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최초 번역 출간
상태바
한국고전번역원,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최초 번역 출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1.24 2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술 뉴스]
- 한국‧미국‧일본에 흩어져 있던 이본을 수집 정리…총 295편 중 254편 수록
- 정조 시대 지식과 문화를 집대성한 지식인의 비망기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신승운)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의 《고운당필기》를 최초로 번역 출간했다. 유득공은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발해고'의 저자로 유명하다. 박제가·이덕무·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4검서(서적의 교정 등을 하던 벼슬)'로 불렸고, 한양의 진보적 북학파 지식인 모임인 '백탑파'와 '사가시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유득공은 1748년(영조 24)에 태어나 1807년(순조 7)에 타계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혜보(惠甫) ·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 영암(泠庵) · 고운당(古芸堂)이다. 서얼 출신인 그는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에 제수돼 이후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사군지(四郡志)』·『발해고(渤海考)』·『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았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고운당필기》는 유득공의 비망기이자 일기로, 서얼 출신인 그가 정조의 파격적인 인사 정책 덕으로 막 관료가 되었을 때부터 죽기 몇 년 전까지 20여 년의 세월 동안 작성한 약 300편에 달하는 짧은 글을 모은 책이다. 고운당(古芸堂)은 유득공의 호로, 그가 32세가 되던 1779년 규장각 검서에 임용되어 관직에 진출한 후 운동(芸洞), 곧 교서관동(校書館洞)에 거주하였는데 동네 이름으로 당호를 삼고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의 이름 또한 거기에서 따왔다.

이 글들이 이후 《발해고》 《경도잡지》 《이십일도회고시》로 발전했으므로 《고운당필기》는 유득공의 모든 저술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학술적 가치가 낮지 않은 책임에도 다른 저작에 비해 번역이 늦어진 것은 《고운당필기》의 원본이 일제 치하에 조선총독부로 흘러 들어가 일부는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고 일부는 유실되는 등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한국‧미국‧일본 세 나라에 흩어진 여러 이본을 수집하고 대조하여 최대한 원본에 가까운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총 295편 중 미확인된 41편을 제외한 254편을 교감·표점하고 번역하여 교감표점서와 번역서를 출간했다.

유득공은 흔히 역사와 관련해 호명되어 왔지만 실제 그는 역사뿐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 방대한 관심과 열정을 쏟은 인물이었다. 그의 사고가 드넓은 영역에 걸쳐 있었던 탓에 《고운당필기》에 수록된 글들은 그 소재에서는 역사를 비롯해 언어, 풍속, 지리, 문학, 괴담, 동식물과 신변잡기적인 사물까지 아우르고 형식에서는 소설이나 만담부터 시와 역사에 대한 평론까지 겸한다.

예컨대 신라 왕을 논하다가 비둘기의 깃털 종류를 이야기하고, 관직에 등용된 기쁨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함경도의 역사를 읊는 식이다. 그 내용과 형식의 다양성 때문에 어떠한 분야로도 포괄되지 않는 《고운당필기》는 매우 도전적인 독서를 요구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당대의 수많은 지식을 망라하고 단 한 가지도 빼놓지 않으려고 했던 유득공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로써 18세기 후반의 다종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어떤 책보다도 당대의 풍광과 사상을 잘 담아낸 기록이 되었다. 《고운당필기》 외에 비둘기와 동시에 함경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을 또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고운당필기》는 유득공이 쓴 책이지만 얼핏 당대 많은 인물이 공저자로 참여하고 유득공이 이를 편집한 듯 읽히기도 한다. 이는 유득공이 글을 집필할 때 자신의 경험과 생각뿐 아니라 지인이나 동료에게 전해들은 흥미로운 이야기, 자신이 친구와 여가에 나눈 대화 등을 모두 대상으로 삼아 수록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고운당필기》는 한 지식인을 넘어 조선 후기 지식 공동체가 품고 있던 다양하고 풍성한 소재를 갖추게 되었다.

《고운당필기》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물론 유득공과 주로 교류했던 이덕무, 이서구, 박제가 등 실학파 인시들이 주요한 등장인물이나 그 외에 성대중, 김조순, 남공철 등 정치적 입장과 출신이 그와 이질적이었던 인물들도 보이며, 이름을 밝히지 않아 평민으로 추측되는 인물도 있고 청나라 문인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흔히 대중 매체는 편의를 위해 정치적ㆍ신분적 차이로 당대 지식인 집단을 몇 가지 특징으로 조각조각 쪼개어 대립시키고는 한다. 하지만 당대 인물인 유득공이 경험하고 적어 내린 이 글들은 당대의 실제 지식인 집단의 교류와 이로 인한 지식 형성이 그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복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자(漢字)>라는 글에는 순조의 장인이자 세도 정치의 중심인물로 유명한 김조순이 유득공과 한자와 관련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대중 매체가 그를 주로 평면적인 악인으로 그려 온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다.

《고운당필기》에는 학자로서의 의문과 고민이 담긴 글들 사이사이 유득공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소회와 일상 또한 섞여 있다. 200년의 시간을 건너 조선시대 관료의 일상을 들춰 보는 듯한 재미가 책 속 곳곳에 숨어 있다. 젊은 날 숙직하며 온종일 책 읽는 미래를 그리고, 아들 본학이 궐에서 내리는 상을 받자 기뻐하며, 파직되었다 돌아온 후 숙직을 하며 감격에 싸이는 등의 감정은 200년이 더 흐른 지금의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더구나 2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쓰고 모아온 글들이기에 《고운당필기》에는 청년 유득공부터 노쇠한 관리로서의 유득공까지 그의 일상이 차곡차곡 담겼다. 책 초반부 막 검서관에 등용되었던 유득공은 책 후반부에 가면 어느새 규장각 근무 15년을 채워 “머리카락은 벌써 듬성듬성하고 안경을 사용해야 겨우 잔글자를 베낄 수”(287쪽) 있는 장년의 관리가 되어 있다.

그러나 《고운당필기》에서 세월의 흐름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며 유득공의 감정이 가장 짙게 드러나는 대목은 그의 노쇠한 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책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이자 그의 친우 이덕무의 죽음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유득공은 근무 15년을 채운 상으로 숙직하여 필사하는 일을 면제받았는데, 이때 그는 “한스러운 것은 이무관(이덕무)이 벌써 아득히 세상을 떠나 주상이 내려 주신 휴가를 함께 누릴 수 없는 것이다.”(287쪽)라고 이덕무의 죽음을 언급한다. 이는 《고운당필기》를 통틀어 단 한 번 언급되는 지인의 죽음이다. 이런 문장에 드러나는 슬픔을 통해 읽는 이들은 그동안 ‘실학자’ 등의 규격화된 이름 안에만 있던 실제 인물 유득공과 조우하게 된다.

번역에는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김윤조,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김성애,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김종태가 참여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