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처럼 모음만 새어나올 때 - 김해자의 『해피랜드』(아시아, 2020)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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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처럼 모음만 새어나올 때 - 김해자의 『해피랜드』(아시아, 2020)를 읽으며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1.01.3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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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의 에크리티시즘]

여기 한 권의 시집이 있다. 시인의 암 투병과 사회적 고통이 상승작용 하는 가운데, 시의 존재론적 의미를 묻고 있는 작품들이다. 중견 시인 김해자가 6개월의 투병 과정 동안 의식과 무의식, 자의식과 타자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쓴다’는 행위와 시의 의미 탐구에 몰입한 『해피랜드』(아시아, 2020)가 그것이다.

표제시의 공간적 배경인 ‘해피랜드’는 필리핀에 실재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 장소의 지명과 성격은 서로를 부정한다. 그곳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 도시개발 과정에서 배제된 도시 빈민들의 집단 소개지다. 그곳에서 시인이 “어린 성자들”로 부르는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페트병과 고철을 모으는 나날의 생존 투쟁이 벌어진다. “굶지 않는 것, 맛난 것 많이 먹는 것”과 같은 기본적 욕구충족이 희망의 최대치인 장소가 해피랜드다.

이것은 실재하는 장소지만, 시적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은폐된 본질을 드러내는 ‘표상적 장소’다. 행복의 장소로 명명되어 있지만, 그 실체를 투시해 보면 재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장소는 지구상에 부지기수다. 어떤 위치에서 인간과 사회와 국가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장소의 속성과 의미는 달라진다. 이때 ‘해피랜드’라는 기표는 현실의 적나라한 고통과 사람들의 실태를 탐문하는 순간, 모순이나 풍자 혹은 블랙 유머로 전락하게 되는 가짜명명법이다. 

김해자의 시적 자의식과 관련해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도대체가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문명적 재난과 사회적 비참의 풍경들 앞에서, 오늘의 시는 또 시어(詩語)는 어떤 기능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집에 수록된 산문 「시작노트」에는 이런 통절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시라는 것이 다큐만 못하단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아니 어떤 시도 현실보다 아프거나 슬프지 않다.” 

다큐멘터리는 고통을 카메라의 심도를 통해 리얼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때의 카메라가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하고 때로는 원경을 포착하기 위해 멀리 물러선다. 성우의 내레이션은 물론 감정의 기복을 음향화한 효과음 역시 고통의 재현 과정에서, 그것이 특정한 입장과 공감력에 기반한 구성적 작업과 편집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시어는 어떻게 고통에 대응할 수 있는가. 시의 화자가 “고통스럽다”고 진술한다고 해서, 시적 대상의 고통이 생생한 사실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시를 통한 고통의 재현과 제시는 시적 대상이 포위되어 있는 현실과 사회의 총체적 모순구조를 생생한 감각적 활기를 통해 의미화할 때 가능해진다. 감각화된 지성이 시적 세계다. 대상의 개별성과 모순구조의 편재성을 언어를 통해 통합한다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간단한 일이지만, 시작행위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러 난점들이 놓여 있다. 게다가 시와 같은 ‘순간’에 집중하는 언어형식에서 그것은 더욱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어의 일반화된 양식적 틀을 버리고, 다큐멘터리적 사실/정보 제시로만 쌍용자동차 사태의 비극을 환기시킨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는 위에서의 시적 고뇌의 소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2018년 여름 대한문 앞 분향소에 차려진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영정에 기록되어 있는 언어들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죽음의 기록들은, 시인의 개입 없이도 이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충격과 탄식을 자아내게 만든다. 

“2009. 4. 8-비정규직, 계약해지노동자 자살// 2009. 5.27-재직자, 신경성스트레스 인한 뇌출혈 사망// 2009. 6.11-광제데모 구조조정 스트레스 등으로 허혈성 심근경색 사망// 2009. 7. 2-희망퇴직, 사측 강요로 희망퇴직 후 생계난으로 연탄가스 자살// 2009. 7. 20- 사측의 협박 및 회유 받고 괴로워하던 조합원의 아내 자살// 2010. 2. 20-재직자, 행방불명 상태에서 차량 안에서 연탄가스 자살// 2010. 4. 25- 조합원의 부인, 생계난으로 투신자살// 2010. 5. 4- 재직자, 분사화된 시설팀 근무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부분)

위의 시는 이런 식으로 29명의 죽음이 요약된 사망 정보로 이어진다. 이 시에서 시의 화자는 ‘소실’되어 있다. 제목인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에는, 1인칭 ‘나’가 있어 화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지만, 이 진술 역시 “정리해고 후 서른 번째 사망자인 김주중 씨의 마지막 말”이라는 시인의 각주를 보면, 이 시는 30번째 사망자의 눈으로 쌍용차 사태의 비극을 조망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이 시의 관찰자 역시 이미 사망하고 없다는 점에서 보면, 겹으로 된 비극의 제시인 셈이다. 그렇다면 관찰자는 물론 시의 화자 모두 소실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어떤 언어로도 이 사태 전반을 규정짓는 사회적·구조적 비참을 명료하게 말하고 극복한다는 것의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숨도 막히고, 입도 막히는 비극에 대한 시적 전략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공장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샌단공 정범식”에 대해 경찰과 회사가 “자살”로, 죽음의 본질을 은폐하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는 시이다. “나, 샌단공 정범식은 2014년 4월 26일 오전 11시 35분 발견되었다”로 진술되는 도입부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이 결합된 묘한 진술 방식이다. “울산 현대중공업하청노동자로 불리던 나는/도장부 13번 셀장 2626호선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4미터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는 진술도 기묘하다. 

김해자 시인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는데, 스스로의 죽음을 증언하고 보고하는 시점으로 이 시가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재로 죽은 사자(死者)와 이 시의 화자는 겹쳐있다. 이 시에서의 화자는 사자(死者) 자신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금 시인은 사자의 목소리를 중계하는 영매의 역할을 통해, “샌단공 정범식”의 억울한 죽음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경찰과 회사의 조직적 결탁을 시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종결부를 보면, 시적 폭로와 무관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사회적·구조적 폭력의 완강함이 매우 냉담하게 서술된다. “공장은 무사했다 나만 자살되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악무한의 현실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사회적 고통과 폭력 앞에서 시어는 과연 명료한 희망 편에 설 수 있는가. 혹은 영락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 그런 오래된 믿음은 현실과 부딪쳐 지속될 수 있는가 하고 시인은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시작노트」에는 이 고민에 대한 응답이 이렇게 적혀있다. “희망이 없어도, 구원이 물 건너갔다 해도, 구조가 일상인 세계 안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고서라도 신음처럼 모음만 새어나온다 할지라도, 지구라는 방주에 탄 해피랜드의 오늘을 바라보고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해자에게 시쓰기란 희망과 구원이 없는 악무한적인 고통과 폭력의 세계 안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심미적 ‘기억투쟁’이다. 기억투쟁을 위해서는 똑바로, 동요 없이 “오늘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한 편의 시에서 현실의 야비한 폭력성을 명료하게 극복하거나 지시할 언어를 찾을 수는 없다. 항상 우리들의 언어는 현실에 미달되거나 초과하곤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우우, 아아아, 하는 신음 같은 모음이라도 발성할 수 있다면, 뒤틀린 세계를 토막 난 언어로라도 기록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 시인의 존재론적·실천적 책임이 수행될 수 있다고 김해자는 생각하는 듯하다.

이 시집에서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함께 앓는 행위로 나타난다. 견딜 수 없는 시인의 병마에 따른 고통과 세계의 사회적 고통은 김해자의 시에서 내통하고 상호침투하고 있다. 「마스크, 假面, 탈」, 「중매」, 「타로 타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과 같은 신종코로나 연작시도 그러하지만, 「무명」과 같이 시인의 투병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시에서도, 세계고(世界苦)와 개인고(個人苦)는 긴밀히 연결된 것이어서, 고통 속에서도 “말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거세게 심장이 펌프질하는 시간,/ 180mmHg 넘어 압을 올려 가는 초침/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시/ 지금 빗속을 날고 있는 미착륙의 시,/ 나는 달렸습니다 푸른 새벽의 말/ 금빛 말고삐 하나 잡고,(「무명」 부분)”    

위의 시는 시인이 암 수술을 한 직후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시의 본질에 대해 사고하고 있는 장면을 잘 보여준다. “압을 올려가는” 몸과 그것이 닿는 세계는 고통의 비등점을 넘어 죽음과 인접해 있다. 나와 세계의 한계상황 속에서 언어는 명료한 분절음으로 발성될 수 없는 공포의 난수표 같은 혼돈으로 충만해 있다. 이때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시”는 삶의 중력을 벗어난, 그러나 착지할 수 없는 “미착륙의 시”로 인식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자리에서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푸른 새벽의 말”과 “금빛 말고삐”와 같은 표현은 생사(生死)의 극한적 한계상황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화된 시적 언어에 대한 추구와 신념을 보여준다. 한계상황 속에서조차도, 그 상황을 시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업은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이 표현 속에는 담겨 있다. 

김해자의 『해피랜드』를 자세히 읽어보면, 잘 보고, 듣고, 말하고, 기록하되 “침묵의 소리”까지도 민감하게 감지하려는 시적 태도가 눈에 띈다. 「돌미역귀」를 보라.

  “아야, 겁나게 짚은 디서만 귀가 달려야,/ 온몸시퍼래지도록 귀에 알을 슬어놓는 어미들 가쁜 숨소리/ 거품 물고 지느러미질하는 애비들 부채질소리/ 점액질의 비릿한 노래 멈추어 바라보는 순간/ 고이는 침묵의 소리”(「돌미역귀」 부분)

위의 시에서 ‘미역귀’는 단순한 소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은 미역귀가 풀어지면서, 그것을 먹게 될 “어미들의 가쁜 숨소리”와 “애비들 부채질소리”는 물론 그 너머의 “침묵의 소리”조차 부드럽고 풍부한 점액질로 ‘활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강림한 병마의 고통과 압도적인 사회적 비참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체념하지 않고 그것을 보고, 기록하고, 청음 하는 일. “신음처럼 모음만이 새어나오는” 상황일지라도, 혼신의 의지로 “푸른 새벽의 말”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지금 김해자가 고통 속에서 확인하는 시인의 존재론이다. 아직 없는 말을 찾아내기. 침묵의 심연에 귀를 기울이기. 나와 세계를 공명시키기. 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최일수 문학비평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비평과전망> <내일을여는작가> <실천문학>의 주간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타는 혀>, <해독>, <파문>,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종언 이후>,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두섬: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등이 있다.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 부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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