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나라를 만드는 어설픈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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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나라를 만드는 어설픈 지식인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1.02.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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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_ 사인사색

대선을 한해 앞둔 올해도 공천과 정치생명을 보장하는 정치인들의 줄서기만 바쁜 것이 아니라 떡고물에 관심이 있는 철새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위기의 시기일수록 정치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가급적 ‘정치판’이라든지, ‘선거판’이라는 냉소적 표현을 안 쓰려 하지만, 막상 벌어지는 꼴들을 보면 끝내 이 천박한 단어가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갈 때가 종종 있다. 민주화 이후 반복된 대선에서 습득된 학습효과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부실한 것도 아닌데, 선거만 다가오면 갑자기 다음 정권에서 천지개벽이라도 할 것처럼 대한민국을 개조하고 새로운 사회로 만들겠다는 각종 슬로건이 난무하고, 거기에 대선 후보와 사적 공부 모임에서 멘토 역할을 했다는 교수·연구자들이 등장해서 학문공동체에서는 제대로 논의 혹은 검증도 안 된, 포장만 그럴싸한 개념 몇 개를 신문 지상이나 그들만의 국회 토론회에서 공표한 후 향후 그것이 5년의 국운을 결정한다고 소란을 떤다. 물론 열심히 이를 받아 써주는 기자들이 단기간에 가설을 정설로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 

정치인-학자-언론의 삼각동맹이 정권 내내 선거 때처럼 공고하게 작동하면 대단히 감동적이겠지만, 대체로 정권 말기에 주군에 대한 충성도를 앞세운 일부 의리 있는 정치인이라면 몰라도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을 학자 중에서 명운을 걸고 지켜내는 사람들은 보질 못했다. 4대강 사업과 지식경제, 창조경제론에서 이미 확인했으며 집권 4년차인 요즘은 거의 듣기도 어려운 소득주도성장론(이 논의는 이후 ‘혁신성장’을 거쳐 ‘포용성장’으로 진화했다)도 자칫 그렇게 될 운명에 놓여 있다. 항상 이 ‘아사리판’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건 선거 때의 삼각동맹이 아닌 공무원들이다. 시험을 통해 걸러진 대한민국의 공무원, 특히 고위 엘리트 공무원은 이 방면에서 최상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정권이 바뀌면 슬로건을 정책으로 바꾸어내는데 특급 실력을 보여준다. 그 실력이 간단치 않아서 정책과 슬로건의 최초 발화자들마저 놀랄 만큼 세련되게 포장을 한다. 가늘고 길게 가려면 세칭 ‘까라면 깐다’라는 신조가 공직생활에서 지고의 가치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개념이나 슬로건을 동원해서 권력은 잡았으나 총론이 부실한 터라 당연히 각론도 없는데, 소위 국정기조를 만들었다는 지식인은 정작 그다음 절차를 논의할 때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다 보니 슬로건뿐인 공허한 개념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해내는 건 정당의 정책연구원도 아닌 결국 공무원들이고 그중에서도 기재부는 발군의 역할을 한다. 정부의 모든 정책사업은 결국 예산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세균 총리가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일갈을 하셨다지만, 옛 기획예산처를 기획재정부라는 공룡으로 만들어 그들이 최상위 갑질을 하게 만든 주역들은 사실 정치인들과 의지만 충만한 어설픈 지식인들이다. 항상 그렇듯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든가, 특수한 상황론적 이유를 들어 과거의 당사자들이 변명할지 모르나 아직껏 큰 소리로 들어본 적도 없고, 얼마 전까지 기재부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기재부 산하의 위원회만 들락거리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꿀이 달긴 단 모양이다. 

이러다 보니 정권 초에 공무원과 정치인의 밀월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코드형 내부승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시기이고, 아름다운 공무원의 미담도 심심치 않게 듣는 시기이다. 현 정부 초기도 그랬다. 역대 정부의 집권 초기에 엘리트 공무원들이 하는 일들은 대체로 패턴화 되어 있다. 부처나 산하 국책연구소는 집권 후에야 비로소 새 정부의 가치와 철학을 구현할 정책영역을 경험학습(learning by doing)식으로 실행하기 시작한다. 기재부는 예산을 짜서 보여주기식 사업에 일조하고, 나머지 각론은 정치권 사정 봐가면서 서서히 채워나간다. 5년짜리 단기 정부인데 집권 후 상반기 동안 국운을 결정한다는 정부의 핵심이념이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용역사업으로 보완하는 코미디 같은 일들이 매번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의지 충만형 교수나 연구자들에게는 신나는 일이다. 용역사업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으며, 정부 공무원도 그 용역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수없이 반복된 용역사업이 어떤 정책으로 귀결되었는지는 드물게 듣게 되고 대체로 결론도 애매한 서랍용 보고서들이 태반이다. 종종 그런 용역사업을 심의해본 소회를 밝히자면 세금이 아까울 정도이다. 불과 몇 달 내에 억대의 사업이 후딱 집행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용역의 순수성마저 의심된다. 당연히 해외에서는 보기 드문 작태들이다. 

일례로 독일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교수·연구자들이 새로운 내용도 없이 비슷한 용역을 수도 없이 반복 수행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체로 정부가 발주하는 대형 프로젝트는 용역을 수행한 교수의 이름으로 위원회가 구성되고 보고서들도 그 이름으로 작성되고 공개된다. 전 국민 누구나 보고 평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용역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다. 심지어 그런 보고서를 중심으로 종종 사회적 논쟁이 촉발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처럼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서조차 보고서를 얻기 어려운 일들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정치와 학문의 갈등적 긴장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치의 이데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정책이 구체와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정치와 정책의 가능성과 형성능력에 관심이 있는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학문의 현실 개입에 나는 오히려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개입을 빙자하여 어설픈 ‘시대정신’이나 읊조리면서 연구인지 해외소식지인지 구분도 안 되는 정책 담론을 소개나 하면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것은 결국 공무원의 나라를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정치에 개입하려면 공무원과 당당하게 맞짱을 뜨든지 아니면 설득을 시키든지 해야지, 용역발주하는 사무관이나 과장들의 눈칫밥이나 먹는 자들이 국가의 운명을 바꾸겠다면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아직도 국회에는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YS의 후예들이 많아 보인다. 정책을 스스로 마련하는 노력 대신 각종 정책세미나를 차고 넘치게 주최한다. 정책토론회라고 발표자나 토론자로 참석해보면 자신이 주최한 정책세미나임에도 의원들은 인사만 하고 꽁지를 빼기 십상이다. 보좌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만하다. 이도 용역비, 발표비만 주면 단기간에 급조해서 맞춤형 답을 주는 지식인들이 즐비해서 나오는 행동이니 딱히 의원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저서에서 막스 베버가 강조한 순수한 ‘학문의 정열’만을 고귀하게 여기자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학회를 통해서건, 학맥을 통해서건, 인맥을 통해서건 외부용역 과제에 발끝이라도 들여놓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인지는 금방 알게 된다. 베버도 이미 백 년 전에 그런 위험을 감지하고 경고한 바 있다. 상황이 그렇다 한들 대놓고 타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선거의 계절이 왔고 누군가는 또 열심히 비선 사무실을 넘나들고, 누군가는 국회 정책토론회에 참석해서 슬로건과 추상화된 개념을 던지고, 해묵은 정책리스트를 다시 재포장하면서 해외에서는 보기도 힘든 수백 페이지 분량의 5년짜리 선거공약집을 만들 시기이다. 좋다. 열심히 하길 바란다. 환부작신(換腐作新)의 기개든 공명심에서든 뭐든 좋다. 단, 공공선을 망가뜨리는 주범은 공무원이라면서 슬그머니 사라지지 말고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과 5년 내내 맞짱도 뜨고 설득도 해내시라! 그러면 우리는 해외에서는 반세기 전에 구축된 이론과 실천의 인지공동체(epistemic community)를 국내정치에서 비로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부디 그렇게 되길 기대해본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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