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와 함께한 화려했던 시절의 흔적들…내륙의 포구 나주 영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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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와 함께한 화려했던 시절의 흔적들…내륙의 포구 나주 영산포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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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전남 나주 영산포
▲ 영산강 영산포. 영산포 등대는 근대 문화유산이 되었고 황포돛배는 유람선이 되었다. 포구 너머 옛 선창 거리는 홍어집들 가득한 홍어의 거리다. 2. 등록문화재 제129호인 영산포 등대. 19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유일한 내륙 등대다.
▲ 영산강 영산포. 영산포 등대는 근대 문화유산이 되었고 황포돛배는 유람선이 되었다. 포구 너머 옛 선창 거리는 홍어집들 가득한 홍어의 거리다. 2. 등록문화재 제129호인 영산포 등대. 19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유일한 내륙 등대다.

흡. 숨을 멈춘다. 강바람도 이길 수 없다, 홍어의 향. 매운 겨울바람보다 더 맵다. 강변마을 가겟집들이 모두 홍어집이다. 가겟집 문이 열릴 때마다 알싸한 향은 더 진해진다. 여기는 전남 나주의 영산포다. 영산강 둑길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홍어거리가 흥성하다. 영산포는 고려 말부터 600년 이상 흑산도 홍어가 거래되어 왔다고 한다. 긴 뱃길에 흑산도 홍어는 상해버렸고, 상해서 만들어진 알싸한 맛과 향기에 도로 반해 부러 삭혀먹게 된 것이 영산포 홍어다. 그러니까 홍어의 산지는 흑산도, 삭힌 홍어의 산지는 영산포인 게다.

▲ 영산포 홍어의 거리. 전문 음식점과 도매점이 수 십 곳이다.
▲ 영산포 홍어의 거리. 전문 음식점과 도매점이 수 십 곳이다.
▲ 영산포 홍어의 거리. 전문 음식점과 도매점이 수 십 곳이다.
▲ 영산포 홍어의 거리. 전문 음식점과 도매점이 수 십 곳이다.

영산강은 전남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 나주, 영암을 거쳐 목포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총 길이 122km에 이르는 우리나라 4대강 중의 하나다. 그 큰 물길 가운데에 영산포가 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강 포구다. 옛날에는 예까지 바다가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수많은 배들이 밀물과 썰물을 타고 드나들었다. 고려 때 이미 조창이 설치될 정도로 주변의 산물이 모여들기 좋은 땅 자리, 강 자리였다. 산물은 산처럼 쌓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32년의 기록에는 이 고을을 ‘남방의 대목’이라 했다. 영산포에는 국영창고인 영산창이 있었고, 조선 중종 때 영광 법성창이 생기기 전까지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이 이곳에 모였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산포에는 남도의 숱한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홍어와 소금 등 온갖 해산물들이 산을 이뤘고 다시 내륙의 대처로 팔려나갔다.

▲ 영산교. 효과적인 미곡 수탈을 위해 일제가 놓은 것으로 다리너머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1999년에 새로 건설된 것이지만 여전히 그 뿌리는 1914년에 있다.
▲ 영산교. 효과적인 미곡 수탈을 위해 일제가 놓은 것으로 다리너머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1999년에 새로 건설된 것이지만 여전히 그 뿌리는 1914년에 있다.

배들은 대부분이 거룻배였다. 그 사이를 위풍당당 헤치고 등장한 것이 황포돛배다. 목포에서 출발한 황포돛배가 영산포까지 오는 데는 세 물 때가 걸렸다. 세 번의 밀물을 타고 달렸고 그 사이 두 번의 썰물 때는 멈춰야 했다. 서른 시간의 항해였다. 목포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빠른 두 물 때, 18시간이 걸렸다. 1897년 목포가 개항되면서 일제는 일찌감치 영산포에 주목했다. 1904년 나주나 광주보다 먼저 헌병대가 설치되었고, 우체국과 주재소가 들어섰다. 그리고 목포와 영산강을 오가는 최초의 동력선 ‘평남환(平南丸)’을 취항시켰다. 자국민 수송과 미곡 반출을 위해서였다. 배의 운항 시간은 5-6시간. 동력선이라는 혁신적인 운송수단의 등장과 함께 영산강의 황포돛배는 모두 사라졌었다.

▲ 등록문화재 제129호인 영산포 등대. 19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유일한 내륙 등대다.
▲ 등록문화재 제129호인 영산포 등대. 19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유일한 내륙 등대다.

1914년에는 영산포 옆에 개폐식의 나무다리가 놓였고, 1915년에는 다리와 직선으로 연결된 영산포역이 영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등대가 세워졌다. 유일한 내륙 등대인 영산포 등대다. 등대는 밤을 밝혔고, 수위를 재는 역할을 했다. 목교는 1933년 철근콘크리트 다리 ‘영산교’로  바뀌었다. 1972년 영산대교가 놓이면서 영산교는 ‘영산포구다리’로 불린다. 구다리는 1999년 새로 놓였지만 여전히 구다리다. 다리에서 강과 포구와 돛배와 등대가 훤하다. 자전거길 시원히 달리는 둑길 너머 포구 마을도 한눈이다. 강도 조용하고 길도 조용하다. 더 빠르고 더 편리한 교통수단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가져왔고,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의 건설은 영산포에 완벽에 가까운 고요를 선사했다. 1976년 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었다. 1977년 이 포구에서 마지막 배가 나갔다. 1978년 강 하구에 둑이 착공되었다. 이렇게 영산포는 유통의 중심에서 퇴역했다. 지금은 재현된 옛 황포돛배 유람선만이 강 물살을 가른다. 

▲ 영산포 홍어거리 뒷골목에 자리한 죽전거리. 장날 땔감장수들이 허기를 메우던 죽집이 늘어서 있었다.
▲ 죽전거리에서 만난 영산포 등대의 옛 모습. 등대는 1989년까지 영산강의 수위를 관측하는 역할을 했다.

홍어거리 뒷골목에는 ‘죽전거리’가 있다. 죽집이 늘어서 있던 거리다. 영산포 사람들은 늘 땔감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날이면 나뭇단을 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이 죽전거리에서 허기를 메웠다. 지금 죽전거리에 죽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거리는 텅 비었다. 홍어거리와 죽전거리를 포함해 영산포의 영향권에 속하는 마을은 이창동과 영산동이다.  일제강점기 이 일대는 소위 ‘재패니즈 타운’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거리를 원정(元町)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옛 분위기가 남아 있다. 미로 같은 골목 속에 낡고 허름한 일본풍 건물이 군데군데 보인다.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 바로 영산포 마을이다. 일본인 대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도 남아 있다. 뱃길이 끊기면서 상권은 죽었다. 그리고 1989년 여름의 대홍수, 그 무지막지한 비에 저지대의 집들은 모두 휩쓸렸다. 젊은이들은 대처로 떠났고, 그 많던 적산가옥들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거리였던 원정(元町). 많이 변했지만 군데군데 옛 분위기가 남아 있다.
▲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거리였던 원정(元町). 많이 변했지만 군데군데 옛 분위기가 남아 있다.

영산포는 읍이었다. 영산포는 나주보다 목소리가 컸다. 나주와 영산포의 통합 논의가 있었을 때 ‘영라시’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부독재시절이었던 1981년, 시로 승격된 도시의 이름은 나주도 영산포도 아닌 금성시였다. 금성은 통일신라시대 나주의 지명이다. 영산포는 한동안 ‘금성의 남쪽, 남금성’으로 불렸다. 1986년 금성시는 다시 나주시가 되었다. 지금 영산포라는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곳은 영산포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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