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연 교수의 『공자와 미국의 건국』(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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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연 교수의 『공자와 미국의 건국』(상·하)
  • 이지윤 서강대·정치사상
  • 승인 2021.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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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서평_ 『공자와 미국의 건국(상·하)』 (황태연 지음,  넥센미디어, 각 912쪽/864쪽, 2020.07)

지난 30여 년간 서양정치사상은 물론 한국정치철학과 동양정치철학을 폭넓게 연구해온 동국대학교 황태연 교수가 2020년 공자와 미국의 건국(상‧하)을 출간했다. 이 책은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공자철학과 유교문명의 서천을 집중 탐구한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1, 2)(2019), 17-18세기 서구 각국의 공자수용과 계몽철학의 전개를 탐구한 세 개의 저작 17~18세기 영국의 공자숭배와 모럴리스트들(1, 2)(2020), 근대 프랑스의 공자 열광과 계몽철학(2020), 근대 독일과 스위스의 유교적 계몽주의(2020)”에 이은 “5부작 전8권의 종결편”(17)이다. (이하 공자와 미국의 건국에서 인용할 때는 본문 괄호로 쪽 수를 명기한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전8권으로 출간된 이 저작들은 본문만 5,3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방대한 분량이며, 15년간에 걸친 연구의 결실이다. 한국정치사상학회는 매년 말 그해에 회원들이 출간한 책들의 학술적인 의미를 되새기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서평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는바, 2020년에는 공자와 미국의 건국을 다루었고, 이 글은 사상학회의 서평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 글이 작성된 경위를 밝히는 것은, 이 글이 황태연 교수의 방대한 저작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을 미리 알려두기 위해서이다. 황태연 교수는 이 저작에서 공자철학과 중국의 정치문화가 서구의 계몽주의는 물론 미국 건국의 사상적 기원을 이룬다는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논쟁적인 주장을 비판적이고 생산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공자철학, 서구 계몽주의 사상, 미국 건국의 이념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지닌 타당성은 물론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사유가 서구 사상의 기원을 동양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귀결된 해석 방식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종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서평자가 그럴만한 역량을 갖추지도 못했거니와, 한국정치사상학회의 서평 토론도 여러 토론자가 주제를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이 서평은 황태연 교수가 공자철학의 ‘서천’을 입증하는 방식에 대한 ‘내재적’ 비판에 집중했다. 즉, 황태연 교수의 저작에서 강한 주장(‘서구의 유교화’)과 온건한 주장(‘상호 패치워크’)을 구분하고, 황태연 교수의 온건한 주장을 빌어 강한 주장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읽기는, 황태연 교수에게는 자신의 체계를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황태연 교수의 주장에 비판적인 독자에게는 비판의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 저자에 따르면, “미국은 공자철학과 중국의 정치문화를 추종하는 국부들의 주도로 …… 사상 초유의 …… ‘유교적 민주공화국’으로 완성”되었다(1645). 이런 미국의 건국과 확립은 “1550년부터 개시된 유교문명과 공자철학의 서천으로 일어난 계몽주의와 서구문명의 유교적 근대화의 완결”(1645)이다. 즉, “공맹과 중국의 본연적(자연적) 자유와 평등의 이념과 제도”는 “25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서양으로” 전해져 “서양의 사상계를 석권했던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자들을 산출”했으며, “이 긴 세월 동안 공자의 본연적 자유와 평등 이념은 … 실종되기도 하고 다각적으로 왜곡되고 삭감되고 뒤틀리고 박해받기도” 했지만(1199), “공자철학과 중국의 유교적 정치문화를 음양으로 수용함으로써 미국을 서양제국에서 예외적인 나라로 만들려고 작정”(533)했던 국부들은 “신대륙에서 중국의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를 “최초로 왜곡과 삭감 없이” “거의 온전하게 실현”했다(1199).

이 강력한 주장과 함께 저자는 서구의 계몽주의와 미국의 건국이 “패치워크(접붙이기와 짜깁기)”(22)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언급한다. “서구 계몽주의는 공자철학과 중국정치문화를 전통적 서양 사상과 뒤섞고 접붙이고 짜깁기해서, 즉 ‘패치워크’해서 형성된 것”이며, 미국의 국부들 역시 “서구적 계몽주의자로 성장”했지만, 공자철학과 극동의 유교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수용했다(61).

본문만 1,653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은 “상호 패치워크”(21)의 작용이 기실 “서구의 유교화”(1229)였음을 치밀하게 입증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증 과정은 이질적인 사상의 접합 혹은 융합을 통한 새로운 혼종성의 출현을 함의할 수도 있는 ‘상호 패치워크’를 유교적 기원의 일방적 수용 혹은 비대칭적인 패치워크로 읽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서구에 미친 유교의 영향’이라는 온건한 주장과 ‘서구의 유교화’라는 강한 주장 사이의 간극을 저자가 어떻게 메우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저자가 ‘서구의 유교화’라는 강한 주장의 근거를 이루는 해석 방법을 정리한 후, 그에 대해 저자 자신의 글을 바탕으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을 제시하겠다.

2. 저자는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서구 사상가들이 중국의 정치‧사회‧경제 제도나 공자‧맹자를 직접 언급한 것을 통해 ‘서구의 유교화’라는 본인의 주장을 입증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1202). 공자철학과 극동의 유교문화를 수용했던 초기 사상가들은 “사활을 건 ‘정통‧이단 논쟁’” 속에 있었다(1202). 심지어 “공공연한 공자숭배자”(544)였던 프랭클린도 자신의 자서전에서조차 공자가 자기 사상의 출처라는 것을 감출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117). 이에 따라 저자는 여러 가지 해석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① 사상 전파의 시간적 인과 관계. 즉, 사상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의 발생 전에 유교 사상이 전파‧계승되었음을 확인한다. 예컨대 “예수회 신부들의 자연적(본성적) 자유‧평등 사상과 이에 기초한 왕권민수론”은 여러 중국보고서와 중국기가 “쏟아져 나온 뒤인 1570~1610년대에야 비로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1203). 미국 국부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를 직접 확인하거나 여러 정황을 통해 추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② 서구의 사상과 역사의 의미 제한. 예를 들어, “‘만백성의 본성적 자유‧평등’ 사상과 왕권민수론” 등은 “유럽의 히브리이즘(기독교) 전통에서도, 또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1203). 이 근거가 받아들여지면, 어떤 문턱을 넘는 서구의 변화는 외부의 영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③ 사상 내용의 유사성 분석. 출처를 숨긴 저작들의 내용이 공자철학과 얼마나 유사한지 표현과 내용 등을 다각적으로 살핀다.

3. 유교와 중국에 대해 해당 사상가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입증의 첫 단계이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매우 다양한 중국보고서와 중국여행기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사상가들이 어떤 책을 소장했으며, 합리적으로 읽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꼼꼼하게 제시한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대목도 있다.

① 유교사상의 서천의 첫 고리에 해당하는 뷰캐넌의 경우, 저자는 뷰캐넌이 “그리스‧로마사를 폭군방벌의 역사로, 스코틀랜드 역사를 혁명사로 변조했다. 이것은 실로 중국사를 혁명사로 소개한 라다와 멘도자의 중국역사 기술을 본뜬 모방적 역사기술이었다”고 언급한다(1208). 뷰캐넌의 스코틀랜드의 역사는 1579년에 출간되었고, 마르틴 데 라다의 중국보고서는 1575년에 나왔다. 라다는 중국의 혁명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중국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중국의 노예제에 대해서도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1000-1). 한편 멘도자의 중국제국의 역사는 1585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그는 “유럽제국의 절대군주정에 대한 파괴적 영향을 극소화하기 위해 …… ‘찬탈’이라는 단어를 써서 혁명사를 기술”했다(1010). 1214쪽에서는 “영국내전 발발(1642) 이전까지 영국인들은, 그리고 청교도 혁명기 의회파 장병들도 그때까지 나온 거의 모든 서적들에서 반복적으로 명확하게 기술된 중국의 자유‧평등과 반정‧혁명에 대한 지식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라다와 멘도자 이외에 이 책에서 소개된 다른 중국보고서에도 혁명사가 나와 있었던 것일까? 중국혁명사의 근원이 되는 서경의 대목은 1659년 마르티니의 중국기에서 처음 번역되었다(1076). 

② 저자는 “1689년 영국 명예혁명 직전까지 유교 사서 중 논어, 대학, 중용은 라틴어로 번역되고 다시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으로 보급된 상태”였고(1143),  “명예혁명 1년 반 전에 이루어진 이 대학의 라틴어 번역‧출판과 보급만으로도 이미 제임스 2세를 폭군으로 방벌한 명예혁명의 길이 사상적으로 타개된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 시간적 선후관계에서 보면 중국철학자 공자 출판과 명예혁명 간에는 충분히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중국철학자 공자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 실로 느닷없이 발발한 명예혁명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173). 그런데 저자는 “오직 공자와 중국을 알고 있던 존 로크 등 ‘단 10명’의 급진주의자들만이 1688년의 국왕추방 사건을 ‘폐위’ 또는 혁명적 의미에서의 ‘revolution’이라고 불렀다”라고도 언급한다(1251). 요컨대 공자철학의 유럽 보급의 실질적인 정도와 범위는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③ 중국과 공자철학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는 무시해도 되는 변수일까? 이 책에는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보고서와 여행기, 경전의 오역 등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는 미국의 건국 후인 1793년까지도 여전하다. “단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널리, 가장 오래 읽힌 지리서”(561)인 제디디아 모스의 미국 보편지리(1793년 출간)에도 “여전히 오류들이 끼어있다”(553).

④ 저자는 정보의 부족 혹은 공백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파악하는) 중국 체제나 공자철학의 정수를 간파하는 경우도 들고 있다. 저자는 프랭클린이 공자의 政者正也를 “Honesty is the best policy”로 옮겼음을 상세하게 분석했다(145-82). 그런데 저자는 147쪽에서 라틴어본 중국철학자 공자의 허술한 번역으로 프랭클린이 이 라틴어본을 보았더라도 政者正也 명제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고, 발췌영역본인 중국철학자 공자의 도덕에서는 아예 빼먹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프란시스코 노엘의 ‘논어번역본’ 중의 해당 부분을 읽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프랭클린이 발췌 영역본을 내용적으로 이해한 결과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148-55).

▲ 에머슨과 소로
▲ 에머슨과 소로

공자철학 전문가가 아니었던 에머슨은 “극동의 기론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맹자의 ‘호연지기’를 ‘존재’ 개념과 등치”시키고(579), “소로는 극동의 아둔한 모든 동양철학자들이 놓치는 ‘유교적 개인주의’를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739). “중국의 방대한 나라에서 유래하는 공자의 민유방본론(民惟邦本論)과 백성칙군자치(百姓則君自治, 백성은 임금을 본보기로 삼아 자치한다)의 사상도 몰랐고 중국정부가 순수한 군주정이 아니라 ‘내각제적 제한군주정’이고 영국 내각제는 이 중국내각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흄은, “나름대로 영토와 인구의 방대성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중국정치의 ‘자유와 중도 성격’을 간취한다”(1345).

⑤ 중국과 유교에 대해서 경전, 보고서 등을 통해 직접 알 수도 있지만, 250년의 긴 교류 기간 동안 서구에서 계승되어 누적된 정보를 통해 알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저자의 서구 계몽주의 사상의 형성에 대한 세밀한 추적은 공자철학의 서천이 서구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고, 미국의 국부에게로 전해지는 지식의 경로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의 분석은 공자철학을 수용한 서구사상가들이 그 출처를 숨겼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면 전대의 사상가들이 출처를 숨겼더라도 후대의 사상가들은 그 근원을 간파했을까? 다음의 두 구절을 보자.

밀턴 사후부터 로크‧흄‧스미스‧루소‧밀‧버크‧베버 등 유럽의 사상가들은 동서사상의 패치워크를 통해 토착화‧대중화된 이 유교적 외래사상들을 예외 없이 ‘서양 고유의 사상’, 아니, 심지어 ‘서구 특유의 공리’로 착각했다. 이 ‘거대한 착각’ 속에서 그들은 사전설명 없이 무단으로 본연적 자유‧평등과 인민주권적 폭군방벌을 논하며 이를 여러 가지로 뒤틀거나 이리저리 늘리고 줄이고, 또 심화‧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1229).

미국의 국부들과 건국이념의 계승자들이 계몽철학 속에서 서양식으로 다듬어진 근대적 사상과 제도방안의 궁극적 출처를 제대로 알았든 몰랐든 이 사상과 제도들은 모두 ‘중국산’이었다(1199).

4. 저자에 따르면, “성서는 만인불평등창조론‧불평등처벌론‧만인불평등탄생론을 펴고” 있어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 삼면적 만인불평등론을 분쇄하지 않는 한 평등을 입론할 수 없다”(1291). 또 평등은 “노예의 본연적 자유‧평등을 조금도 인정치 않는 ‘노예소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인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으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는 사상”이다(1204). 이런 사상에 기반을 둔 “고대그리스‧로마 이래 유럽”에는 “전통적인 노예주‧귀족‧국왕들의 자유와 그들끼리의 평등”만이 있었을 따름이다(1201). 이는 만민의 본성적인 자유와 평등 사상이 외부, 즉 중국과 공자철학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또 서구의 사상가들이 출처를 밝히지 않더라도 자유와 평등 사상을 주장할 경우 공자철학과 유사성의 범주 속에서 분석할 수 있게 한다. 일단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나서, 우회해서 질문을 던져보자. 저자의 주장은 서구 사상의 확장‧변화 가능성도 부정하는 것인가? 외부와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이 변화하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사상의 포용력 혹은 유연성도 함축하지 않는가?

① 한편으로 저자는 ‘유럽의 히브리이즘(기독교)‧헬레니즘’과 공자철학이 본질적으로 달라서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고, 시대가 경과해도 원래의 성격대로 분출되는 것처럼 기술하는 듯하다. 저자는 서구의 “좋은 요소들”인 “선진기술, 경제, 경영, 자유, 평등, 관용, 혁명, 학교, 언론, 정당제도 등”은 “모두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 250년간 서천한 공자철학과 유교문화에서 유래한 것들”이고, “나쁜 요소들”인 “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시즘, 집단학살”, “계급투쟁, 폭력혁명,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은 “모두 다 서양의 호전적 히브리이즘과 헬레니즘 전통에서 유래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한다(1646). “1823년부터 ‘먼로주의’라는 미주에서의 은밀한 패권선언으로 시작해 노골적으로 갑자기 전면화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치도 “서구적 기층문화 속의 헬레네‧헤브라이적 제국주의 성향으로부터 분출된 것”이다(63).※ 또 “지난 100년 동안 전 인류를 괴롭히고 특히 극동의 인민을 가장 많이 괴롭힌, 그리고 지금도 부분적으로 그러고 있는 공산주의도 헬레니즘(희랍주의)과 히비리이즘(유대‧기독교주의)의 소산이다”(63).

※ 501쪽에는 이와 상이한 평가가 보인다. “미국의 유럽제국과의 정치적 단절정책과 고립주의 기조는 중국의 평화주의 외교정책에 대한 단순한 모방으로 그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미국이 인구가 아직 적고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취한 한시적 정책으로 보인다. ‘다른 나라들이 해상에서 우리를 어떤 법으로 대할 것인지를 우리가 말해도 되는 날’에는 미국의 힘으로 국제관계를 주도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 평화를 유지하며 미국의 해상 패권이 가능한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오면 패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화평굴기’ 전략인 것이다.”

② 다른 한편, 저자가 제시하는 공자철학의 서천은, 저자는 종종 ‘왜곡’, ‘표절’, ‘립서비스’ 등으로 표현하지만, 달리 보면 많은 경우, 히브리이즘과 헬레니즘에서 성장한 서구인들이 중국과 공자철학을 나름의 시각으로 이해 혹은 오해하는 과정이 쌓여서 이루어졌다.

▲ 저자 동국대 황태연 교수
저자 동국대 황태연 교수

몇 가지만 들어보면, 가브리엘 마젤란의 신중국기(1688)는 “공자의 성선설을 교묘하게 기독교의 원죄설적 성악설에 가깝게 변조”했는데, 볼테르는 마젤란의 주석을 활용했다. 저자는 “공자 철학의 합리주의적‧기독교적 오독과 오해는 유럽에서 이처럼 비일비재했다”고 언급한다(1099). 뒤알드는 “공자철학의 정수를 나름의 합리론적‧기독교적 굴절과 오독 속에서” 소개했다(1040). 프랭클린과 제퍼슨이 읽었을 것이라는 중요한 저서인 쿠플레의 중국철학자 공자, 또는 중국의 학문은 공자를 “종교적 불관용 조치를 정당화하는 데 오용”했으며, 번역과 해석에 “슬그머니 가톨릭의 교리를 섞어” 넣었다(1150-1). 스코틀랜드의 역사에서 뷰캐넌은 자신의 논변을 “기독교의 교리와 서구제국의 역사에 의해 정당화하려고 애썼다”(1207). 저자는 뷰캐넌, 벨라르민, 수아레즈 등을 설명할 때, 이들이 “중국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중국의 논변들을 모조리 성서구절과 전통신학 속에 완전히 녹여서 자기들의 독창적 견해로 변조했다”고 말한다(1203). 그리고 이후 밀턴은 “공자‧맹자‧뷰캐넌‧벨라르민‧수아레즈를 거명치 않으면서 이들의 정치사상을 서구의 고유한 사상으로 ‘변조’해 ‘토착화’”시켰다고 언급한다(1216). 볼프는 “공자의 군자(덕자)치국론 또는 덕치론을 플라톤 식의 철인치자론으로 오해”했고, “서양철학자답게 공맹의 행복 개념을 즉각 지극히 목적론적 개념으로 변질”시켰다(1332, 1335). 다음의 언급은 이 전체 과정을 요약하는 말로 적당할 것 같다.

물론 ‘유럽의 공자철학’은 ‘중국의 공자철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에서 적응주의적 포교를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유럽에서 이 포교노선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공자를 번역하고 해석한 유럽의 예수회신부들과, 유럽의 앙시엥레짐을 개조하기 위해 공자를 활용한 자유사상가들이 상이한 관점과 여러 가지 고려 속에서 서양철학과 접붙이고 짜깁기(패치워크)한 공자철학, …… 유럽문명의 관점에서 “제조된 공자주의”였다. 환언하면, 가톨릭을 신봉하는 예수회 신부만이 아니라 개신교 목사들과 유럽의 자유사상가들을 망라하는 유럽 지식층에 의해 “재발명된” 공자철학이었다(1178).

③ 위의 인용문에서 나온 “적응주의적 포교”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례이다. 다음의 언급을 보자.

‘적응주의’ 선교방법에 입각한 중국인들에 대한 접근은 유신론적 공자유학을 무신론적으로 이해된 성리학과 엄격히 구분하고 사랑≒인,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는 황금률, ‘원수를 곧음으로 갚아라’≒‘원수를 사랑하라’ 등 기독교와 유사한 여러 내용을 담은 본래의 공자철학을 바탕으로 중국인들에게 다가가 기독교 가르침을 설파하는 방법이었다. …… 공자를 유신론자로 보고 명‧청대의 성리학자들(신유학자들)을 무신론자로 보는 비판적 유교이해는 적응주의 선교론의 일부였다. 성리학‧양명학 등 기존의 경전해석을 공자의 글귀를 끌어다가 자기들의 철학을 한 ‘위학僞學’으로 물리치고 경전의 본의 해독을 위주로 삼는 마테오리치의 공자연구는 중국유생들 사이에서도 영향을 떨쳐 이른바 수사학적洙泗學的 ‘한학파漢學派’를 일어나게 할 만큼 심오하고 위력적이었다(1039).

마테오리치의 기독교선교를 위한 공자경전 연구는, 역으로 중국유생에게 영향을 끼쳤고, “공자경전만을 중시하는 순수한 공자철학”인 수사학이 일어나게 했다. 이 사례에서 ‘패치워크’의 방향은 서에서 동쪽으로도 일어났다.

④ 이 주제와 관련된 층위는 ‘히브리이즘‧헬레니즘 vs 공자철학’, ‘서구사상과 공자철학의 패치워크’ 외에도 하나가 더 지적될 수 있다. 서구의 ‘나쁜 요인들’의 원천이 히브리이즘‧헬레니즘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처럼, 공자철학을 왜곡시키는 사상으로 성리학이 지목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교문화의 권위주의는 성리학적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다(22, 679, 766, 819, 1099 등). 아마도 이 책의 주제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어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3000개의 종파로 파생된 중국의 유교‧불교‧도교와 그밖에 회교‧경교(네스토리우스 기독교) 등 전혀 이질적인 종파들과 철학들의 역사적 각축과 훈고학‧성리학‧양명학‧고증학‧한학파유학‧개신유학 등 유학의 다양한 유파,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유산 등 많은 중국적 문화와 학문 요소들의 지극한 다양성과 이질성”(1347)을 갖춘 중국의 사상에서 서천의 주체인 공자철학이란 과연 자명한 것인가? 공자 경전에 대한 오독과 오해를 낳은 성리학은 서쪽으로 이동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성리학의 서천’은 서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5. 이상의 질문들은 한편으로 ‘서구의 유교화’라는 강한 주장이 좀 더 정교화될 여지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양과 서양의 ‘상호 패치워크’는 좀 더 탐구해볼 만한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강한 주장에 동의한다고 치자. 저자는 유교본산인 한‧중‧일 3국과 함께 “11개의 극서국가만이 유교화를 통해 ‘낮은 근대’에 도달했고, 이어 ‘낮은 근대’를 넘어 ‘높은 근대’를 이룩”했다고 말한다(20). 이 14개 국가만이 근대화에 성공했고, “유교를 모르는 아프리카‧중앙아시아‧동남아시아‧중동‧동유럽‧남유럽‧중남미 등지의 비유교 국가들은 모두 다 ‘전근대’나 ‘비근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면서, “‘근대화’의 DNA가 공자철학”이라고 주장한다(1648). 수천 년 혹은 적어도 250년 이상의 유교화를 거친 14개국만을 근대화로 이끈, ‘근대화의 DNA 공자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보편성을 띤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저자가 제시한 해석의 모든 열쇠는 ‘근대화’에 저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달려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후속 작업을 시작했으며, 유교적 근대의 일반이론(상‧하)(넥센미디어, 2020)이라는 책을 그 성과로 내놓았다. 저자는 독자의 비판적 검토보다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지윤 서강대·정치사상

서강대학교 글로컬한국정치사상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친일 청산의 딜레마: 동원된 협력자 학병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2000년대 이후 한국 보수주의의 변화: 에드먼드 버크와 뉴라이트의 역사적 서사를 중심으로”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미국 예외주의>(공역), <정치와 비전>(1-3, 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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