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텍스트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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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텍스트의 변증법
  • 김태환 서울대·독문학
  • 승인 2021.01.2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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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

나의 책, 나의 테제_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 내재적 저자론에서 저자의 사회학까지』 (김태환  지음, 문학실험실, 144쪽, 2020.12)

저자에 관한 연구서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를 계획하게 된 동기는, 근대 이전의 이야기 문학이 서양에서도, 동아시아적 전통에서도 저자가 불투명하거나 익명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이미 상당히 널리 알려진 답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문화는 창조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중시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저작권에 대한 관념도 희박했으며, 서양의 근대에 이르러 예술적 상상력과 독창성이 인간적 주체성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나서야 비로소 저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삼국지 연의』와 같은 중국의 고전적 소설 작품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름 모를 수많은 저자의 가필을 통해 형성된 것과 근대 이후 소설가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로서 저자의 대표적 형상으로 부상한 것 사이의 극적인 대비는 이러한 설명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를 이야기 문학의 영역을 넘어서 문자와 책 문화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서양 근대의 독창성 이념과 무관하게 저자를 숭상하는 전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중국문화에서 시인의 명성은 일찍부터 대단한 것이었다. 또는 제자백가 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오는 사상서들은 아예 저자의 이름을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 많다. 그만큼 저자가 중시되었다는 뜻이다. 서양 고대의 철학자, 시인들의 명성 역시 그들이 남긴 책과 작품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정이 가능해 보인다. 저자의 의미는 어떤 시대나 문화가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쓴 글이 당대의 문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문자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글은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고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가치 서열이 수립된다. 예컨대 중국문화의 전통에서 시는 일찍부터 높은 문화적 가치와 권위를 자랑하는 장르였지만, 소설은 하찮은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뛰어난 시인은 높은 명성을 얻은 반면, 빼어난 이야기꾼조차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야기의 작자도 이야기를 짓는 것을 그리 자랑스러워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 서양의 근대 소설도 초기에는 문화적 세계의 변방에 있는 무가치한 장르에 불과했고, 그런 이유로 소설의 익명 출판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에 가까웠다. 그러던 소설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중요한 문화적 의의를 지니는 문예 장르의 하나로 부상한다. 소설은 결국 가장 대표적인 문학 장르가 되었고, 소설의 장르 가치가 상승하면서 소설을 쓴 작가의 이름값도 함께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와 저자가 쓴 텍스트 사이에는 가치론적 측면에서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텍스트가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면 저자의 가치도 높아지고, 텍스트가 사소한 것으로 비하되면 그것을 쓴 저자도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나는 저자와 저자가 쓴 텍스트 사이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일반적 모델, 다시 말해 어떻게 텍스트의 의미와 가치가 그것을 쓴 저자의 의미와 가치로 전이되는가를 기술할 수 있는 모델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모델에 따르면 가치의 전환과 이전은 저자 구성과 저자 인지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독자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의 가치를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쓴 사람의 인격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상상된 이미지에 자신이 텍스트에서 읽은 의미와 가치를 투영한다. 그것이 저자 구성이며 독자의 구성 작업을 통해 의미 부여된 저자의 이미지가 가상 저자다. 그리고 가상 저자는 독자가 저자가 누구인지를 인지함으로써 그 텍스트를 실제로 쓴 인간, 즉 실제 저자와 동일시된다. 저자 인지를 통해 텍스트에서 저자로의 가치 전이가 완료된다. 익명으로 텍스트를 발표하는 저자는 저자 인지를 방해하고 이로써 텍스트의 가치(부정적인 가치)가 자신에게 전이되는 것을 회피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델의 수립 과정에서 가치의 전이가 저자에서 텍스트의 방향으로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독자가 어떤 텍스트를 읽기 이전에 저자의 이름을 인지하고 그 이름에서 이미 일정한 가치를 알아본다면, 그 이름의 가치가 독자의 독서와 저자 구성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가치 있는 텍스트가 저자를 가치 있게 만들듯이, 가치 있는 저자의 이름은 텍스트의 가치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저자와 텍스트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가치의 상호 전이를 저자와 텍스트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와 텍스트의 변증법이 활성화된 상황에서 실제 저자는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분신인 가상 저자를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모델은 어떤 의사소통적 조건이나 문화적 구도에서 저자와 텍스트의 변증법이 중단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보수적인 문화는 저자에서 텍스트로의 가치 전이가 과도하게 지배적으로 되는 경향을 보이며, 그럴 경우 텍스트 자체의 힘을 통한 새로운 가치 있는 저자의 탄생이 억제될 수 있다. 반면 근대 문화의 독창성의 강조는 새로운 텍스트와 새로운 저자의 등장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에 대한 현대적 논의는 롤랑 바르트와 미셸 푸코에게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말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급진적 선언으로, 미셸 푸코는 저자의 인격적 주체성을 저자 기능으로 대체함으로써 근대가 숭상한 저자의 드높은 위상을 의문시했다. 그들은 저자에 대한 공격을 인간의 주체성에서 출발한 서양 근대의 정신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고, 이러한 태도는 ‘저자’라는 현상이 서양 근대의 특수한 산물이라는 편견을 조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자의 죽음이라는 바르트의 테제도 상대화되었고, 저자의 이론은 늦어도 1990년대 초부터는 '저자의 부활' '저자의 귀환'을 운위하면서 서양 근대라는 시대적 문화적 공간 바깥의 다양한 저자 관념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많은 논의들이 다른 시대와 문화의 저자 관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 저자 관념과 얼마나 다른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저자 개념을 특수한 시대적,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바르트와 푸코의 관점을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나의 책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에서는 저자 개념을 모든 문자 문명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 구조에 내재하는 필수불가결한 항으로 보고 이러한 일반적 구조에서부터 저자의 의미와 가치를 탐색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보편적 조건에서 출발할 때 특정한 시대적, 문화적 조건 속에서 통용되는 저자의 관념도 좀더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인 '서사문학과 익명주의의 문제'는 이 연구의 계기가 된 주제에 대한 상론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는 텍스트가 서사문학이라는 특수한 장르에 속하는 데서 제기되는 특수한 저자의 문제를 다루면서, 전통적인 서사문학의 익명주의의 기원과 그것의 현대적 변용을 추적해보았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저자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매체와 명성의 문제임을 밝혔다. 문자와 인쇄술이 저자-텍스트-독자라는 특수한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만들었고, 이 형식 속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명성의 추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연구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에서의 저자 문제를 추적해볼 생각이다.


김태환 서울대·독문학

서울대학교에서 법학, 독문학을 공부하고, 동대학 독어독문학과에서 소설 시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대학 비교문학과에서는 그레마스의 기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간지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Vom Aktantenmodell zur Semiotik der Leidenschaften』 『푸른 장미를 찾아서』 문학의 질서』 『미로의 구조』 『우화의 서사학』 등을 썼고, 『변신/선고 외』 『모던/포스트모던』 『피로사회』 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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