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유교 어머니 - 정치사상 학회 세미나 참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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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유교 어머니 - 정치사상 학회 세미나 참가 후기
  • 고성빈 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1.02.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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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동아시아는 유교 보편의 세계라는 썰을 풀고 돌아서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에게 유교라는 존재의 의미에 관해서이다.

유교는 동아시아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생명을 낳아준 가장 존귀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비천한 존재다. 어릴 때, 맛있는 것은 아버지와 자식들에 주고 볼품없이 남은 것은 어머니가 드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는 집안에서 천한 일을 도맡아 하는 해결사로 여겨 오지 않았나 싶다. 

박완서 선생의 산문에서이다. 아기가 즐겁게 웃을 때는 아빠가 안고 있고, 똥을 싸거나 보챌 때는 항상 엄마에게 넘겨진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인 요즘도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이건 어떤가. 21세기 어느 벌건 대낮 여의도에 가보자. 어느 강남 좌우 비빔밥 신사 왈, “돈 문제는 아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서 나는 잘 모른다”라 하지 않는가. 또 어떤 페미니스트 여사님마저 “부동산은 내가 아닌 시어머니가 다 알아서 하셨어요.” 허허 참, 여기서도 영광은 아버지, 쪽팔림은 어머니에 넘겨졌다. 

동아시아 정신세계의 소프트웨어인 고상한 유교가 이런 어머니 신세다. 서구의 침탈에 무너졌을 때, 모두 유교를 탓했다. 이후 서구 흉내를 내면서 먹고 살게 되니 유교는 아시아적 가치로 칭찬받았다. 그러다 금융위기로 폭망하니 욕을 얻어먹었고, 그것을 극복하니 다시 그 억척스러움에 칭찬이 쏟아졌다. 집안이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가문의 체면 때문에 곰방대 물고 바둑을 두는 동안, 어머니는 자식 등록금을 벌기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는 게 유교적 전통일까.

이렇듯, 동아시아는 잘되면 유교적 근면성으로 자본주의를 잘 흉내 냈다고 하고, 폭망하면 유교적 봉건성 탓으로 돌린다. 때문에, 유교는 어머니같이 존귀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천박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유교에 대한 인식이 귀천의 양극단을 오가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다. 첫째는 유교를 자본주의와 비교하면서 우열을 가르려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공리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동아시아가 윤리와 문화적 측면에서 동서 혼종의 사고방식과 다문화사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시대성을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유교만을 향한 박대는 편파적이다. 

예를 들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돌진하는 기차 이야기가 나온다. 그 딜레마는 한 사람이 기꺼이 죽어서 다섯을 살리느냐, 아니면 다섯이 죽더라도 한 사람이 살아나느냐이다. 정답이 없는 이 문제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유교적 측은지심과 희생자 숫자에 따라 발생하는 보험금을 둘러싼 공리의 다과를 비교해야만 하는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 

칸트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해야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는 명제를 남기면서 자본주의 세계의 인도주의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동아인은 맹자의 측은지심과 칸트의 인도주의를 잘 버무린 동서 혼종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동아인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과 보상금의 공리주의 중 어느 하나가 아닌 상호참조의 방식으로 문제를 사유할 게 분명해 보인다. 즉, 한 생명 혹은 다섯 생명 어느 쪽이 희생될지는 사람이 아닌 ‘하늘의 뜻’이며, 그에 따른 보상금도 사후에 따라오는 것이지 사전의 셈법을 따라서 희생자 숫자를 미리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게 측은지심과 공리주의가 타협한 정의론의 결론일 것이다. 

유교가 과연 공리추구의 측면에서 무능한가 하는 것도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지인 간에 밥을 사는 것은 유교적 예의 교환이다. 동아인은 신뢰를 쌓는데 자발적인 예가 우선이며 공리는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라 여긴다. 따라서 이심전심의 예를 앞세운 유교는 연고주의라는 부패의 근원으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지인 간의 대접은 공리적 동기로 읽히기 쉽다. 그래서 신뢰는 타율적 계약의 이행으로 이루어지며 자발적 예는 다음의 단계이다. 즉, 동아인은 우선은 같이 밥을 먹고 계약을 하지만, 서양인은 계약을 마친 후에 같이 밥을 먹는다는 차이다. 또한, 정실주의와 정경유착은 인류사회 공통의 문제 중 하나이지 유교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금융위기도 유교 어머니의 정실주의 탓인지, 자본주의 아버지의 폭주 때문인지, 양자의 불화 탓인지 결론을 내기 힘들다. 

사실, 오늘날 동아인은 동서양의 가치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보다는 ‘제 편한 대로 혼용하면서 산다’라는 게 진실에 가깝다. 동아인이 서양 친구를 대할 때는 자존심 살리기 용도로 유교 문화를 내세우고, 집세를 따질 때는 공리주의를 활용한다. 자식과 청년들에게는 유교적 예의 시선으로 대하고, 일상의 지인들과는 쿨한 척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지낸다. 정치꾼들도 내면은 공리주의적이지만, 외면만은 항상 예와 덕치의 가면을 쓰고 시민들과 소통하는 척한다. 동서양 대중문화의 상징적 대표작인 ‘대장금’과 ‘미션 임파서블’이 모두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 동아시아이다. 

유교가 아직도 가치판단의 준거로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분야는 공동체 집단의식이 가장 잘 투영된 정치문화이며, 그것은 역사 대하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중·일에서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필독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권모술수의 대가 조조는 패도를, 덕치의 지도자 유비는 왕도를 상징한다. 《삼국풍류》에서 궁예와 견훤은 폭정을, 왕건은 널리 선정을 베풀어 개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망》에서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폭군으로, 이에야스는 인화로써 에도막부를 건립한 왕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왕도와 패도의 가치는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정치에서 민주와 독재의 논리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지배와 경영 노하우를 개발하는데 참조하기도 한다. 지배계층은 과거를 계승한다는 명분이 필요하고 민중은 급격한 변화를 우려하므로 양자가 적어도 공식적인 레벨에서는 유교와 단절하는 게 불안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동서 혼종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유교든 자본주의든 무엇이든 간에 어느 하나를 편애하며 살기보다 상황에 따라 지성과 감성으로 공감하는 바를 자유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선택지에 있는 유교를 동아인은 필요하면서도 점잖은 척 곁눈질하며 빨리 치워야 할 ‘골동품 요강’ 정도로 대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할 줄 알면서도 변치 않게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일 것이라고 믿는다. 

 

고성빈 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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