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문명 중심의 역사관에서 배제된 ‘미지의 땅’…테라 인코그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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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문명 중심의 역사관에서 배제된 ‘미지의 땅’…테라 인코그니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2.1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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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 인코그니타: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 강인욱 지음 | 창비 | 380쪽

‘세계 4대문명’이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 모두 역사 과목을 배울 때 당연시하며 암기해왔던 이 표현이 실은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각을 담고 있다면? 강대국의 시각에서 서술되어온 고대사에서 배제된 기억을 복원하고 균형 잡힌 역사적 안목을 제안하는 고고학자 강인욱의 책이다.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는 ‘미지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이민족과 괴물이 사는 이질적인 곳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돼 왔다.

저자는 문명과 야만, 중심과 변방, 자아와 타자라는 이분법과 편견을 극복하고 다차원적이며 다자적인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최신 고고학 자료를 활용해 고대사의 쟁점들을 살펴본다. 인류 역사의 99.7%는 기록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거나 문자 기록문화가 없던 지역의 역사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선 고고학 자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쉽게 야만으로 치부돼온 이 99.7%의 역사들이 실은 지금까지 인류를 만들어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미개인이나 야만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관이지만 단순히 무지한 옛사람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대탐험의 시대에 서구인들은 각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현지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며 놀림감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20세기 초반 유럽에는 각지의 사람들을 모아서 살게 한 ‘인간 동물원’(Human Zoo)이 있었다. 

흉노의 영향을 받은 흑해 연안의 금관. 호흘라치 고분 출토. 강인욱 제공

고대는 흔히 야만으로 치부되곤 한다. 또한 변경 지역일수록 이런 이미지가 더욱 강화된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를 보는 관점은 실제로 19세기 제국주의 고고학이 제시한 ‘4대문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최신 고고학 자료들은 이들 4대문명만이 고대의 중심지였거나 특별한 ‘문명’이었다는 편견을 반박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흉노는 고대사의 주역이었으나 오늘날 과소평가된 대표적 사례다. 아메리카 곳곳에 고도의 문명을 꽃피운 원주민들은 서구인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하면서 몰락했지만 곳곳에 거대한 고분과 도시 등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문명’은 유럽 등 소수 지역에만 존재했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백인 연구자들은 오늘날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남긴 유적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을 꺼린다. 유라시아 전역에서 각 문명의 교류를 실현하고 황금색 문화를 꽃피웠지만 중국을 괴롭혔던 오랑캐 이민족 정도로 동아시아에서 인식되는 흉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주변 지역에 대한 무지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수도 위주, 국경 위주의 좁은 역사만 공부해온 한국에도 ‘테라 인코그니타’가 많다. ‘삼국시대’는 가야의 역사를 빼놓은 말이고, 강원도, 경상북도 북부 등 오늘날 인구가 적은 지역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무시된다. 북한 지역의 역사는 더욱더 미지의 영역이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고려의 수도인 개경만 간신히 기억할 뿐, 그밖의 지역은 알려진 것도 적고, 관심도 많지 않다. 함경도는 조선 개국의 요람이며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과 접경한 유라시아적인 의의가 있는 지역임에도 지금껏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거란, 여진 등 오랜 시간 우리와 교류해온 것이 분명한 이웃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선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왼쪽부터 타완촌 출토 청동기 거푸집의 얼굴, 마오얼산 출토 부여의 금동제 얼굴, 둥퇀산 출토 부여의 금동제 얼굴. 모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고 상투를 틀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저자는 이러한 무지와 편견을 깨기 위해선 유라시아의 시야에서 교류의 역사를 증명하는 기존의 고고학 자료들을 재해석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여러 지역과 민족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동북공정 등을 통해 변경지역의 역사를 전유하고 자기 역사의 무게를 강화하려는 중국의 역사관이나, 스스로를 추켜세우기 위해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본의 역사관을 답습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고고학자는 인류가 막연하게 상상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비밀을 실제 발굴을 통해 찾아내기도 하고 오해를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이 책에는 이런 점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겨울왕국, 아틀란티스, 사제 요한의 왕국 등 신비로운 상상의 나라나 문명이 있다는 전설이 고고학 유물을 만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로 변모한다. 식인풍습이나 신석기시대 전염병 극복 이야기처럼 오늘날의 눈으로 보기에도 흥미진진한 주제도 있다.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황금 유물을 두고 벌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 가망이 없어 보였던 마야 문자를 집념으로 해독해낸 유리 크노로조프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유라시아 고고학 전문가인 저자의 지식이 빛난다.

한편 고고학이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문화재를 강탈하면서 발달한 근대의 학문임을 실감하게 하는 사례도 많다. 서구의 박물관에 넘치도록 진열되어 있는 약탈 문화재들은 제국주의 국가의 후계자들이 여전히 그것을 전리품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국주의 지배에서 탈피한 지역에서는 고고학이 신생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알리는 데 적극 활용되기도 한다. 네이멍구자치구의 훙산문화를 ‘중화문명’의 기원으로 소급하는 중국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영역에서 발견된 모든 유적들을 ‘중화’의 이름으로 빨아들이려는 움직임은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해가는 오늘날 더욱 문제시된다. 이 사례는 21세기에도 고대사와 고고학이 여전히 너무나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 역시 환기하는데, 아직 연구가 크게 진척되지 않은 미지의 역사일수록 정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고 선전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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