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미래의 기획과 기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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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미래의 기획과 기술철학
  • 손화철 한동대·기술철학
  • 승인 2021.01.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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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호모 파베르의 미래: 기술의 시대,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 (손화철 지음, 아카넷, 432쪽, 2020.12)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나 호모 루덴스(Homo Ludens)처럼 인간의 핵심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호모 파베르는 흔히 ‘도구의 인간’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이라 푸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철학에서는 언제나 생각하는 능력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보았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능력은 부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람이 만든 도구가 제한된 영역의 사고에서나마 인간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는 시절에 도달하고 말았다. 기술은 초기에 인간의 육체노동을 경감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기술발달은 이제 인간의 사고능력을 대체해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술을 통해 증강된 능력을 가진 인간 이후의 인간, 즉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마저 등장하였다. 호모 파베르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절실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그 논의는 사변적이기보다 실천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철학의 신생분과인 기술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로 시작한다. 1장에서 기술철학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필자가 취하는 접근 방식, 즉 실천철학으로서의 기술철학 개념을 제시한다. 이어지는 1부 <기술철학의 흐름>을 구성하는 세 장에서는 기술철학의 이론들을 나누어 소개하되, 해당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중에서도 ‘경험으로의 전환’이라는 흐름을 소개하는 3장이 가장 긴데, 이 접근이 우리가 오늘날 기술철학에서 주로 다루는 핵심적인 주장과 이론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앞뒤의 흐름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 다루는 ‘고전적 기술철학’에서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기술철학의 초기 논의들을 주도했던 이들이고, 4장에서 다루는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철학의 주요 흐름과는 별개로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다가 최근 영향력을 얻으며 기술철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세 장으로 구성되는 2부 <이론적 대안의 모색>에서는 기술철학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적 입장을 정리한다. 이는 몇 가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호모 파베르의 역설’, ‘목적이 이끄는 기술발전’, ‘접근성의 원칙’, ‘현재의 기획으로 도래하는 미래’ 등이 그것이다. ‘호모 파베르의 역설’은 인간이 기술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술 또한 인간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일컫는다. 이는 사실 매우 상식적인 입장이고,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기술철학의 여러 논의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주도성만을 강조하거나 기술이 인간의 자율성을 앗아간 것에 대한 우려에만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듯한 현상을 종합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기술을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의 기술발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머지 세 가지 개념은 호모 파베르의 역설을 가지고 앞서 살펴본 기술철학의 이론들을 다시 검토한 후에 제기되는 대안의 핵심어들이다. 필자는 기술의 발전은 “가능한 것을 모두 개발한다”는 식의 공격적인 태도보다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많은 기술들은 먼저 개발하고 수요를 찾아내는 것을 거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기실 기술은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만큼, 그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그 목적의 설정은 공학자나 정책결정자뿐 아니라 시민적 합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 목적은 다소 추상적인 거대한 형태를 띨 수도 있고 개별 상황의 필요를 충족하려는 작은 목적일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기술적 산물이 아닌 그 기술로 인해 기대하는 변화 자체가 될 수도 있다. 본서에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목표의 예시로 기술격차의 문제를 공학설계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 때 그 기술이 전체적으로 기술격차를 벌리는 방향이 아닌 그 격차를 줄이는 방향을 채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안은 “미래는 현재의 기획”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사람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라면, 미래는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에는 이런저런 기술이 상용화될 테니 준비해야 한다거나, 우리의 사고가 이런저런 식으로 바뀌리라 생각하기보다, 우리가 어떤 미래에 살고 싶은지를 현재의 기준으로 가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고려를 할 때 기술이 우리의 삶과 사고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고려해야 할 것은 당연지사이다.
 
또다시 세 장으로 구성되는 3부에서는 1부의 역사적 고찰과 2부의 새로운 제안을 어떻게 현대기술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주체, 대상, 방법을 염두에 두고 모색한다. 먼저 기술철학에서는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지 않는 공학자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이어서 기술철학의 이론적 대안이 개별 기술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유전자 가위 기술과 빅데이터 기술을 사례로 살펴본다. 이들 기술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들을 제시하고 이들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 제기되어야 할 물음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문제를 다루되,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맥락을 염두에 두고 접근한다. 우리나라가 급속한 기술발전 과정에서 가지게 된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특징과 한계를 알아보고 목적이 이끄는 기술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술영향평가 전담기관이 설립을 제안한다.

기나긴 철학의 역사에 비춘다면 기술철학의 역사는 매우 짧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의 가능성과 힘을 감안하여 지난 세월 철학에서 물어왔던 인간과 삶, 사회에 대한 깊은 물음들을 다시 물어야만 한다. 아쉽게도 필자의 역량이 일천하여 기술의 문제를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과 제대로 연결시키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고, 그 대신 기술철학이라는 분과에서 다루어진 실제적인 논의들을 정리하고 거기서 얻은 통찰들을 제출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기술철학의 입문서 역할이라도 감당하여 더 많은 이들이 기술의 문제가 가지는 철학적 중요성을 실감하고, 기술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감히 바래본다.


손화철 한동대·기술철학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벨기에 루벤대학교 철학부에서 ‘현대 기술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세부 전공은 기술철학이고, 주요 연구 분야는 기술철학의 고전이론, 기술과 민주주의, 포스트휴머니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철학, 미디어 이론, 공학윤리, 연구윤리 등이다. 현재 한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철학)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미래와 만날 준비』, 『랭던 위너』와 『현대기술의 빛과 그림자: 토플러와 엘륄』가 있고, 공저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짓말』,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먼』 등이, 옮긴 책으로는 닐 포스트먼의 『불평할 의무: 우리 시대의 언어와 기술, 그리고 교육에 대한 도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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