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흥망(天下興亡)에 필부(匹夫)도 유책(有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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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흥망(天下興亡)에 필부(匹夫)도 유책(有責)이라!
  • 윤대식 한국외대·정치학
  • 승인 2021.01.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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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유인석 평전, 자존(自尊)의 보수주의자』 (윤대식 지음, 신서원, 340쪽, 2020.11)

2020년을 관통했던 팬데믹은 여전히 그 위험성이 가라앉지 않고 있지만, 다시 깨닫게 된 것은 전염병의 위험만이 아니었다. 무식함과 오만함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 역시 팬데믹이 가져온 역설적인 효과였다. 또한 그것은 150년 전 우리에게 열패감을 안겨주었던 외부 실체를 정확히 알게 하는 계기였고, 이제야 비로소 그 열패감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역사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 진입은 세계사와 일국사의 접점을 가져온 충격적인 계기였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이 모두 19세기 말부터 본격화한 서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침탈의 흐름에서 무력에 의한 전쟁과 개항을 경험함으로써 근대화=서구화=강제로 기억에 각인되어 있고, 그때 경험했던 패배감과 열등감은 현재까지도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패배감과 열등감이 먼저 각인되었던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자신들이 겪었던 트라우마를 그대로 우리에게 식민지 근성으로 이식했고, 현재까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기비하와 오해의 씨앗을 남겨주었다. 그랬던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허상이었고 허위의식이었음을 자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이번 팬데믹의 역설이라고 할 것이다.

과연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혹시 현재 우리가 팬데믹에 대처하면서 보여준 저력과 성공에 도취되어 소위 ‘국뽕 한가득’ 자화자찬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동안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서구’에 대한 동경과 숭배로 일관했던 식민지 사대근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해서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은폐할 목적으로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치부하려는 격렬한 반응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간 수세에 몰렸던 전통과 민족을 편들거나 붙잡고 있던 자들 입장에서 오랜만에 기를 펴고 외치는 의기양양함에서 비롯한 비아냥은 아닐까? 무엇이든 이러한 의구심이나 평가는 일고의 가치도 없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 진행 동력과 방향성이 보편사의 방향 및 과제와 궤를 같이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 나갔음을 현상을 통해 증명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 진입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과제인 ‘자주적 근대화’라는 목표가 이제 그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예단하게 한다. 이 점에서 현재 팬데믹이라는 동일한 조건 아래서도 어느 선진국보다 더 효과적이고 일관된 국가 방역시스템을 가동하고 있고, 전 국민이 높은 공동체 의식과 자존감을 가지고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동안 우리보다 더 우월한 문화 수준과 교양, 현명함으로 인류의 운명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선진국의 실체와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난 상황을 보면서 근대 이후 우리가 가졌던 그들에 대한 경외감과 열패감 모두가 더 이상 의미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판단이 일정 부분 타당하다면, 『유인석 평전, 자존(自尊)의 보수주의자』의 소개는 시의적(時宜的)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적 근대화’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주’에 해당하는 근대화의 주체로 ‘누가’와 ‘어떻게’의 문제에서 문명개화론자와 위정척사론자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후 두 경로가 망국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와 친일노선으로 다시 분기했던 과거 근대화를 둘러싼 고뇌와 혼란이 이제 하나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위정척사론자들이 민족주의자로 나아갔다거나 문명개화론자들이 친일파가 되었다는 대중적 편견이나 도식화된 역사이해를 제시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근대로 진입한 후, 근대화를 둘러싸고 당대 정치지형과 지적 지형에서 위정척사파로 알려진 일군의 전통 지식인들은 정학(正學)으로서 성리학의 인식론적 기반 위에 그 정점에 국왕이 위치하는 전통질서를 재정비하는 위정(衛正)을 외쳤고, 근대화=서구화로 인식한 외부대상에게 위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척사(斥邪)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당대에도 후대에도 수구주의자들로 비난받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개화를 괴로워한 자’(疾開化者)로 규정했다. 왜냐하면 나라가 망한 것은 자신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동시에 근대화의 흐름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팬데믹은 그들이 그렇게 괴로워했던 근대화를 우리가 제대로 된 역사 방향으로 진행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시기 자신의 책무를 자임하고 삶을 책무이행에 바쳤던 한 인물에 대해 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이해와 평가를 시도한 평전(評傳)이다. 앞서 지적했듯 한국의 역사는 그 특수성만큼 보편성을 함께 하고 있으며, 그 접점에서 역사의 분절기를 맞이했다. 그때마다 접점에서 발생한 교착상태를 돌파하려는 집단적 성찰과 실천적 행위자들의 출현을 찾아볼 수 있고, 이들이 시대적 요구를 자신의 책무로 자임하고 이행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단계로 진입했다. 본 평전은 이렇듯 책무에 대한 각성을 통해 자신의 삶이 전개되는 세계를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정치 주체로 재탄생한 존재를 정치지성(政治知性)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본 평전은 정치지성의 삶이라는 프레임으로 유인석이라는 인물과 그가 처했던 근대 진입 시기 ‘자주적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그가 자신의 책무를 어떻게 각성하고 실천했는지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지성의 삶이라는 프레임을 적용할 경우, 유인석이 당대 위정척사를 상징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자임한 책무의 실질이 자존(自尊)의 보수(保守)에 있었음을 재조명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본 평전은 정치지성으로서 유인석의 삶을 크게 정신의 삶과 활동의 삶 두 부분으로 나누어 양자의 정합성 여부를 타진하고 정합의 양상을 빛으로, 부정합의 양상을 그림자로 비유하여 그 양면성을 통해 인간 유인석과 정치지성 유인석 모두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본 평전은 유인석의 삶을 ‘역사 속의 창조와 긴장’ - ‘민족과의 창조와 긴장’ - ‘창조와 긴장의 빛과 그림자’라는 세 국면으로 분류하여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과 활동 간 정합성이 빛과 그림자를 교차하며 표출되었음을 분석했다.

먼저 제1부 ‘역사 속의 창조와 긴장’은 부제를 ‘위정과 척사의 빛과 그림자’로 하고 있다. 그것은 위정척사의 개념 정의를 위해 역사적 기원을 소급하여 현실정치의 이념적 도구로 변질되어 갔던 과정을 추적하고, 근대 진입 과정에서 다시 위정척사론이 출현했던 사실을 소개한다. 특히 정조(正祖) 시기 위정척사의 의미가 군주의 정통성과 권위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기원을 전제로, 고종(高宗) 시기 위정척사론의 출현을 권력의 사사화라는 세도(勢道) 정권과 대원군 간 정치적 교집합이었다고 결론짓고 고종의 친정이야말로 내외문제의 일원적 해결기제로서 위정=척사를 정의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를 둘러싼 내외의 도전에 응전하는 정치적 각성과 주체로서 위정척사파가 등장했고, 이항로의 문하에서 위정척사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한 종장으로서 유인석의 정신의 삶을 소개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이 맹목적으로 기존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수하거나 수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중화로서 자존심과 더불어 도덕문명으로서 중화질서 보존이라는 사대의 이념 간 균형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제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인석의 화이관=소중화관=존화양이관은 화맥 단절 가능성이 커졌다는 위기의식으로 전환되어 의병투쟁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다. 즉 화맥 계승과 보존이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라는 자임 의식으로 인해 유인석의 거의(擧義), 즉 의병투쟁은 역사적 필연으로 정당화되었고 그 동기야말로 소중화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유인석의 정신의 표출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유인석의 이분법적 화이관은 정正=중화=조선=군주=고종의 보수와 사邪=이적=서양=일본=대원군의 배척이라는 명확한 대립 구도를 드러냈지만, 그 사이에 ‘민족’이라는 요소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던 사대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의암 유인석(1842.1.27~1915.1.29)
의암 유인석(1842.1.27~1915.1.29)

다음으로 제2부 ‘민족과의 창조와 긴장’은 부제를 ‘복수와 망명의 빛과 그림자’로 하는데, 유인석의 활동의 삶으로서 거의(擧義)로 압축되는 의병무장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유인석의 각성은 필연적으로 실천으로 전개되었고, 그 방아쇠는 명성왕후 시해와 갑오경장에 의해 촉발되었다. 복수보형(復讐保形)의 슬로건을 내건 유인석의 거의는 처변삼사로 알려진 수의-거의-자정의 선택 중 하나였지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 경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해서 공적 책무를 사적 보존에 우선한 정치적 각성에서 비롯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단적인 사례로서 국모와 모친의 상복을 동시에 입어야 하는 딜레마에서 그가 취한 국모 상복은 공적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빛을 상징하고, 동시에 복수를 우선으로 보형하려는 척사=위정이라는 양상을 ‘마땅한 선택’으로 하고 있다.

반면 의병무장투쟁은 고종의 개혁의지와 선유에 반하는 사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그림자를 반영하고, 주리론적 세계관의 보수로 말미암아 내부 투쟁역량의 분열을 가져와서 패배의 어둠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의병무장투쟁의 실패로 끝난 유인석의 거의와 행보는 3차례에 걸친 요동과 러시아 망명으로 전개되면서 자존보다 사대로의 경도, 거의에서 수의로의 소극적인 선회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듯한 그림자의 모습으로 평가될 여지를 안게 된다. 여기에서 유인석의 정신이 여전히 거의와 의병투쟁의 의지를 지속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외의 근거지 구상과 천하와 국가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고염무의 인식을 계승하고 있는 그의 근대적 책무의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해외로부터 국내진공을 시도한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되었던 사실 자체가 유인석의 책무의식과 의병무장투쟁의 진의가 인정받았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 ‘긴장과 창조의 빛과 그림자’는 부제를 ‘창조적 재탄생의 경로’로 한다. 그것은 유인석의 정신과 활동의 삶이 시대적 조건과 요구에 정합한 결과 공적 책무의식이라는 정신적 보수와 함께 변화에 응전하는 정치적 재탄생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한 후 유인석의 거의는 투쟁역량의 조직화를 위한 <의병규칙>과 <관일약>의 제시를 통해 해외 투쟁세력들을 통합하는 인적, 정신적 네트워크 구축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13도의군의 탄생과 도총재로 추대됨으로써 무장투쟁의 상징성과 연속성을 확보했지만, 망국으로 인해 중도에 좌절하고 말았다. 따라서 망국의 현실조건 하에 투쟁의 전술적 변환을 요구받으면서 해외 독립운동은 계몽과 무장투쟁으로 분기했고, 응집했던 해외 투쟁세력의 분열과 이탈로 인해 유인석 자신도 앙모했던 공자의 삶과 같이 지식인의 무력함에 놓이게 된다.

더욱이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을 통해 탄생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은 유인석에게 도덕문명으로서 중화질서에 대한 습격과 같은 충격을 주었고, 안중근의 의거 이후 러시아의 후원 역시 감퇴하면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이산(離散)에 대한 우려를 암시하는데 이른다. 이로부터 유인석의 정신과 활동의 삶은 사상적 전환과 정치적 재탄생의 경로를 밟는다. 즉 망국의 현실을 극복하는 과제는 일국사의 특수성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삼국의 공동운명이라는 보편성과의 접점에서 해결단서를 찾아야 하며, 유인석의 정신은 한·중·일 삼국이 중화의 도덕문명을 보존해야 하는 동일한 책무에 놓였다는 인식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인석이 제기하는 ‘동양삼국연대론’은 일본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파격성을 보이는데, 그것은 ‘중국’의 관념 역시 더 이상 ‘중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문명의 담지자’라는 자임한 책무의식에 따른 일관된 결론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유인석의 활동의 삶은 ‘도덕문명의 보존’이라는 동양삼국의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책무이행의 주체를 ‘민족’으로 확장할 단초를 마련하고, ‘민족’을 도덕문명으로서 중화질서의 재창조를 책무로 하는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시킨다. 이를 위해 유인석은 단군신화의 프레임으로 민족의 기원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민족주의의 계보를 창조하고, 그것을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의의로 정당화했던 것이다.

본 평전은 역사에 대한 재인식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질서의 재창조라는 과제를 출발시켰던 유인석의 정신의 삶이 활동의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새로운 질서의 주재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어떻게 실천하려고 했는지, 또한 서서히 그 책무의 범위를 기존의 공적 주체로부터 외연을 확대하여 ‘민족’이라는 하나의 실체적 관념으로 어떻게 정립해 나갔는지 타진한 것이다. 만약 유인석을 공적 가치와 동기 그리고 목표를 ‘생각했던’ 정치지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그 실질은 유인석의 정신의 삶과 활동의 삶이 정합되어 가는 경로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이고, 반면 그 경로에서 작용하는 원심력에 의해 일탈되어질 위험성이 있었다면, 유인석이 이를 어떻게 자신의 삶에 반영하려 했는지 여부에 의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민족주의가 투사하는 빛과 그림자의 실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윤대식 한국외대·정치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대 중국의 유·법가 정치철학 및 한국 근현대 정치지성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교양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역서로는 ≪상앙, 이목지신을 지킨 아이언 맨≫(신서원, 2020), ≪일지록≫(지만지, 2019, 역서), ≪건국을 위한 변명: 안재홍, 전통과 근대 그리고 민족과 이념의 경계인≫(신서원, 2018), ≪상군서≫(지만지, 2018, 역서)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순자의 새로운 군주: 선왕의 재현으로서 후왕의 창조>(2020), <순자 속 성인(聖人)에서 성왕(聖王)으로>(2020), <순자를 위한 변명>(2019), <사기, 제국(帝國)의 정의로움을 위한 변명>(2019), <관중(管仲)의 국가 책무 기획 : 온정과 통제의 경계 짓기>(2017), <경세가 관중(管仲)과 텍스트 ≪관자≫(管子) 사이>(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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