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와 식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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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와 식인종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 승인 2021.01.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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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 미셸 에켐 드 몽테뉴(1533~1592) 철학자, 사상가, 수필가
몽테뉴(1533~1592)

학창 시절 떠오르는 노교수의 이미지와 요즘 정년이 되어 대학을 떠나는 퇴직 교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강의와 연구 능력은 물론 외모도 50대에 가까운데 정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교수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퇴직 이후의 삶의 방식에 대해 물어보면 책읽기와 글쓰기, 운동이라는 대답이 많이 돌아온다. 반면에 37세에 퇴직을 한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마흔이 되어 이미 ‘노년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말했다. 18세기 인물인 장 자크 루소는 이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인 50세에 이르자 죽음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다만 몽테뉴는 노화 과정 자체가 죽음의 준비 기간인 까닭에 ‘죽음은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고, 루소는 죽음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자신의 ‘최고의 저서’가 세상의 몰이해와 곡해로 가치가 실추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퇴직 이후에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몰두했다. 특히 몽테뉴는 ‘명상과 독서를 통해 온전한 자신을 찾기 위한 활동’으로 그의 저서 『수상록Essais』을 쓰기 시작했다.

몽테뉴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인 『수상록』의 주제는 ‘노화와 죽음’, ‘올바른 삶의 태도’, ‘자신에 대한 경계와 성찰’, ‘지식의 올바른 수용 자세’ 등으로 다양하다. 이미 몽테뉴를 읽었고 이런 주제에 익숙한 독자에게 『식인종에 대하여 외 Des cannibales』(책세상, 2020)는 저자의 인간에 대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성찰을 보여준다. 『수상록』 1권 31장에 수록된 ‘식인종’에 관한 이 글은 조금은 낯설지만, 동시대의 유럽인들이 ‘야만인’ 혹은 ‘미개인’이라고 불렀던 신대륙의 원주민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 자연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 등을 보여준다.

몽테뉴는 신대륙에 가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원주민의 삶 속에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은 없으며, 우리는 관습에 없는 것을 야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유럽인들은 자신의 사고방식과 관습, 관찰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야만’으로 부르는데 그들은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판단할 척도를 애초에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몽테뉴는 자연이 발전하면서 이룩한 성과인 ‘야생’을 문명인의 ‘기교’가 타락시켰다고 생각한다. 이는 ‘강자의 법칙이 적용될 수 없고 불평등의 악에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인 태초의 인간이 사적 소유와 우월성의 욕구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의 순수성을 상실하여 타락했다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몽테뉴가 루소와 레비스트로스 이전에 ‘야생’ 혹은 ‘야만’에 대한 이 같은 견해를 말했다는 것 말고도 그가 유럽 이외의 대륙에 가본 적이 없으면서 오직 기록과 여행자들의 전언만으로 인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단문으로 이루어진 삶에 대한 짧고 굵은 성찰이다. 「식인종에 대하여」에도 격언에 가까운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그는 ‘야생’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순박한 상태로 보면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나 우연이 만들고, 가장 못나고 불완전한 것은 인간의 기술이 만든다”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신대륙 사람들의 뛰어난 점을 평가한다. 또한 유럽인들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야말로 모든 야만스러움에서 그들을 능가한다”고 고백한 뒤, “그들은 본디부터 필요한 것 이상을 욕심내지 않는 행복한 상태에 있다”며 자연 상태의 인간의 우월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인들이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이른바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데 일조한 그들의 식인풍습이 궁금해진다. 식인풍습은 신대륙을 침탈한 정복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까? 그렇지는 않다. 식인종에 대한 유럽인들의 두려움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도 잘 나타나 있을 정도이다. 다만 신대륙 원주민들의 식인풍습은 그들의 야만성이나 식량의 부족이 원인이 아닌 전쟁에 따른 일종의 의식으로 보인다. 포로로 잡힌 적의 인육을 먹는 행위는 적에게 공포심을 주고 그의 살을 통해 죽은 뒤 잡아먹힌 동료와 조상의 살을 다시 먹는 의식으로 간주된다. 몽테뉴는 그들의 행위를 ‘야만’으로 보지 않으며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깨달을 따름이다. 오히려 다음 장인 「마차에 대하여」에서 스페인 정복자들과 식인풍습이 있는 ‘야만인’들 가운데 누가 더 잔인한지 묻고 있다. 특히 정복자들이 선교 목적으로 신대륙에 들어갔다면 황금이나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음으로써 신앙을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직 퇴직을 생각하기는 이른 나이지만 비대면 수업으로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감염증 시대에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이 없다면 몽테뉴처럼 명상과 독서로 퇴직 이후를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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