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ice’의 관점에서 본 대한제국의 사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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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ce’의 관점에서 본 대한제국의 사법개혁
  • 이승일 강릉원주대·사학
  • 승인 2021.02.1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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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근대 한국의 법, 재판 그리고 정의』 (이승일 지음, 경인문화사, 428쪽, 2021.01)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근대성’ ‘식민주의’ ‘민족주의’ 등의 이론 틀로 한국 근대사를 해석하였다. 19세기 민란이나 동학농민전쟁도 근대화를 목표로 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같은 이론 틀만으로는 조선왕조와 양반들의 통치에 대한 농민들의 변화된 의식을 읽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본서는 19세기 일반 농민들이 조선왕조와 양반들에게 느낀 감정의 본질은 ‘원통함’에 있고 각종 민란은 원통함을 직접 교정하려는 정치사회개혁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그 당시 사람들의 공정과 정의의 관념을 분석하고 있다.

민란과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농민들은 ‘사회적 재화’와 ‘공적 의무’를 배분하는 조선왕조의 원칙이 공정하지 않다고 호소하였다. 공정의 상징이어야 할 관리들은 조세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공정한 국역(國役) 배분의 원칙을 훼손하였고, 양반들은 마땅히 이행해야 할 공적 책무를 회피하였다. 조선에서 공직자들은 공정, 공평 등의 공직 윤리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존재였으나 19세기의 수령들은 공(公)의 윤리를 외면하고 재판권과 징세권을 활용해서 자신들의 부당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농민들이 조선왕조를 상대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선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들의 고통과 불만을 풀어주어야 할 국가의 사법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유생 이단석은 농민들의 폭력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민란의 원인을 수령의 수탈과 함께 억울함을 호소할 통로가 사라진 데서 찾았다. 농민들은 수령과 관찰사에게 수없이 원억함을 호소하였으나 국가 사법시스템 하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불공정하고 비인권적인 사법절차에 의해서 재산, 이익, 권리가 침해받는 것을 농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은 국가와 사회의 전 영역에서 구래의 정의의 룰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의의 룰을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사법 부문에서는 사법과 행정의 분리, 재판의 독립, 소송절차의 법제화, 민사와 형사의 분리, 인권의 보호, 재판 인력의 전문성 제고 등을 통해서 사법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보수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로 인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7년까지도 고종과 법부대신은 주요 재판소 판결에 일상적으로 개입하여 판결을 왜곡하였고 일선 재판기관에서 일어나는 반인권적 관행을 교정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갑오개혁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대한제국의 재판소에는 전통 형률과 유학 윤리에 더 익숙한 자들이 재판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굳이 신식 소송제도를 운용할 하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것은 대한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고종이 사법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재판소에서 근대 사법의 이념을 구현하는 여러 조치를 단행하는 순간, 사법 권력의 최종 배후자였던 고종과 그의 측근들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사법제도의 근대화는 법과 재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법의 지배가 실효적으로 관철되는 민주적 정치제도 하에서는 사법의 독립이 보장되지만, 전제정체를 채택하는 나라에서는 사법의 독립을 추진할 특별한 이유도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1899년 「대한국국제」는 황제 1인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행사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법부의 사법권 장악은 옹호하되 재판소의 독립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로써, 사법부는 권력을 견제하고 인민들의 정당한 권익을 보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권력과 유착하여 최고 권력자를 수호하는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국왕-형조-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의 사법체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였다. 「대한국국제」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였으나 국가기관의 공정성과 행정의 투명성은 더 나빠졌다. 

정부 주도의 사법개혁이 거꾸로 가는 것을 지켜보던 민간의 개혁가들은 더 공정하고 더 정의로운 정치사회를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당시 독립협회를 비롯한 개혁가들은 국가권력을 분할하고 분할된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1인 독재의 출현을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민주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법의 측면에서는 어떠한 권력자라도 재판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개혁가들이 인민의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의 실현, 폭력을 배제한 개혁, 형벌의 부과는 법률에 의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 모든 국민은 권력, 지위, 재산, 지식을 막론하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이유였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가들은 정의의 룰을 선한 지배자층이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그 룰을 인민들이 직접 만들어야 하며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진다는 주권자 의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더 나아가 대한제국 정부와 벌인 사법투쟁을 계기로, 법과 정의(Justice)가 사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국가를 개조하는 정치개혁 투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저자는 19세기를 ‘사회적 재화’와 ‘공적 의무’를 배분하는 조선왕조의 정의(Justice)의 원칙이 해체되고, 새로운 배분의 원칙은 아직 수립되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그 원칙의 수립을 둘러싸고 국가와 인민들 사이에 치열하게 벌인 정치투쟁의 시대로 규정한다. 500년간 유지되었던 조선왕조의 정의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민들에 의해서 거부되었으나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하였으며, 민간의 개혁가들이 인민들과 더불어 헌법의 제정, 국회의 설립, 삼권분립,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민국가의 수립을 요구하는 민주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본서는 이 관점에서 한국의 근대 사법개혁의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이승일 강릉원주대·사학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 한국의 재판과 법을 연구하고 있으며 근・현대 한국의 기록관리제도의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및 강릉원주대 일반대학원 기록관리협동과정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총독부 법제 정책』, 『기록의 역사: 한국의 국가기록관리와 아카이브즈』, 조선총독부 공문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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