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상징물 전패(殿牌) 훼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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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상징물 전패(殿牌) 훼손 사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2.1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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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⑮_ 임금의 상징물 전패 훼손 사건

고을 객사에 모셔진 임금 상징물, 전패(殿牌)

최근 태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왕실모독죄’로 처벌하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입헌군주제인 태국에서 왕실은 신성한 존재로 간주되는데, 태국 헌법에 국왕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모독할 수 없으며, 형법에서는 국왕 등 왕실을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는 3년에서 최고 15년까지의 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태국의 왕실모독죄는 다른 유럽 군주국에 비해 혹독할 뿐만 아니라 태국 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반대 세력 탄압에 악용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태국 정부가 작년 7월부터 이어져 온 반정부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시위 참여자들을 왕실모독죄로 기소, 처벌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 유엔(UN)의 진단이다.

왕실모독죄 규정이 워낙 포괄적이다 보니 태국에서는 국왕의 사진만 태워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셈인데,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가 보기엔 결코 동의하기 어려운 죄목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조선시대로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면 이런 왕실모독죄, 불경죄의 죄목으로 처벌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형법전의 역할을 한 대명률(大明律)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열 가지 중대 범죄를 십악(十惡)이라 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대불경(大不敬)’, 즉 국왕에게 크게 불경한 행위를 한 것이 포함된다. 예컨대 종묘 제사에 쓸 제수나 임금이 타는 가마를 훔치거나, 임금이 탈 배를 견고하게 만들지 못한 경우도 이 죄목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전패(殿牌). 제주도 정의현 객사에 있던 전패로 1847년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여기서 더 나아가 왕실의 존엄을 드러내는 상징물을 훼손하는 경우도 극형을 면치 못했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는 왕의 초상을 대신하는 전패(殿牌)가 있었다. 전패는 궁궐, 즉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가 새겨진 목패를 말하는데,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정월 초하루와 추석과 같은 명절, 왕의 생일 등 특별한 날에 지방관은 전패 앞에서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했다. 전패를 훼손하거나 모독하는 자는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음은 물론 가족들까지 연좌 처벌을 받았으며, 전패를 분실하거나 관리를 소홀히 한 수령 또한 엄한 처벌을 받았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의례용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발생하는 전패 훼손 사건

전패는 국왕 초상화 대용으로 쓰는 중요한 물건이었지만 뜻밖에도 조선후기 고을민이 전패를 훼손하거나 훔쳐가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당시 이를 ‘전패작변(殿牌作變)’이라고 하였는데, 고을의 전패를 누군가 건드리거나 훼손하는 사안을 국왕에 불경을 범한 매우 중대한 범죄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해당 사건이 발생한 경우 조정이 발칵 뒤집혀서 역모 사건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사건 관련자들을 한양의 의금부로 압송하여 추국(推鞫)을 거쳐 엄히 다스렸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전패작변이 일어났을까? 기록을 보면 흥미롭게도 국왕을 모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을 백성이나 관아 노비들이 모시는 수령을 쫓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패를 절도, 훼손하곤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법에 전패에 변고가 생긴 고을은 고을의 격을 강등시켰을 뿐만 아니라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수령을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당시 전패에 손을 댄 자들은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그들은 전패를 훼손함으로써 조정으로부터 고을 수령이 처벌받기를 기대하였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 객사. 사진 중간에 전패(殿牌)와 함께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1662년(현종 3) 충청도 온양군에서 사노(私奴) 생이(生伊)라는 자가 전패 훼손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당초 우마(牛馬)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온양군 옥에 갇혔다가 탈출하여 다른 고을로 도망간 인물이었는데, 흉년이 들어 다시 온양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수령이 그를 다시 옥에 가둘까 두려웠다. 그러던 중 아무도 몰래 전패를 훼손하면 온양 군수가 파직되어 교체될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결국 온양군 객사에 몰래 들어가 전패를 훔쳐내어 세 조각으로 깨뜨려 옥 주변 길가에 버렸다가 체포된 것이다.

9년 후인 1671년(현종 12) 경기도 연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연천현 관노(官奴)였다가 신역을 피해 도망쳤던 애립(愛立)이 다시 돌아가면 현감이 매질을 심하게 하여 맞아죽을까 두려워 한밤중에 연천현 객사에서 전패를 훔쳐내서 아궁이에 불태웠다가 적발된 것이다.

이처럼 수령이 파직되기를 노려 지방 고을에서 전패를 훼손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자 결국 국왕 현종은 수령을 더 이상 파직시키지 않고 변을 일으킨 당사자만 처형하도록 법을 바꿨다. 그것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실린 현종 12년의 수교인데, 앞으로는 전패작변이 일어날 경우 당사자만 처벌하고 해당 고을의 읍호를 강등시키거나 수령을 파직시키지 말라는 조치였다.

“사건이 일어난 해당 고을에서 공개 처형하라”

전패를 관리하는 관할 수령을 모함하고 쫒아내기 위한 구실로 전패작변이 계속 일어나자 국왕 현종이 수령을 불문에 부치기로 했음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그렇지만 법 개정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듯 이후에도 수령을 모함하고 쫓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전패를 훼손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예컨대 영조 때인 1736년(영조 12) 충청도 충원현에서 발생한 전패작변 사건도 모시는 수령을 몰아내기 위해 아전 최하징(崔夏徵)이란 인물이 벌인 행각이었다. 최하징은 의금부에 붙잡혀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전패를 훼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저는 충원현의 남창(南倉)을 맡은 아전이었습니다. 윗사람에게 보고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처리하여 곡식 1백 석 남짓 부족한 상황에서 관아에서 적발되어 틀림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전패를 훔쳐내는 변고를 저지르면 우리 고을 수령이 파면을 당하니, 저는 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을 창리(倉吏)인 최하징이 평소 자신이 관리하는 창고 곡식을 도둑질한 사실이 탄로 날까 두려워 수령을 내쫓아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노비 북동(北同)을 시켜 전패를 훔쳐 돼지우리에 버렸다가 적발된 사건이었다.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의 일부. 주요 국사범에 대한 심문기록을 담고 있으며, 조선후기 발생한 전패작변 사건도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
연좌안(連坐案). 연좌제로 처벌된 죄인과 그 가족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전패작변 죄인의 가족도 연좌 처벌 대상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그런데 1749년(영조 25)에 함경도 안변에서 부사에게 유감을 품은 신상인(申尙仁), 유찬적(劉贊迪)이 공모하여 안변부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패를 불태워버린 사건이 또 발생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법이 바뀌어 전패를 훼손해도 자신만 처형당할 뿐 수령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몰라서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하고, 두 범인을 한양의 군기시(軍器寺) 앞에서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함경도 안변에서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다. 안변 고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들을 처형함으로써 법에 무지한 사람들이 더 이상 전패작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벌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그럼 전패작변을 일으킨 범인에 대한 처벌 규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패 훼손은 대역죄에 준해서 다스렸다. 범인은 대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후 군기시 앞길이나 해당 고을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가족들도 연좌제로 인해 거의 멸문(滅門) 수준의 화를 면치 못했는데,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세 이하의 아들, 어머니와 처, 딸, 자매 등도 모두 노비로 전락하였고 재산은 몰수 처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역모를 꾸민 자들과 별반 다름없는 엄청나게 무거운 형벌인 셈이다.

다만 전패작변에 대한 처벌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완화된 것이 사실이다. 영조는 앞서 본 충청도 충원현에서 전패작변 사건이 발생하자 주범 최하징은 처형하고 최하징의 사주를 받은 노비 북동은 섬에 귀양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주범은 여전히 역적죄로 엄하게 다스리지만, 종범의 경우는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순조 때에는 역심(逆心)을 품고 전패를 훼손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의금부로 압송하지 않고 해당 고을에서 재판하여 처형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당사자 이외의 가족들을 함께 처벌하는 일도 금지시켰다. 전패를 훼손한 범인의 가족을 연좌제의 사슬에서 풀어준 것이다. 이는 『수교정례(受敎定例)』라는 법전에 실린 1822년(순조 22)에 내리진 수교이다.

1872년 거제도 지도 속의 관아 모습. 그림 중앙 위쪽에 동헌이 있고, 그 오른쪽에 객사가 그려져 있다. 동헌 왼쪽에는 향교가 있다. 당시 객사는 전패를 모신 곳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다.

처벌은 조금씩 완화되었지만, 조선왕조에서 전패를 절취 혹은 훼손하는 일은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패작변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전패작변을 감행한 이들은 과연 왕실 권위에 도전하려는 의도가 있었을까? 심문에 자백하면서 남긴 말 넘어 실제 백성들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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