 대해 시민들이 숙의를 통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참여의 기회를 확대시키며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공론화 결과 도출 이후, 일부 원전 이해관계 단체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간헐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과반수의 시민들이 탈원전에 반대하는 결과를 제시하며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폐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전이라는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회성 여론조사 결과와 장기간의 교육 및 숙의 과정을 거친 시민참여단의 결정 결과는 질적인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으며 어느 쪽의 결과가 더 신뢰할만한지는 자명하다. 일부 매체는 원자력 발전소의 우수성과 경제성을 부각시키며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기도 한다. 언론의 보도는 ‘무엇을’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에 대해 주관적 취사선택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완전히 객관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나라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정책을 의도적으로 변경하려는 시도만큼 비민주적인 것은 없다. 민주주의 체제는 말과 글에 의한 선언적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성원의 합의로 결정된 사안이 존중되고 수호되는 실천에 의해서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한편 아무리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정책이라도 집행과정의 절차적 위법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최근 감사원 감사과정에서 부처 공무원들에 의한 월성 원전관련 자료의 고의적 은폐·폐기와 같은 위법적 행위는 수사를 통해 명백히 밝혀져야 하며 불법성이 확인될 경우 수사당국은 관련자들을 전원 의법 조치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원전 반대론자들은 정책 집행과정의 절차적 위법성을 이유로 탈원전 정책의 무력화를 시도함으로써 정책의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이 건 한양대·행정학

미국 시카고 소재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행정연구원 및 경기대학교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관료행태, 정부혁신, 정책평가, 공공인사관리이다. <한국행정연구>, <한국조직학회보>, <한국인사행정학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토착화 사례연구』(공저), 『새 한국정부론』(공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