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설득시키는 방법 - 뮤지컬 〈붉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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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설득시키는 방법 - 뮤지컬 〈붉은 정원〉
  •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공연예술스쿨/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1.02.21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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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아직 제한적이지만 재개되기 시작한 대학로에서 뮤지컬 <붉은 정원>이 눈에 띈다. 대학로를 달구고 있는 또 하나의 흥행작이다. <붉은 정원>은 CJ문화재단의 2017스테이지업 창작 뮤지컬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에 선정된 후 같은 해 11월 리딩 공연을 완료하고 6개월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2018년 초연되었다.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번 시즌 공연은 3년 만에 돌아온 재연(제작 벨라뮤즈, 2월 5일~3월 28일)으로 등장인물 빅토르, 지나, 이반 역에 각각 정상윤, 박은석, 김순택(이상 빅토르), 이정화, 최미소, 전해주(이상 지나), 조현우, 곽다인, 정지우(이상 이반)가 캐스팅되어 현재 프리뷰를 마치고 공연의 밀도를 높여가고 있다. 

뮤지컬 <붉은 정원>은 러시아의 문호 이반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소설인 첫사랑(1860)을 각색한 작품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첫사랑은 ‘조금의 윤색도 가하지 않은’ 투르게네프의 실제 이야기를 재료로 하여 아들, 지나이다, 아버지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룬다. 작가 정은비는 이에 착안하여 16살의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21살의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아버지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각각 18살의 이반 투르게네프, 23살의 지나, 그리고 빅토르 투르게네프로 바꿔 원작자의 흔적을 뮤지컬에 새겨 놓았다. 그리고 오로지 이들 세 명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과감하게 삭제하여 삼각관계 자체를 극의 핵심 사건으로 초점화했다. 심지어 주요 갈등 상황을 만드는 빅토르의 아내 엘레나(소설 속 이름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조차 극 중에 존재는 하되 줄곧 커튼 속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인물로 그려 빅토르를 억압하는 상징적인 조건으로 추상화시켰다.

원작은 아들 블라디미르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첫사랑의 추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아들 외에 다른 인물은 섬세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뮤지컬은 따라서 지나와 아버지를 구체적인 인물로 입체화해야 하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문제도 적정선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붉은 정원>은,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과 관계성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묘사하여 이 난제를 해결한다. 아버지 빅토르 인물형의 변화가 가장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빅토르는 원작에서 아내와 10살 차이가 나는 연하남으로서 차갑고 냉정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지나이다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를 채찍으로 때리기까지 하는 의외성도 갖고 있다. 그는 직업도, 집안도, 실제 성격도 모호한 채로 아버지에게 압도당하는 아들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만 묘사되기 때문에 이들의 연애는 미스터리로 가득 찬 ‘어른의 연애’로 대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뮤지컬은, 빅토르와 지나의 연애에 설득력이라는 방점을 무수히 찍는다. 가령, 빅토르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며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엘레나와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한 인물로 변해 있다. 그리고 지나는 빅토르의 소설을 읽고 그를 이미 흠모하고 있었다는 전사를 갖고 있으며, 원작과 동일하게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머니로부터 정략결혼에 대한 강요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처지다. 이러한 접점 안에서 두 사람의 연애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들은 비슷한 문학적 감수성을 갖고 소설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자유’를 갈망한다. 따라서 이들의 사랑은 파괴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안타까운 모양새를 취한다. 게다가 빅토르는 지나를 향한 이반의 순수한 마음을 자신이 파괴했다는 죄책감마저 갖고 있어 결국 지나를 포기한다. 자신의 아이 엠 송(I am song) ‘오래된 시계’의 상황 안에서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는 빅토르의 모습은, 넘버 안에서 반복되는 시계추 소리만큼 안타깝게 묘사된다. 시계추 소리를 은유하는 현악기의 피치카토 주법은 빅토르의 억압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다.  

이반은 그 사이에서 아이같이 이용당한다. 지나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하고 지나가 슬프면 자신은 더 슬픈, 강력한 첫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로 묘사된다. 뮤지컬은 전체 길이를 반으로 잘라 전반부는 이반과 지나와의 관계를, 후반부는 빅토르와 지나와의 관계를 이반이 몰랐던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들의 삼각관계를 플롯의 힘으로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반과 지나의 서사는 정교하게 배치된 후반부 서사에 의해 이면이 보강되며 진실을 드러내고, 후반부의 넘버는 전반부의 넘버를 동일한 서사 맥락 속에서 리프라이즈함으로써 서사의 결여 부분을 채워 넣는다. 따라서 공연은 후반부에 강력한 반전을 준비하며 이를 드러내는데, 이반은 그 ‘진실’에 직면하며 드디어 삶의 주도권을 획득한다. 빅토르와 지나의 밀회 장면을 목격한 이반이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절규하다가 난간에서 떨어진 후 불구가 되었지만, 지나를 향한 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붉은 장미로 장식된 지나의 잃어버렸던 정원을 선물하는 것이다. 공연은 바로 이 장면에서 <붉은 정원>의 테마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담아낸다. 붉은 장미의 정원은 이반에게는 지나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지만, 지나에게는 이와 더불어 빅토르의 자취를 연상시키는 것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정원은 지나와 빅토르 사이에 은밀한 사랑의 언어로 교환되었던 빅토르의 신작 ‘아도니스의 정원’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지만 그 자리에 정원을 만들어 연인을 영원히 기억한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붉은 정원은 세 사람에게 모두 강렬한 사랑의 추억을 상징하는 기호가 된다. 공연은, 정원의 문이 열리고 온통 붉은 장미로 장식된 정원이 객석에 열리게 될 때를 섬세하게 기다려왔던 것이다. 

뮤지컬 <붉은 정원>은 윤리적으로 불륜의 프레임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인물들의 자유와 사랑, 열정과 순수의 상태를 설득력 있게 묘사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감정에 세련되게 집중하는 작품이다. 작품을 세련되게 만드는 것은 상당 부분 김드리 작곡가의 음악의 힘에서 비롯된다. 클래식에 기반을 둔 유려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사의 국면을 따고 들어가는 섬세한 화성은 인물들의 정서와 감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번 시즌 가장 인기 있는 조합인 박은석, 이정화, 정지우 배우의 합은 객석을 숨죽이게 만든다. 특히 박은석 배우의 차분하고 섹시한 빅토르는 압권이며, 신예 정지우 배우는 어리숙하면서도 강단 있는 이반을 성실하게 그려냈다. 다만, 지나 역을 맡은 이정화 배우의 전반부 목소리 톤과 연기가 다소 하이톤으로 과장되어 있는 점은 아쉽다. <붉은 정원>이 붉은 정원으로 초대된 관객들의 정서를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작품으로 잘 살아남기를 기원해본다.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공연예술스쿨/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로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 창작뮤지컬에서 재현된 서울의 양상”, “여성국극의 혼종적 특징에 대한 연구”, “한국적인 것’의 구상과 재현의 방식”, “번역된 문화와 한국적 디코딩”, “‘근대적 지식인 되기’를 향한 욕망의 서사”, 『제국의 수도, 모더니티를 만나다』(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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