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혁신의 세계에 가닿은 동아시아 문인·화가·명필들의 인문적 광기(狂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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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혁신의 세계에 가닿은 동아시아 문인·화가·명필들의 인문적 광기(狂氣)
  • 조민환 성균관대·동양철학
  • 승인 2021.02.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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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동양의 광기와 예술: 동아시아 문인들의 자유와 창조의 미학』 (조민환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712쪽, 2020.12)

인류의 역사에서 철학과 예술에서 창의성을 보인 인물들은 스티브 잡스가 말한 바와 같이 때론 사회의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 우리 사회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 정해진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인물들의 총체적 성향을 동양문화권에서 적용하면 바로 광자(狂者)다. 적극적이면서 진취적이지만 때론 광기어린 삶과 사유를 가진 ‘광자’, 고집스럽지만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견자(狷者).’ 동양문화권에서 이들은 단순히 미치거나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다.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처럼 언뜻 사회가 제시하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로 보이지만, 이들은 정작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알고, 관성적 규칙 너머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혁신가였다. 이들에 의해 동양의 철학과 예술은 살아 숨 쉬고 생기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광(狂)’자와 ‘견(狷)’자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중국철학과 중국예술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유와 정신이 동아시아 시(詩)ㆍ서(書)ㆍ화(畵)의 예술에 스며든 자취를 흥미롭게 서사화한 연구서다. 중국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통상적 키워드로서 ‘경(敬)’자의 의미 맥락과 연결되는 유가의 ‘중화미학(中華美學)’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광견미학(狂狷美學)’이란 또 하나의 키워드가 존재한다. 이 책은 바로 이 광견미학을 중심으로, 동양의 철학사ㆍ문예사ㆍ미학사의 영역에서 광자와 견자가 지향해나간 미적 인식과 예술창작 경향에 초점을 두고 전개된다. 

제1부에서 저자는 유가ㆍ도가ㆍ양명학의 주요 광견관과 송대 이학자ㆍ조선조 유학자들의 광견에 대한 입장 분석을 통해 입체적인 광견철학의 입론을 시도한다. 먼저 주희는 광견을 부정적으로 보고 때론 이단시하지만, 이 책에서는 공자를 광견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한 인물로 규정하는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중국철학사를 통관할 때 유가와 중화중심주의의 영향력이 뒤덮어버릴 수 없는, 이 파격의 광견정신을 입안한 대표적 인물은 알다시피 노자와 장자이거니와, 기실 공자도 이 반경 안에 소환될 수 있다. 왕수인(王守仁)과 이지(李贄)와 원굉도(袁宏道) 등은 여기에 새로운 맥락을 더해 광견의 지형을 넓힌 철학자들이다. 동양의 철학ㆍ미학ㆍ예술이 품은 광기와 광자정신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들이 부조리와 교조주의가 판치는 사회에 저항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원동력이었다. 이 책의 제2부에선 그렇게 자신의 광기를 거침없이 표출한 문인, 화가, 서예가들의 다양한 예술창작 행위의 전모가 흥미진진하게 분석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서화도통론과 광견에서 중행으로, 광견미학의 문예적 적용, 중국회화에 나타난 광견미학, 중국서예에 나타난 광견미학, 조선조회화에 나타난 광견미학, 조선조 서예에 나타난 광견미학 등을 다룬다. 이에 도연명ㆍ굴원ㆍ이백ㆍ두보ㆍ백거이ㆍ김시습ㆍ허균ㆍ곽재우ㆍ윤기 등의 문인과 양해ㆍ서위ㆍ예찬ㆍ팔대산인ㆍ김명국ㆍ최북ㆍ장승업ㆍ임희지ㆍ조희룡ㆍ이인상ㆍ전기 등의 화가, 그리고 왕헌지ㆍ동기창ㆍ회소ㆍ혜강ㆍ장욱ㆍ정섭ㆍ양사언ㆍ유몽인ㆍ이광사ㆍ이삼만ㆍ성수침ㆍ황기로 등 명필의 생애와 작품들이 광견미학의 세계에서 재조명된다.

이삼만, <산광수색山光水色>(산은 빛나며 물은 아름답다), 종이에 먹, 57.5×87.8cm, 개인 소장.

이 책의 화두인 동양의 ‘광기(狂氣)’ 그리고 광견의 철학과 예술은, 유가의 중용(中庸)ㆍ중정(中正)ㆍ중행(中行)의 철학을 근간으로 중국사상사의 본류를 구성하는 중화중심주의와 평행선을 달려왔다. 광자정신은 윤리ㆍ철학ㆍ예술적 측면에서 유가의 예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자유분방한 행동과 무한한 정신적 역량을 마음껏 펼지는 것, 지향하는 뜻은 높지만 실천성 측면에서 미진한 것, 기존하는 진리라 여겨온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펼치는 것, 그러다 보니 인간 현실과는 때론 일정한 거리가 있는, 지향하는 정신이 매우 높은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광자의 정신사는 유가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받아온 노장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접속된다. 그리고 그 핵심에 노장의 엣센스가 자리 잡는다. 노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도(道)’의 경지를 통해 황홀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정신 영역을 개척하고, 아울러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세계관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광자들이 지향하는 사유의 근간이 되었다. 유가 성인들이 말하는 상대적 분별지인 ‘소지(小知)’ 너머 ‘대지(大知)’를 추구하고, 그로써 체득되는 ‘지언(至言, 지극한 경지의 말)’을 제시한 노장의 정신은 곧 광자의 정신이었다. ‘정언약반(正言若反)’ 식의 역설과 ‘소요물화(逍遙物化)’하는 변신과 경계 허물기는 노장의 광자정신과 진정성이 구체화되는 생동의 방식이었다.

팔대산인[八大山人=朱耷], <고매도古梅圖>, 紙本水墨, 96x55cm,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광견역사에서 이 책은 양명학의 광견적 문제의식에 특히 주목한다. 주희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광은 명대 왕수인의 ‘광자흉차(狂者胸次)’를 통해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왕수인의 광자관은 ‘동심설(童心說)’을 주장한 이지에 와서 또 다른 꽃을 피운다. 이지는 광의 정신적 역량인 진취성, 대담성, 개방성, 비판정신, 비타협성을 발휘함으로써 기존 유가 사유의 틀 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자연본성을 회복시키려 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창신적(創新的) 사유를 취득하는 경지와 연계하여 이해한 광기는 이제 중국예술사에 창신성과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는 핵심 사유로 작동한다. 이밖에 이지는 음양론에 입각해 과거 중국의 수많은 위인들을 광견으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애광(愛狂)’을 강조하고, 원굉도는 광자와 견자의 진정한 쓰임새, 즉 ‘대용(大用)’의 차원과 용(用)의 덕을 통한 광자관을 전개하여 광자가 갖는 효용성을 극대화시킨다.

알다시피 유가의 중화미학은 기본적으로 항상 타자를 의식하지만, 반면 광견미학을 지향하는 이들은 가능하면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다시 말해, 전자가 집단 속 개인을 강조하는 쪽이라면, 후자는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주체적 개인을 정립하려는 의도를 품는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명멸했던 광인과 견자가 자신만의 주체성을 견지하는 미학을 수행할 수 있었던 근본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요컨대 이들은 지난날의 인습과 흔적을 일절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진정성을 대담하게 발산했다. 저자는 각자의 ‘진아(眞我)’가 내장되어 있는 이들의 천재적 광기야말로 동양의 예술을 보다 다채롭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적는다. 

이러한 동양의 광기는 정주이학자들이 사회ㆍ정치적 안정을 위해 윤리 차원에서 부정적으로 이해한 것을 제외하면, 철학ㆍ문화ㆍ예술 등 자유와 창조의 세계에 가닿는 ‘인문광기’의 차원으로 주목받아왔다고 결론 내린다. 중국역사를 보면 겉으로는 유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마음속으로는 도가를 꿈꾼 유학자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초나라 광인 접여가 은거를 촉구하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여전히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고서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했던 이상주의자 공자야말로 또 다른 차원의 광인, 즉 중행의 광인이었다. 저자는 광자정신의 이러한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그 맥락이 입체적으로 밝혀질 때 비로소 광자정신의 실질이 제대로 입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가 입장에서도 광자를 무조건 비판하고 배척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이 주로 중국에서 진행되어온 기존의 광견 연구와 차별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본격적으로 한국서화가들의 광견정신을 논한다는 것. 한국철학사와 서화사에도 광견 성향을 보인 사상가와 서화가들이 엄존했음에도, 현재까지 연구는 충분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책은 그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조민환 성균관대·동양철학

성균관대 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교에서 석사·박사를 했다. 춘천교대 교수, 산동사범대 외국인 교수, 도가·도교학회 회장, 서예학회 회장, 동양예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및 유학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동양예술미학산책』, 『중국철학과 예술정신』, 『유학자들이 보는 노장철학』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공저와 역서 포함 다수의 저서가 있다. 동양의 그림과 글씨 및 유물·유적에는 유가철학과 도가철학이 담겨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양철학과 동양예술의 경계 허물기에 주력하여 예술작품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눈을 제시하고 있다. 철학연구회 논문상, 원곡 서예학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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