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비판이 허용되며 인류의 생각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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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비판이 허용되며 인류의 생각이 태어났다
  •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 승인 2020.01.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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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서평] 『생각의 싸움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김재인, 동아시아 2019.09.24.)
 

근대과학이 탄생한 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면서부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달 아래(흙, 물, 공기, 불)와 달 위(수성, 금성, 해, 화성, 토성, 목성, 고정된 별)가 서로 성질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즉, 행성들은 언제나 지구를 중심으로 거대한 천구에 붙어 일정한 방향으로 원운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케플러(1594~1600)는 행성이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운동 한다는 법칙을 찾아냈다. 근대과학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라는 스승 밑에서 조수로 일했다. 덴마크의 천문학자인 브라헤( 1546~1601)는 실제로 눈이 좋아 맨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많은 양의 데이터를 남겼다. 후일 케플러가 이 데이터를 토대로 타원운동을 알아낸 것이다. 브라헤가 사용한 관측 도구는 아랍에서 만든 것이었다. 아랍에서 과학, 수학,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직접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로 이어졌다. 
   
김재인 경희대 학술연구교수가 지난해 가을 펴낸 『생각의 싸움』은 대중철학서이면서도 그 깊이를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과학이나 언어학, 생물학 등이 태동할 수 있었는지 철학사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원전의 맥락과 철학개념의 어원, 철학사적 의미와 현대과학으로 이어지는 지점들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읽을 만하다.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깊은 대중철학서

지금의 과학을 있게 한 건 바로 ‘원자’ 개념이다. 원자는 이미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원자를 뜻하는 ‘atom’은 (더 이상) 자를 수 없다는 뜻이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을 통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극복하고자 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세상에 운동과 생성은 없다는 걸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있는 것은 지속되어야 하며, 없는 것으로부터 올 수 없다. 없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운동이나 생성은 없다는 논리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발전시켜서 원자→허공→이탈로 이어간다. 원자는 데모크리토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적 특성을 고려해 부여한 것이다. 허공은 이 원자들이 서로 떨어져 있게끔 한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탈(혹은 편위. clinamen)을 통해 이 원자들끼리 우연히 빗나가면서 서로 충돌해 새로운 합성체가 생겨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피쿠로스는 우주를 “변화무쌍하고 어떤 일들이 우연히 벌어지는 세계”로 간주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파동함수와 양자상태로 우연히 간섭만 일어나는 양자역학을 떠올리게 한다.

김재인 교수는 “존재가 변하지 않으면서도, 현상은 변화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 벗어난 거죠. 현상 세계를 구제하면서도 논리를 놓치지 않은 것”이라고 평했다. 칼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철학사적으로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다.

『생각의 싸움』에선 인류의 이성과 논리가 탄생한 철학의 시작을 탈레스로 보았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설명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선언은 ‘왜’라는 물음을 자동으로 불러온다. 탈레스 전까지는 신화적 사고에 갇혀 모든 게 제우스 등 온갖 신들에 의해 우주가 설명됐다. 탈레스는 물이라는 보통명사를 통해 따져 묻는 로고스적 사고를 촉발시켰다. 신의 권위를 벗어나 비판을 허용하고 적극적으로 물음을 이어가는 것, 이 태도야말로 철학과 과학적 사고의 출발이다. 

김재인 교수는 니체에게서 철학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물론 현재도 철학의 철학함은 흐르고 있다. 플라톤이 강조한 것처럼 철학(지혜) 자체를 갖는 건 불가능하기에 철학자와 철학함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새로운 도덕(종교 혹은 권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이 바로 니체에게 있었다. 여기서 ‘새로운’이란 허무주의를 극복한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모른다. 그 말인즉슨, 어디로 가야하는지 역시 이미 정해진 게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니체는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권유한다. 

철학의 태동, 물음이 가능하고 비판 허용하기

『생각의 싸움』의 서문은 철학이라는 게 무언지 비장하게 알려준다. 그는 인문학을 인간의 무늬라며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면 그 범위가 너무 넓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인문학을 언어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는 언어에 대한 탐구, 필롤로기아(philologia)로 규정하며, 수단으로서 인문학을 언급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부지런히 언어를 학습해야 한다.

현재 국내의 철학계는 ‘인문 병신체’로 불릴 만큼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의 연속이고 서로 모르다보니 비평 담론이 부족하다. 과학은 실증적인 검증과 비판을 그 자체로 속성으로 내포하고 있어 인문학에 비해 더 윤리적이다. 인문학은 사실에 대한 해석을 주고받기 때문에 은폐가 쉽다고 김재인 교수는 비판했다. 김재인 교수는 “전문가가 먼저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생각이 먼저 있다”면서 “철학책만 읽은 위대한 철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생각의 싸움』을 통해 두 언어의 기원을 알게 됐다. 하나는 ‘스쿨(school)’이다. 학교라는 게 스콜라철학과 연관이 있었다. ‘스콜라’는 여유라는 라틴어 ‘스콜레(schole)’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여유 있는 중세 수도사들의 학문 활동을 스콜라철학이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들의 학교는 과연 여유가 있는 것일까. 다른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eidos)’다. 모두 보다는 뜻의 희랍어 동사 ‘이데인(idein)’의 수동과거분사다. 즉, 둘 다 ‘본 것’이라는 뜻으로 관찰이 매우 중요했다는 걸 알려준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여유와 관찰은 그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과학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교수신문> 학술 객원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학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과학과 기술, 철학, 문화 등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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