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명장 乙支文德의 정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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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명장 乙支文德의 정체가 궁금하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1.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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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39)_ 고구려의 명장 乙支文德의 정체가 궁금하다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던 중에 옛 선비들의 시문으로 근심을 달래고자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을 만났다. 그분의 학문적 깊이는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이다. 무엇보다 꾸준하고도 근면한 학문의 자세가 나와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시다.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셔서라고 애써 변명을 하지만 큰 아들인 나는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불편한 마음에 반성의 스탬프를 찍게 한 귀인이 신흠 선생이다. 나는 그분의 올곧되 따스한 성품과 검박한 생활 자세, 부단한 자기 연마에의 의지가 부럽고 존경스럽다. 벼슬을 하면서 자신에게 준엄하고 남은 배려하고 존숭했다. 위인됨이 다른 것이다, 그분과 나는. 동생들과 어쩌다 전화하고 드물게 만나는 나를 무릎 꿇린 건 아래 글을 읽고서다.

“(상촌은) 형제끼리 우애가 있고 친족과 화목하는 것은 지성(至誠)에서 나왔다. 과부가 된 누나와는 30년 동안 함께 살면서 어머니처럼 섬겼다. 그는 궁중의 왕가와 혼인을 맺으면서부터 항상 근신하며 두려움을 가하였다. 맏아들 신익성이 옹주를 맞아들일 때 옛 집이 좁고 누추하다고 하여 해당 관청에 관례에 따라 수리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집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예를 행하기에는 충분하다.” 하고, 끝내 기둥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침실이 있는 처마가 기울어져 집안사람들이 고쳐줄 것을 청하였으나, 그는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빈곤한 생활에도 편안히 살면서 전혀 기호(嗜好)나 욕심이 없었으며, 일찍이 집안일에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산나물에 좁살밥[脫粟飯]을 곁들여 먹어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려 찾아가 만나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와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 일개 한사(寒士)의 집안처럼 쓸쓸하였다.” [『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오래전부터 나는 이름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주변의 실재하는 대상을 알고 있다. 그리고 대상에 명칭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이름은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한다. 이름과 사물에 어떤 결정된 연관성은 없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Poetike)에서 “사물에 이름 붙이기(naming things)”라고 말한 것이 뇌리에 박혀 좀처럼 이름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목민은 대개 복성(複姓)을 사용한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복성을 쓰는 사람은 유목민의 후손인 셈이다. 물론 개명(改名)과 개성(改姓)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소수의 경우는 예외로 해도 좋다.

일찍이 초등학교 다닐 때 살수대첩(612년)으로 유명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에 대해 배웠다.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나라 장수 우문술(宇文述, 547~617년)의 진영에 찾아가 거짓으로 항복하고 적의 상황을 파악한 뒤 돌아와 나중에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살수에 수장시킨 지략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다.

우문선비족인 우문술은 출생지가 탁발선비가 점령해 북방의 기반/거점 지역으로 삼았던 대군(代郡) 무천진(武川鎮) 출신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우문은 선비어로 “동쪽, 동부”라는 의미의 말이다. 우문술은 탁발선비의 위(魏)나라가 쇠락의 길을 가고 있을 무렵 선비족 우문씨가 세운 북주(北周, 557~581) 조정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580년(대상 2년) 위지형(尉遲迥)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효관(韋孝寬) 휘하에서 이를 토벌하고 군공을 세워 상주국(上柱國)으로 임명되고 포국공(褒國公)에 봉해졌으며, 비단 3천 필을 하사받았다고 사서는 전한다.
 
흥미로운 점은 위지형의 어머니가 우문부의 수장으로 북주의 기초를 닦은 태조 우문태(507~556)의 누이인 창락대장공주이며, 위지형 본인은 우문태의 딸 금명공주와 결혼해 우문집안의 부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위지씨 집안과 우문씨 집안은 손에 손잡고 사돈이 되어 세력을 키운 것이다. 이런 혼인동맹은 국가와 국가는 물론 가문과 가문 간에 흔히 이루어진 일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우문씨와 위지씨의 경우를 떠나 선비족의 나라 수 황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주를 무너뜨리고, 정확히는 북주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양을 받고, 수(隋)를 건국한 초대 황제 문제(文帝, 541~604, 재위: 581~604) 양견(楊堅)은 소자(小字)가 나라연(那羅延, 산스크리트어로 ‘금강불괴金剛不壞’라는 뜻이라고 함)이고, 선비족으로서의 성은 보륙여(普六茹)다. 보륙여씨(步六茹氏), 보륙여씨(普陸茹氏) 또는 보루여씨(普陋茹氏)라고도 적는다. 양(楊)이라는 성은 부친인 양충(楊忠)이 서위(西魏) 공제(恭帝) 탁발곽(拓跋廓)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선비어로 보륙여가 ‘버드나무’라는 뜻을 지닌 데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시호가 문제인 양견의 선비족 풀네임은 보륙여견(普六茹堅)이다. “버드나무 집안의 다이아몬드처럼 야무진 사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들 선비족의 성씨는 나중에 여씨(茹氏)로 바뀌었다.

궁금해서 버드나무를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를 찾아보았다. Vetasa(वेतस)가 영어 goat willow에 대응되는 산스크리트어였다. 인도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의 대표적 의서 중 하나인 카라카(Caraka)의 까라까삼히따 수트라스타나(Carakasaṃhitā sūtrasthāna ) 27장에 따르면 인도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베타사라는 이 식물의 일부를 채소처럼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식물의 이명이 7개나 되었고, 그 중의 하나인 Vañjula가 한자어 普陸茹의 중국어 병음 /pu lu ru/와 비슷한 소리값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확한 건 아니다.

을지문덕 또한 그의 성이 을지(乙支)라는 복성(複姓)인 것으로 보아 유목민이라고 짐작된다. 을지문덕은 『隋書』와 『北史』에는 乙支文德이라고 적혀있는데, 『資治通鑑』 권 181 考異篇은 『革命記』에 尉支文德(위지문덕)으로 기록되어있다고 전한다. 또 『太平御覽』 卷 第324에는 “髙麗國相 乙亥文德(을해문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을지를 위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을 선비족의 별종인 尉遲氏(위지씨) 부족 출신의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위지씨는 선비족의 별종이 아니다. 북위를 세운 선비족은 탁발부 선비로 이들에게 복속한 100여 개 부족들 중의 하나가 서방의 호탄을 지배하던 위지씨(尉遲氏)였고 이들은 후일 위씨(尉氏)로 성을 바꾼다.

문헌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볼 때 늦어도 6세기 이전부터 10세기까지 지금의 중국 서부 신장성 위구르 자치주의 서쪽 호탄이라는 불교 왕국을 지배하던 왕조인 비자야(vijaya)를 중국사서는 위지(尉遲)로 표기하였다. 비자야라는 말로 보아 위지왕조는 인도계 혹은 티베트계로 추정된다. 비자야는 범어로 승리라는 말인데 티베트에서도 동일하게 쓰인다.

호탄이라는 서역의 성곽도시를 지배하던 위지씨 집단은 기원전 2세기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해 서방으로 이주하던 월지의 한 무리였을 것이다. 을지문덕 집안은 서쪽이나 남쪽이 아닌 동방으로의 이주를 감행한 월지의 또 다른 무리였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 마한(馬韓)에 속했던 54개 소국 중에 월지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상당수가 유목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아마도 부족국가였을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이 소국들 중에 월지(月支), 백제(伯濟)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역시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된 혼성국가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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