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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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
  • 승인 2021.02.1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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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1)_ 노예 이야기 1: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
비잔틴 작가들은 “슬라브족을 노예로 만들 수는 없었다”라고 기술했다. 그들이 용맹한 전사였다는 의미다.  https://www.rbth.com/arts/history/2017/07/17/myths-of-russian-history-does-the-word-slavs-derive-from-the-word-slave_804967(자료 출처)

1841년 30세의 이탈리아 음악가 주세페 베르디가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Nabucco)>를 작곡했다. 그는 총 28편의 오페라를 지었다. 나부코는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 유수에 등장하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기원전 605~562년)의 이탈리아어 이름 나부코도노소르(Nabucodonosor)의 축약형이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느부갓네살로 되어 있다. 

이 오페라 3막에 나오는 비장한 음조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이 떠나온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부르는 절절한 아리아다. 원제는 “가라, 내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봐, 펜씨에로, 쑬랄리 도라테 Va, pensiero, sull'ali dorate)”다. 이 노래를 듣다가 또다시 드는 생각. 비탄에 잠긴 노예들의 합창이 그들의 그리움을 해결해 줄 것인가, 억압된 노예의 온갖 상념은 날개를 타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 그들에게 노래 부를 자유는 있다. 자유인인 나는 자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이나 자유롭게 한다. 비자유인인 노예는 행동의 자유는 물론, 사고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톨릭 수도승은 말한다. 그는 스스로 예속된 자다. “나는 보잘것없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스스로 종임을 자처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종인 그에게 레이맨(layman) 즉 평신도의 우러름이 주어진다. 종이되 종이 아닌 자, 신과 인간의 매개자가 성직자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교황은 다리(bridge)라는 뜻의 pontem이라 부른다. 그리고 최상의 위엄(dignity)을 지닌 존재로 숭배받는다. 험한 세상 사람들이 오가는 다리가 되어야 하기에. 

(왼쪽)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올리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고 있다.  (오른쪽) 신바빌로니아 왕 나부코(Nabucco)

라틴어 폰템(pontem)이 프랑스어에 유입되어 퐁(pont)이 되었다. 프랑스 영화 <퐁 녜프의 연인들>에서의 ‘퐁’은 우리말 ‘다리’라는 뜻의 말이다. 프랑스어 외에도 카탈로니아어 pont, 이탈리아어 ponte, 옥시탄어 pònt, 포르투갈어 ponte, 루마니아어 punte, 로만시 punt, 스페인어 puente, 웨일즈어 pont 등 유럽어 상당수가 라틴어에서 파생된 동계어다. 참고로 옥시탄어는 남프랑스, 모나코, 이탈리아 옥시탄 계곡, 스페인 봘다란 등의 지역에서 쓰이는 일종의 로맨스 언어다. 그리고 로만시는 스위스 동부에서 쓰는 언어다.

(왼쪽) Pont Neuf  (오른쪽) Pont Saint-Bénézet 혹은 Pont d’Avignon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의 공식 호칭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 로마의 주교(Episcopus Romanus),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Princeps sui iuris civitatis Vaticanae)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호칭이 극히 인상적이다. 최고 성직자는 이래야 한다. 종들에게 섬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교황을 일러 라틴어로 최고 사제장이라는 뜻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고도 하는데, Pontifex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는 뜻의 파키오(facio)의 합성어이고, 막시무스(Maximus)는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의 말이다. 그러므로 교황은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최고의 연결자 또는 대리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또한 pontifex maximus로 불리었다. ‘지고의 교황(Supreme pontiff)’이라는 의미의 ‘숨무수 폰티펙스(summus pontifex)도 애용되었고, 그라티언 황제의 나이 어린 공동 황제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폰티펙스 인클리투스(pontifex inclytus)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노예 출신의 로마 황제도 있었다.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오현제 시대의 종식을 고한 황제가 콤모두스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아버지와 공동 황제였다가 부친이 죽자 단독 황제가 되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포학제라고 불릴 만큼 로마제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다. 

(왼쪽) 카피톨리니 미술관의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석상 (오른쪽)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 국립 박물관의 페르티낙스 추정 석상<br>
(왼쪽) 카피톨리니 미술관의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석상 (오른쪽)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 국립 박물관의 페르티낙스 추정 석상

17대 황제 콤모두스 뒤를 이은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황제가 바로 노예출신이다. 황제가 되기 전 그는 이탈리아의 알바 폼페이아에서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 들어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정치, 군사적 거물로 부상했다. 이 공로로 다키아 속주의 총독, 원로원 의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비록 제위 3개월 만에 자신의 근위대장에 의해 암살당했으나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명령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노예 또는 종을 가리키는 영어 어휘는 slave다. 이 말이 슬라브족(the Slavs)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역으로 슬라브족이라는 종족 명칭이 되레 slave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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