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자 -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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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자 -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그림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1.01.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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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의 그림이야기]
▲ 안미자, 무제, 면천에 먹, 2020
▲ 안미자, 무제, 면천에 먹, 2020

어둡고 깊어서 막막하다. 정박할 곳이 없는 시선이 배회하다가 가까스로 희박한 명암의 차이에 의해 드러난 색의 분리를 감지한다. 검정과 그보다 훨씬 진하고 더 어두운 검정이 들어 있는 화면이다. 가로, 세로로 그어진 선들, 붓질이 떨면서 지나간 궤적이자 먹물이 힘껏 스며들어 적셔지고 있는 상황을 안긴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생성적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해서 명멸하고 있다. 색과 붓질만으로 이루어진 추상이지만 그것은 문자를 지시하다 스러져버린 듯도 하고 흡사 짙은 어둠에 잠긴 풍경도 연상시킨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단호한 어둠이 덮친 자연을 앞에 두고 있자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하늘과 산만이 가까스로 경계를 만들어 시선에 감지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삼킨 어둠, 빛이 없는 곳에서 기적처럼 벌어지는 차이에 의해 판독되는 모종의 선이 만드는 풍경이자 어둠에 밀려들어 간 인간의 눈이 그에 적응하면서 차오르는 풍경이다.

동양의 서예는 붓으로 필선의 힘과 변화의 맛을 즐기고, 내용을 음미하는 예술이라 내용의 의미와 느낌에 잘 어울리는 적합한 서체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그것이 서예를 가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작가의 경우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삽입하는 특정 문자의 획을 느낌이 있게 밀고 나가고자 한다. 평 붓의 떨림과 변화, 먹색의 빛과 질감은 그것에 겨냥되어 있다. 내구성이 강한 두꺼운 면 천 안에 온몸으로 먹을 밀어 넣어 문자의 의미와 그에 대한 자신의 기원을 두텁게 하고 그 느낌을 적극 활성화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깊이를 갈망하는 마음이거나 그런 경지를 도모하는 몸의 수련과도 같아 보인다. 지극 정성을 다해 간절히 무엇인가를 바치려는 태도는 고임과 축적의 방법론으로 구현된다. 옛사람들은 그런 종교성을 돌을 쌓거나 탑을 올리고 음식을 고이는 식으로 가시화했다. 깊은 용기가 된 화면으로 시간을 축적시키고 먹의 입자가 쌓여가는 작업 과정은 그러한 의식을 닮았다. 이는 물리적 속성과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에 의탁하는 일이자 가능한 자연스러운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도 보인다.
 
또한 문자의 차용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다분히 서예를 응용한 작업인 동시에 먹색이란 단일한 색상과 그 색상 안에서의 섬세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모노크롬 미술의 어법과 유사하기도 하다. 그것은 추상이지만 특정 문자의 세계를 부분적으로 차용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의미를 지닌 문자의 개입으로 인해 물감의 물성이나 캔버스의 평면성만을 조율하는 것과 차이를 만든다. 일반적인 표상화의 욕망을 지우고 또한 매체 자체의 환원적 측면만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일관된 방법론을 반복해서 행하는 것도 아닌 그 어느 틈에서 이루어진다.

지속해서 무수한 편차를 발생시키는 ‘컴컴한’, 그러면서도 이름 지을 수 없고 호명할 수 없는 막막하고 어두운 빛의 세계, 먹빛의 무한한 영역과 특정 순간의 마음과 몸의 상태를 지시하고 있다. 색은 문자로 기록될 수 없고 언어로 호명될 수도 없다. 색은 늘 우리들의 표기 체계 바깥에서 선회한다. 다만 그것은 심리적이고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하염없이 깊고 깊게 먹을 밀어 넣어 원하는 먹색과 그 질감, 빛 그리고 꿈틀거리는 선/문자의 생명력을 표현하려는 것은 다분히 주술적이다. 특별한 형상도, 드라마틱한 화법도, 주관적인 제스처나 욕망도 없어 보이는 이 그림은 그저 검은 화면에 깃든 깊은 어두움, 그리고 그 어둠을 유유히 자신의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뱀의 자취와도 같은 붓질, 선만을 안겨준다. 그것은 평정심의 유지 내지는 모든 것을 소진시키는 쪽으로 기운다. 한편 이 선, 면을 인지하게 하는 것은 먹색의 층위로 인해 생겨나는 바탕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구분은 무척이나 애매해서 보는 이들의 망막을 서성이게 한다. 보고 있는 과정을 통해서만 서서히 출현하는, 일정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만 가능한 그림,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고자 하는 관자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실현되는 그림이다. 망막이 아니라 심안에 의해 보이는 그런 그림에 가깝다. 보는 이들에 의해, 자신의 열망에 의해 비로소 몸을 내미는 이 그림은 결국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새삼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요히 들려준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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