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미디어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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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디어학’이란 무엇인가
  • 김지훈 중앙대·영화미디어학
  • 승인 2020.01.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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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훈의 '영화미디어학의 스크린'_ 연재를 시작하며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무엇을 첫 소재로 삼을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출발점이자 귀결이 된 한 사건은 서구 영화연구를 제도적, 학문적으로 정립하는데 지대하게 기여한 1세대 영화학자인 토마스 엘새서(Thomas Elsaesser)의 사망 소식(작년 12월 4일)이었다(나는 『씨네21』에 그를 추모하는 부고 기사를 썼다). 이는 내가 언젠가부터 스스로 실천해 왔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학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마련했다. 그 성찰의 결과 나는 이 연재의 시작을 그 학제에 대한 단상으로 풀어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학제는 ‘영화미디어학(cinema and media studies)’이다. 이 이름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국내 연구자 집단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존하는 한국연구재단의 학문분류체계에도 ‘영화미디어학’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질문은 단순하다. 왜 ‘영화학’이 아니라 ‘영화미디어학’인가? 이 질문은 사실 한 편의 논문은 물론 한 권의 책으로도 손쉽게 답할 수 없다(그리고 이 답은 나로서는 평생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제를 구성하는 대상과 그 대상을 탐구하기 위한 질문 및 개념의 역사와 현재를 조금이나마 개괄한다면, ‘영화미디어학’이라는 학제에 대한 간략한 포트폴리오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영화학의 선구자, 토마스 엘세서(1943~2019)
▲ 영화학의 선구자, 토마스 엘세서(1943~2019)

먼저 영화학이라는 학제의 역사와 위상 변화를 언급해야 한다. 영화가 무엇이고, 영화가 어떻게 다른 예술과 관계하면서도 구별되는가, 영화를 예술이게끔 하는 특정한 요소가 무엇인가, 영화가 관객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은 영화학이 대학의 학제로서 정립되기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감독(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장 엡슈테인)과 영화평론가(벨라 발라즈, 앙드레 바쟁), 심리학자(휴고 문스터베르크), 저널리스트(제임스 에이지), 문화비평가(발터 벤야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예술사학자(루돌프 아른하임, 어빈 파노프스키), 철학자(모리스 메를로-퐁티, 스탠리 카벨) 등이 제기한 이 질문은 2차 대전부터 대학 교육의 영역으로 이행되었고, 1970년대에 이르러 유럽과 북미 학계에서 영화학으로서의 독자적인 학제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학제로서의 영화학은 기호학, 정신분석학, 문화연구,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대륙철학과 교섭하고 이들의 개념과 방법론을 전용하고 변형함으로써 이론의 계열을 파생시켜 나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론들의 정립과 이들 간의 상호 논쟁 과정에서도 영화학이라는 학제를 뒷받침하는 연구의 대상, 즉 영화라는 미적 대상과 이를 구성하는 매체의 정의에 대한 보편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는 영화의 역사적 특수성에 근거한다. 19세기 말에 탄생한 이래로 지금까지 영화는 그것이 예술인가 산업인가라는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그 논쟁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또한 영화는 문학, 회화, 음악과 같은 여타 예술처럼 장르는 물론 학제마저도 뒷받침하는 상대적으로 자명한 미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 영화가 이 모든 기존 예술의 어떤 특성을 포용하고 결합한 혼종적인 매체이자 ‘제7의 예술’로 탄생하고 발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혼종성의 기저에는 영화가 프레임이 규정하는 공간적 예술인 동시에 시간-기반 예술(영화는 상영 시간 동안 경험되고 그 시간은 물리적 지속을 넘어선 기억과 사건의 시간으로 확장된다)이라는, 물질적인(필름 영화는 셀룰로이드라는 물질적 지지체를 갖는다) 동시에 비물질적(그 물질적 지지체에 포함된 이미지는 영사를 통해서만 가시화되고 영사가 끝나면 스크린 위에서 사라진다)이라는 역설이 깔려 있다. 이 모든 이유로 영화학자 D. N. 로도윅은 “영화학은 자신의 대상을 탐색하는 분야로서 진화해 왔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학제를 지탱하는 대상의 존재론적 불안정성은 영화학이 자리한 학과의 차원에도 반영되었다. 북미 대학에서 영화학은 독립적인 영화학과는 물론 영문학과 비교문학, 지역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등에 정착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영화학은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연구의 주요 영역이었고 달리 말하면 인문학의 사생아(bastard child)였다.
 
대상의 존재론적 불확정성과 매체의 혼종성에도 불구하고 영화학은 영화가 역사적으로 펼쳐 온 장르적, 양식적, 국가적 다양체를 포용하는 표준적 영화의 이념을 정립하고 그 이념을 설명하는 개념들을 고안했다. 카메라가 대면하여 셀룰로이드에 기록한 현실, 그 현실에 한계를 지정하는 동시에 비가시적인 바깥을 가리키는 프레임으로 구획된 공간, 그 공간을 지속하는 시간의 체험으로 변환하는 운동의 거대한 환영, 그 환영을 발생시키는 영사(projection)라는 기계적 조작, 영사를 기계적 조작을 넘어 어둠 속에서의 집단적인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영화관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건축술. 이와 같은 표준적 영화의 이념에 중대하게 도전해 온 요인은 전자 및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이었다. 전통적인 영화의 물질성을 구성했던 셀룰로이드와 기계적 영사기는 디지털 파일과 영사 시스템의 보편화로 이제 쇠퇴한 기술적 지지체가 되었다. 영화의 미적 대상을 열거할 때 가장 먼저 제시되었던 필름(film)으로서의 영화는 VHS와 DVD를 넘어 디지털 비디오와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스트리밍 플랫폼 등 다양한 포맷과 기법을 포괄하는 무빙 이미지(moving image)라는 범주로 흡수되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영화적’이라 불릴 만한 무빙 이미지의 생태계는 영화관을 넘어 유튜브에, 갤러리의 미디어 설치 작품에, 대형 빌딩의 전광판까지도 포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름에서 무빙 이미지로의 이행은 미적 대상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필름과 연동되었던 영화관의 스크린, 그 영화관이 구성하는 관객의 이념 또한 동요되었다. 미디어 융합(media convergence)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오해되는 디지털화의 결과는 스크린과 관객의 다양한 분화(divergence)다. 오늘날 영화는 다양한 관람 환경과 장치에서 가변적인 크기로 구현되는 스크린들로 분산되고, VR 영화의 사례에서 보듯 스크린의 구획을 넘어서기도 한다. 스크린의 다변화는 인구학적인 관객의 다변화를 넘어선 관람성(spectatorship)의 다변화를 낳았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동영상을 관람하는 관객의 성향은 전통적인 영화관이 구성하는 관람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2000년대 이후 영화학에서 영화미디어학으로의 이행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 이행은 전통적인 영화학이 대상으로 규정하고 설명하고자 했던 무빙 이미지, 스크린, 관객이 종적으로 진화해 온 표준적인 영화의 한계를 넘어서 횡적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1959년 창립한 미국영화학회(Society for Cinema Studies)는 2002년 영화미디어학회(Society for Cinema and Media Studies)로 이름을 바꾸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임무를 정립한다. “우리는 영화, 텔레비전 및 기타 관련된 미디어의 지구적, 국가적, 지역적 순환을 비판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촉진한다. 우리 학회의 학자들은 이 모든 미디어를 역사적, 이론적, 문화적, 산업적, 예술적, 심리적 맥락을 포함한 다양한 맥락에 놓는다.” 그 이후 이 학회는 극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이라는 표준적 영화의 상이한 제작 양식에서 파생된 미적 대상 이외에도 비디오게임, 미디어 설치작품, 데이터 시각화,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미디어 대상과 무빙 이미지, 스크린과 플랫폼을 포괄하면서 포스트휴먼, 인류세, 환경주의, 신유물론 등과 같은 인문학의 가장 최근 조류까지도 포용하는 다양한 연구자들의 학문적 공동체를 조성해 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미디어’는 기존의 영화학에 종언을 고하거나 표준적 영화를 불순하게 만드는 타자가 아니다. 이때의 미디어는 영화학이 표준적 영화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기원으로부터 대면해 온 미적 대상과 매체의 역동적인 불안정성과 비순수성, 가변성을 인식하게 하고, 이를 통해 영화의 역사와 현재를 지속적으로 재창안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내포된 외연’이다. 만약 영화가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말대로 “여전히 발견되어야 할 대상”이라면, 영화미디어학의 과제는 표준적인 영화의 상태는 물론 그 바깥의 환경과 장치에서, 혹은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화적인 것의 위상과 가치 변화를 추적하는 것, 그 과정에서 표준적인 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미적 대상과 경험, 세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칼럼은 이와 같은 과제에 부합하는 예술적 실천과 문화적 현상을 다룰 것이다. 

 
김지훈 중앙대·영화미디어학

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연구 부교수. 저서로 『Between Film, Video, and the Digital: Hybrid Moving Images in the Post-media Age』(Bloomsbury, 2018/2016), 번역서로 『북해에서의 항해』(2017),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2005)가 있고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 개정판(2018) 감수와 해제를 맡았다. 실험영화 및 비디오, 갤러리 영상 설치 작품, 디지털 영화 및 예술, 현대 영화이론 및 미디어연구 등에 대한 논문들을 <Cinema Journal>, <Journal of Film and Video>, <Screen>, <Camera Obscura> 등 다수의 국내 및 해외 저널에 발표했다. 현재 두 권의 저작 『Documentary's Expanded Fields: New Media, New Platforms, and the Documentary』와 『Post-verite Turns: Korean Documentary in the 21st Century』를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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