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이후』 이후의 진화생물학과 사람의 진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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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이후의 진화생물학과 사람의 진화사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2.2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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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32강>_ 정충원 서울대학교 교수의 「생명의 진화: <다윈 이후>」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5. 근대 과학과 인간의 삶’ 제 32강 정충원 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다윈 이후』 이후의 진화생물학과 사람의 진화사

정충원 교수는 “진화생물학이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1970년대 초반의 관점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한 세기를 돌아보는 책”인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다윈 이후』를 매개 고리로 하여 『다윈 이후』의 이후 “진화생물학 발전상을 인류 진화사”, 특히 “인류유전학을 통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조망”한다. 달리 말하여 “해부학적 현대인의 기원과 진화, 유전적 다양성과 집단 구조, 인류의 대표적 특성인 고도의 사회성과 협력 행동의 진화”에 대하여 답을 찾아가는 학문적 여정의 일환으로서 “1970년대 이후 진화생물학”이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개괄해 보인다. 

지난 1월 9일, 정충원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3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서론 - 『다윈 이후』까지 진화생물학의 발전 과정

우리가 사는 지구의 생물은 다양하다. 또한 생물의 다양성은 결코 무작위적이지 않고 각 생물종의 환경과 생활사의 맥락에서 매우 기능적이다. 

현대 생물학, 특히 현대적인 의미의 진화생물학은 이러한 생물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찰스 다윈은 1859년 발간한 『종의 기원』에서 공통조상 이론(common ancestry)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설명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진화생물학의 시작을 알리고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다윈이 1872년에 출간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공유하고 있는 다양한 감정 표현에 대해 논함으로써 자신의 진화 이론을 사람에게 직접 적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충실히 따른 다윈 이후의 진화생물학은 기독교적 특수창조설이 제시하였던 사람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을 메우고 사람의 위치를 크고 무성한 생명나무에 돋아난 작은 가지 하나로 올바르게 돌려놓았다.

20세기 초 유전학의 발전은 자연선택 이론을 현대적인 형태로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윈과 동시대를 살았던 멘델의 유전 법칙이 20세기 초반 드 브리스와 코렌스 등에 의해 “다시 발견”된 이후에야 유전의 원리가 확고히 정립되었다. 뒤이어 월터 서턴(Walter Sutton)과 테오도르 보베리(Theodor Boveri)는 염색체가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가정하는 유전의 단위 입자라는 “유전의 염색체 이론” 혹은 “서턴-보베리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유전의 물질적 기반을 처음 밝혀내었다.

로널드 피셔와 그의 1930년 저서 『자연선택의 유전학 이론』의 표지

로널드 피셔(Ronald A. Fisher)는 『자연선택의 유전학 이론(The Genetical Theory of Natural Selection)』 등의 저서를 통해 자연선택 이론을 유전학에 기반한 수학 모형으로 재구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그림 1). 나아가 피셔와 존 할데인(John B. S. Haldane), 시월 라이트(Sewall Wright)는 집단 안에서 한 유전자의 서로 다른 형태를 일컫는 대립유전자(allele)의 빈도가 자연선택뿐만 아니라 돌연변이,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 동계교배(inbreeding), 유전자 재조합(recombination), 유전자 흐름 등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다양한 수학 모형을 제시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멘델의 유전 법칙 하에서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는 집단유전학(population genetics)이라는 학문 분야를 열었다.

집단유전학을 통한 다윈의 진화 이론과 유전학의 융합은 다양한 생물학 분야에서 관찰된 대진화(macroevolution)의 양상이 집단유전학에서 설명하는 소진화(microevolution)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진론(gradualism)적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와 같이 유전학과 결합한 다윈의 진화 이론이 20세기 중반 이후 생물학 전반에 걸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현상을 진화의 “근대적 종합(the modern synthesis)”이라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화생물학이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1970년대 초반의 관점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한 세기를 돌아보는 책이다. 이 글에서는 『다윈 이후』 이후 진화생물학의 발전상을 인류 진화사, 특히 인류유전학을 통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조망하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해부학적 현대인의 기원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78억 명의 사람은 모두 단 하나의 종(혹은 아종)에 속한다. 고인류학에서는 흔히 “해부학적 현대인(anatomically modern humans; AMH)”이라는 용어로 현생 인류와 해부학적 특징이 충분히 비슷하면서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고인류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화석 및 현생 개체들을 하나로 묶어 가리킨다. 해부학적 현대인이라는 용어에는 뼈에 남는 형태적 특징을 중심으로 현대인과 동일 집단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생각 또한 담겨 있다.

해부학적 현대인이 언제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화석 기록상에 나타난 현대인과는 다소 형태가 다른 고인류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고인류학 분야에서 지금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핵심 질문이다. 20세기 중반에 동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진 다수의 고인류학 발굴은 이른 시기 인류 계통에 속한 다양한 종의 화석들을 산출하였다. 인류 계통과 호모 속의 아프리카 기원은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확고히 입증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큰 몸집과 뇌, 긴 다리, 정교한 도구 사용 등 호모 속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로 퍼진 첫 인류 계통이기도 하다. 호모 에르가스터/에렉투스가 처음 화석 기록에 나타난 약 180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발견되는 호모 속의 화석들은 상당한 형태적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분류와 각 분류군 사이의 관계는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해부학적 현대인의 기원에 대한 가설은 그 시기 및 옛 호모 사피엔스(archaic Homo sapiens)로 통칭되는 고인류들과의 관계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20세기 중후반 고인류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는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the recent out-of-Africa origin hypothesis)”로, 해부학적 현대인과 가장 최근 시기의 고인류 사이의 뚜렷한 형태 및 석기 제작 기술의 차이에 주목하여 해부학적 현대인이 약 20만~30만 년 전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였으며, 약 5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로 확산하면서 기존의 고인류를 대체하였다는 가설이다.

이에 대립하는 “다지역 기원설(the multi-regional origin hypothesis)”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옛 호모 사피엔스에서 나타나는 뇌 크기 증가와 같은 일부 진화 경향의 공유 및 몇몇 형태 형질의 지역적 연속성에 주목하였다. 이를 토대로 다지역 기원설에서는 해부학적 현대인이 아프리카를 처음 벗어난 호모 에렉투스/에르가스터의 후손으로, 각 지역의 해부학적 현대인은 해당 지역 고인류 집단에서 기원하였음을 주장한다. 각 지역 집단들은 낮은 수준의 유전자 흐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역적 차이를 유지하기 충분할 만큼 격리가 이루어져 있었지만 뇌 크기와 복잡한 사고 및 행동에 영향을 주는 돌연변이처럼 적응적으로 유리한 변이는 유전자 흐름과 자연선택의 조합을 통해 빠르게 확산하여 화석 기록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진화 경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다지역 기원설의 핵심이다.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은 모두 해부학적 현대인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후 유라시아로 확산한 것을 가정하지만, 해부학적 현대인의 기원 시기와 플라이스토세 중/후기 호모 속 고인류와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다른 예측을 한다(표 1).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의 주요 차이점

화석 증거에 의존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인류학계의 논쟁은 인류유전학자들이 DNA 염기 서열의 다양성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분자생물학 실험 기법들을 도입한 1980년대 이후 빠르게 정리되었다. 인류유전학자들은 세포 하나당 수십 개에서 수만 개까지 들어 있어 추출하기 쉽고, 돌연변이율이 높아서 진화 속도가 빠른 미토콘드리아 염기 서열을 대상으로 이러한 기법들을 처음 적용하였다. 그 결과, 1) 현대인 미토콘드리아 염기 서열 계통수의 가지 대부분은 아프리카인에게서만 발견되며, 아프리카 바깥의 현대인들은 이 계통수의 아주 작은 가지 하나에서 기원하여 다양성이 매우 낮고, 2) 아프리카 바깥의 현대인 미토콘드리아 서열들은 겨우 약 8만 년 전에 살았던 공통조상을, 현대인 전체의 미토콘드리아 서열들은 약 16만 년 전에 살았던 공통조상을 가짐을 알아내었다. 흔히 “미토콘드리아 이브”라고 부르는 모든 현대인 미토콘드리아의 공통조상이 겨우 16만 년 전에 살았다는 것은 다지역 기원설을 부정하고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그림 2). Y 염색체 염기 서열을 이용한 연구 역시 비슷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사람 미토콘드리아의 계통수를 처음 보고한 칸, 스톤킹, 윌슨의 1987년 논문

미토콘드리아와 Y 염색체에 대한 연구는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에 많은 무게를 실었지만, 유전자 변이를 통해 집단의 과거를 추정하는 통계적 방법론들은 내재적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논쟁을 종결할 수 있는 수준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압도적인 정확도를 가진 분자 증거는 2000년대 후반 이후 전체 유전체 수준에서 확인한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 자료와, 오래전에 죽은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고인류의 뼈에서 직접 얻은 고인류 유전체와의 비교를 통해 확보되었다. 즉, 미토콘드리아와 Y 염색체를 통해 파악한 경향과 같이 현대인의 유전적 다양성은 매우 낮은 수준이고,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유라시아로 빠르게 확산하였다는 가설과 일치하는 패턴을 보이며, 모든 해부학적 현대인 집단들은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고인류보다는 자기들끼리 훨씬 더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유전체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 인류 진화사가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아프리카를 벗어난 해부학적 현대인이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유라시아의 고인류 집단을 완전히 대체한 것이 아니고, 상호 교배를 통해 일부 유전자를 고인류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자의 경우 아프리카 바깥의 모든 현대인 집단에서 비교적 고르게 유전체의 2퍼센트 내외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현대인 유전체 안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조각의 크기를 이용하여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약 5만~6만 년 전에 현대인 유전자 풀로 들어온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해부학적 현대인과 고인류의 상호 교배는 네안데르탈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호주와 뉴기니의 원주민들은 남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고인류인 데니소바인(Denisovan)과 관련된 집단으로부터 얻은 유전자 조각들이 유전체의 약 3~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데니소바인은 유라시아 동부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의 자매군으로 생각되지만, 알려진 화석 기록이 없어서 형태적 측면은 큰 치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티베트인의 고지 적응에 중요한 영향을 하는 유전자인 EPAS1(endothelial PAS domain-containing protein 1)의 티베트인 특이적 변이는 데니소바인과 유사한 고인류 조상에게서 기원하였다.

최근에는 점점 더 많은 수의 고인류 유전체를 확보함에 따라 고인류와 현대인 사이의 관계를 뛰어넘어 고인류 집단의 진화사에 대한 정교한 재구성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향후 고유전체 연구는 해부학적 현대인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이전 시기의 유라시아 고인류의 역사에 대해서도 상세한 추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구조

현대인 진화사의 중요한 특징은 해부학적 현대인이 매우 젊은 종이고,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낮으며, 집단 간 차이 역시 매우 작다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 종 전체가 갖고 있는 유전적 변이 중 집단 내 변이가 집단 간 변이에 비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집단 간 차이는 당연히 두 집단이 갈라진 이후에만 발생할 수 있는데 현대인 집단은 대부분 최근 수만 년 사이에 분화하여 집단 간 유전적 차이를 축적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현대인 집단 사이의 작은 차이는 집단유전학자들이 유전적 다양성을 처음 측정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현대인의 유전적 다양성에 대한 유전학자들의 관점은 『다윈 이후』 출간 이래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지만, 일반 대중과 사회가 사람의 유전적 다양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유전학 지식에 기반하여 크게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1960-1970년대는 인종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었고, 기존의 제도화된 인종 차별이 사회적 투쟁의 결과로 변화되기 시작한 변곡점이었다. 인류의 공통된 역사와 낮은 수준의 분화를 강조하는 인류유전학계의 일관된 태도는 사회, 심지어 학계에 만연하였던 인종주의적 관점을 해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인종주의(racism)는 현대인 집단 사이에 어느 정도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인종주의는 역사적으로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주장으로 구성된다. 첫째, 현대인은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몇 개의 집단으로 나뉘며 이들 집단은 다른 동물종에서 아종 수준의 차이에 해당된다. 둘째, 이들 집단은 지능이나 성격과 같은 여러 형질이 뚜렷이 차이나는 값을 갖는다. 셋째, 형질들의 이러한 큰 차이는 특정 집단에서의 자연선택에 의해 생겨났고, 따라서 특정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실제로 적응적 우월성을 갖는다. 이를테면 거친 자연환경에 맞선 역사적 경험 속에서 북유럽의 백인이 높은 지능과 진취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이다. 넷째,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종 간 차이는 이러한 적응적 형질의 차이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차별이 아니라 공정한 결과이다. 현대 인류유전학은 위의 주장 중 세 번째 까지를 사실 증거를 통해 기각한다. 네 번째 주장은 처음 세 가지 사실 명제를 바탕으로 한 가치 명제이므로, 자연스럽게 기각된다.

우선 현대인 집단들이 유전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아종 수준의 집단으로 나뉜다는 주장, 특히 흑인, 황인, 백인과 같은 집단 구분은 현대인의 유전적 다양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통해 확실히 논박된다. 유전체 수준의 자료를 분석했을 때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이 지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인류의 집단 구조는 인종주의가 제시했던 인종의 구분 기준과 전혀 맞지 않는다. 

또한 인종주의는 각 인종을 매우 뚜렷하게 구분되는 유전적 정체를 갖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인류의 다양성은 분절적인 클러스터(cluster)처럼 분포한다기보다는 무지개의 색과 같은 연속적인 분포, 즉 유전자 경사(genetic cline)로 나타난다. 물론 아프리카를 벗어나 확산하는 과정, 아프리카를 벗어난 후 이른 시기에 현대 유라시아 동쪽과 서쪽에 사는 집단의 조상들로 확산의 경로와 집단이 나뉜 과정, 마지막 빙기 동안 피난처(refugia)로의 격리, 호주 아대륙 및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확산 등에서 해당 인류 집단들이 강한 창시자 효과(the founder effect) 혹은 병목 현상(the bottleneck event)을 겪었기 때문에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중요한 축들을 집단 계통수의 형태로 의미 있게 단순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인류 유전적 다양성의 중요한 축들은 이렇게 갈라진 이후 계속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혼합을 겪으며 유전자 경사를 형성하였다. 예를 들어, 유럽과 중동의 서유라시아인과 동아시아인이 유라시아인 유전적 다양성의 양극단을 나타내기 때문에 혹시 인종주의에서 상정하는 “백인”과 “황인”이라는 분류가 적절하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인공적 분절은 내륙 유라시아와 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집단들의 유전적 다양성을 무시한다. 이를 인종주의의 과도하게 단순화된 범주적 구분에 맞추는 것은 무지개를 빨강과 파랑 두 개의 색으로 구분하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잘못된 작업이다.

인종 사이에 자연선택을 통해 범주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많은 형질들이 존재한다는 인종주의의 두 번째 주장은 일부 관련된 사례를 찾을 수 있지만 인종주의에서 역사적으로 주장해온 사례가 입증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선 명확히 할 것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인종 구분을 지지하지 않듯, 인류의 일부 집단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다른 집단들과 뚜렷하게 차이 나는 유전자 혹은 표현형을 갖게 된 국지 적응(local adaptation)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종주의에 부합하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피부색 분포는 위도 및 자외선 강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전장유전체 연관 분석(genome-wide association study; GWAS)과 같은 통계유전학 연구는 피부색에 영향을 주는 수십 개의 유전자 변이를 발견하였는데, 이 유전자 변이들, 궁극적으로 피부색의 진화를 자연선택이 추동하였음을 지지하는 증거 역시 뚜렷하다. 저위도에서는 강한 자외선에 의한 돌연변이와 엽산(folate) 분해를 막기 위해 짙은 피부색이 유리하고, 고위도에서는 비타민 D 합성에 충분한 양의 자외선 흡수를 위해 옅은 피부색이 유리하기 때문에 지역별로 다른 피부색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는 설명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이다. 인류의 국지 적응에 대한 이러한 유전학 연구는 인종주의가 관심을 갖는 형질과는 다른 형질에 집중할 뿐만 아니라 자연선택이 일어난 시기와 집단 역시 인종주의적 주장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건강한 연구 전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인종 간 적응적 분화가 흔히 나타난다는 인종주의의 주장을 반박하는 첫 번째 증거는 인류 유전자 변이의 분포 자체이다. 21세기 20년 동안의 유전학 연구는 다양한 현대인 집단에 속한 수만 명의 유전체를 해독하였고, 사람들 사이에 서로 다른 대립유전자를 보이는 변이의 수와 위치, 집단별 대립유전자 빈도를 매우 자세히 분석하였다.

이 연구들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에서 집단 간 차이가 설명하는 부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지지한다. 뿐만 아니라 제한적인 집단 간 차이 역시 대부분 대립유전자 빈도의 작은 차이로 나타나며, 두 집단 사이에 대립유전자 빈도가 자연선택을 통해 뚜렷하게 차이나게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단일 유전자 수준에서 인종주의적 주장에 부합하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표현형 수준에서 강한 국지 적응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표현형이 많은 수의 유전자가 작은 영향을 미치는 “다유전자 형질(polygenic trait)”이기 때문이다. 다유전자 형질에 대한 자연선택이 개별 유전자 수준에서 큰 빈도 변화를 나타내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많은 수의 유전자가 해당 형질을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도록 조금씩 빈도가 변화함으로써 표현형 상의 큰 변화를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인류유전학 연구는 다유전자 형질에 대한 자연선택이 광범위하게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인 집단에 서로 다른 자연선택이 광범위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섣불리 인종주의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접근이다. 오히려 다유전자 형질에 대한 자연선택은 인종주의적 주장을 기각하는 양상을 보인다. 인종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최근 1-2천 년에 해당하는 역사 시대 동안 매우 강한 자연선택이 작용하여 “인종” 수준에서 큰 차이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는 다유전자 형질들의 집단 간 분화 정도는 여전히 매우 낮고, 자연선택의 방향 역시 한 “인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집단 사이에서 서로 다르거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흔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동물인가

진화생물학에서 1960~1970년대는 집단선택설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굵직한 논쟁이 크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논쟁들의 핵심에는 이타 행동과 협력, 즉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의 진화를 설명하는 문제가 있다. 사람은 대부분의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다양한 협력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이타 행동과 협력의 진화는 사람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의 사회성과 협력 행동에 생물학적, 즉 유전적 요소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회생물학이 처음 등장한 1970년대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주장이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는 매우 당연해 보인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현생 유인원인 침팬지와 보노보의 사회 구조와 행동은 사람과 매우 다르고, 침팬지나 보노보를 사람과 비슷한 환경에 장기간 노출시킨다고 해서 이들의 행동이 사람과 비슷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전적 차이를 단순히 본성 대 양육, 유전자 대 환경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개별 행동 요소들이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 유전적으로 고정된 기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과도한 해석이다.

이러한 과도한 유전적, 적응주의적인 해석은 진화심리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진화심리학에서는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이 실은 공통의 유전적 기반을 갖고 있다는 “환기된 문화(evoked culture)” 개념을 제시한다. 즉, 진화적 경험과 자연선택을 통해 다양한 환경 요소 각각에 대하여 적응적인 문화(행동/심리) 요소를 출력할 수 있는 유전적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조셉 헨리히(Joseph Henrich)는 다양한 문화권과 환경에 고립된 유럽인 집단의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 지역 환경에 대한 문화적 적응을 선험적인 요소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반박한다. 또한 이러한 사례들은 지식과 행동 규범의 누적 및 세대 간 전달, 즉 문화적 적응의 중요성을 조명한다. 진화사의 대부분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보낸 해부학적 현대인이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극지방의 한대 기후나 생물상이 완전히 다른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에 대한 행동적 적응을 유전자에 암호화하고 있다는 생각은 역사적인 사례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설득력이 낮아 보인다.

그렇다면 해부학적 현대인이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겪었을 환경과 진화적 문제에 대한 적응은 진화심리학이 가정하는 것처럼 유전적인 것일까? 진화심리학은 플라이스토세 기간 동안 인류가 “진화적 적응 환경(the environment of evolutionary adaptedness)”이라는 일군의 환경적 요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인류의 행동과 심리는 이러한 환경 요소에 대한 적응이라고 주장한다. 진화적 적응 환경은 흔히 건조한 사바나에서의 집단생활로 설명되기는 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물리적 실체에 대응되기보다는 협력 행동, 자녀 양육, 포식자 회피, 식량 자원 취득 등과 같이 지속적인 선택압을 가하는 적응적 문제의 묶음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전통적인 진화심리학 연구는 현대인의 보편적 특성에 집중하는 반면 개인 간, 집단 간 차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진화심리학의 대표적인 연구 사례인 사회적 계약 관계와 협동, 자녀 양육, 배우자 선호 등에는 매우 큰 개인 간, 집단 간 차이가 존재한다. 만약 이러한 심리 기제 혹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이 적응적 중요성을 가지며 오랜 기간 한 방향으로 작용한 자연선택의 결과라면 이토록 높은 변이가 유지되는 것은 무척 설명하기 힘들다. 적응도에 큰 영향을 주는 형질의 유전적 변이가 자연선택을 통해 빠르게 감소한다는 것은 이미 한 세기 전 피셔가 자연선택의 근본 원리(the fundamental theorem of natural selection)라고 이름 붙일 만큼 잘 알려져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화심리학에서 현재 널리 관찰되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러했을 것으로 간주하는 형질들이 사실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해부학적 현대인이 진화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환경이 공간적으로 다양할 뿐만 아니라 시간에 따라서도 큰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 점차 알려지고 있다. 특히 해부학적 현대인이 등장하는 시점은 기후의 불규칙한 변동이 매우 심했던 시기이고, 따라서 해부학적 현대인의 진화 배경은 지속적으로 유지된 환경 요소들이 아니라 기후와 환경의 가변성 그 자체라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사람의 협력과 이타 행동의 진화가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회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음은 뚜렷해 보인다. 다수준 선택 이론(multi-level selection theory)은 다층적인 사회 구조 하에서 이타 행동의 진화에 대한 일반적이고 직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이타 행동과 협력이 전체 집단 내에서 불균등하게 분포할 때, 즉 이타 행동과 협력이 국소적으로 집적되어 일어날 수 있는 방식으로 집단이 구조화되어 있을 때 이타 행동 및 이를 유발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이타 행동을 설명해온 혈연 선택과 호혜적 이타성이라는 두 개의 설명을 하나의 관점에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일반적이다.

즉, 혈연 선택은 이타 행동이 이타 행동 및 이를 유발하는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높은 친족 사이에 농축시켜서 이타 행동의 분포를 불균일하게 만들고, 호혜적 이타성 역시 이타 행위자끼리의 상호작용을 농축시킴으로써 이러한 분포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수준 선택 이론은 불균등한 이타 행동 분포를 유도하는 기제와 이타 행동이 적응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환경적 상황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여, 이타 행동의 진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제언

다른 모든 생물종의 진화사가 그러하듯, 인류 진화사도 다양한 계통이 갈라지고 섞임을 반복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며, 자연선택, 유전적 부동, 돌연변이, 유전자 흐름 등 진화를 일으키는 힘들이 활발히 작용한 산물이라는 점이 사람의 유전적 다양성을 유전체 수준에서 연구하면서 뚜렷해졌다.

특히 옛사람이 남긴 뼈에서 얻은 고유전체 연구는 현대인의 진화적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한 옛사람의 진화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인류 진화사 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사람의 유전학과 진화생물학은 인종주의와 국수주의의 잘못된 편견을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하며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며,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위한 핵심 분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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