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넘어 희망으로 -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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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 희망으로 -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1.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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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지난 학기 ‘말하기와 토론’이라는 수업에서 한 학생이 ‘범죄 행위 형벌에서 선처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제로 개인 발표를 했다. 10분 안팎 이어진 발표에서 학생은 합의에 의한 감형, 심신미약이나 초범 등 범죄 상황을 고려한 감형, 가해자의 반성에 바탕을 둔 감형 등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짚으며 엄정한 법 집행을 강조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선량한 시민과의 형평성이 주된 근거였다.
 
청중인 학생들은 수업 중 질의에서도, 수업 후의 댓글 비평에서도 충분한 공감을 표현했다. 당시의 사회적 이슈였던 조두순 사건도 등장했다. 학생들은 범죄에 비해 너무 짧았던 복역 기간에 대해, 출소 후 본래 동네로 돌아와 오히려 피해자가 떠나야 했다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골목에서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요?”라고 반문하면서.

나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학생이 느끼는 울분을 납득하면서도 형벌의 의미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형벌을 주는 것은 교화의 과정을 거쳐 다시금 사회의 일원으로 되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생활고로 범죄를 저지른 가장이 있다고 하자. 선처 없이 구속해 형벌을 가한다면 결국 그 가정은 파탄이 나고 가족들이 절도나 사기 등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게 되어 결과적으로 선량한 피해자가 더 많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겨울방학이 되어 읽게 된 『타인에 대한 연민』은 분노, 증오, 혐오 아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흥미롭게도 갓 태어난 아기 시절에 존재한다.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엄마와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하는 아기는 혹시라도 관심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점차 스스로 욕구를 해결하고 환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아기는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해간다. 하지만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두려움 때문에 차별하고 시기하고 배제한다.

▲ 저자 Martha Nussbaum과 원서 The Monarchy of Fear
▲ 저자 Martha Nussbaum과 원서 The Monarchy of Fear

이 책의 원제는 『The Monarchy of Fear』로 그대로 번역하면 ‘두려움이 장악한 나라’ 정도가 될 것이다. (번역서 제목을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정한 출판사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이 책에서 ‘연민’이 주된 개념으로 등장하지는 않아서 그렇다.) 이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저자 누스바움은 2016년 11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충격을 받고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인들의 두려움, 그 두려움에서 나온 분노와 증오가 빚은 결과라 파악했던 것이다.

두려움이 어떻게 우리를 분열과 반목으로 이끄는지 설명하던 이 책의 종착점은 ‘희망’이다. 근거 없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는 희망, 보복이 아닌 변화를 위해 분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혐오를 멈출 수 있다는 희망, 모든 인간이 존엄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받게 된다는 희망. 맥 빠지는 결론이 아니냐고, 도대체 뭘 믿고 희망을 가지느냐는 물음이 절로 생겨나는 지점에서 저자는 말한다. “희망은 선택이고 현실적인 습관이다.”라고(260쪽).

어차피 안 될 거라고, 두려움과 분노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빛을 잃는다. 변화를 시도할 이유가 없으니 목숨 붙어 있는 동안 그냥저냥 숨 쉬며 살아갈 뿐이다. 이런 삶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형벌에 선처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다. 선처받아 가벼운 형벌을 받은 가해자는 반성 없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형기를 마치고 나온 사람에 대해서도 확대 가능하며 낙인과 차별, 혐오로 이어지게 된다. 이 상황의 종착점도 희망이리라. 형벌을 감내한 가해자는 다시금 존엄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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