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시민,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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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시민,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
  • 이상원 인천대·정치사상
  • 승인 2021.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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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서평_ 『문화와 민주주의』 (김남국 지음,  이학사, 660쪽, 2019.10)

본 저서의 결어에서 저자는 향후 다문화 시대를 잘 이끌어갈 민주시민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바람직한 시민은 외부적 압박과 시선에 개의치 않고 개인으로서의 성찰과 공적인 실천을 통해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문화 시대의 바람직한 시민은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강함은 어떠한 힘을 필요로 한다. 진정으로 강한 시민은 바로 “생각의 힘과 그 힘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존엄함을 믿는” 사람이다(593쪽, 이하 쪽 표기 생략). 다가올 다문화 시대의 다양한 정체성들 간 교류와 갈등에 직면할 우리는 진정한 민주시민의 힘을 지니고, 주위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개인들”로서 성장해가야 한다. 저자에게 이러한 독립적인 개인들은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적 차이를 존중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리고 정치적 존재로서 독립적인 시민들은 개인들 간의 차이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공적 영역의 정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오직 강한 민주시민들의 육성만이 “민주주의의 후퇴와 권위주의의 귀환을 저지하는” 다문화 시대의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는 길이 된다(593).

오늘날 강한 민주시민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가 곧 시민의식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들의 일상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여타 공동체적 삶을 위한 민주적 가치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다(590). 여기서 저자는 문제 상황의 중요한 이면을 제기한다. 즉 우리가 문화와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현대의 사회경제적 문제와 함께 야기된 문화적 균열은 곧 시민의식 속에 자리 잡은 “무력감과 절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589). 오늘날 민주공동체의 균열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 가능성의 새로운 모색은 민주정체의 안정적 운영과 발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사회적 연대감의 창출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바로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문화적 정체성은 결국 특정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소속 여부를 가르는 집단적 경계를 기준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배제의 현실적 문제를 직시하면서, 결국 이 문제의 지속은 민주공동체 속에서 타자의 포용을 위한 시민적 힘을 요청할 수밖에 없음을 제시한다. 즉 민족적 동질감 등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중시는 무엇보다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바탕을 둔 시민적 역량의 확립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독립적인 시민은 단순한 개인성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귀속적 애착과 합리적 반성의 균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볼 줄 아는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587).

저자는 다문화 시대의 국민국가는 단순한 헌법애국주의를 넘어서 보다 “두터운 정치적 대표와 사회적 연대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585). 이는 자유주의적 개인성을 중시하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가깝게 존재해 온 역사적 정치공동체의 경계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 성찰적 태도의 형성을 의미한다. 즉 다문화 시대의 독립적 개인은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 단순히 보편적 인권이 아니라 각 정치공동체가 갖는 고유한 문화와 전통과 상호작용 속에 있음을 간파하는 능력을 지닌 시민이다(586).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민주시민의 정체성은 다수와 소수의 갈등을 넘어서 새로운 민주적 거버넌스의 형태로서 다수제 민주주의를 넘어선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전환과 그 원칙으로서의 “공공성(public spirit)”을 바탕으로 형성된다(584). 개인들이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다문화 상황에서의 일상적 갈등을 자율적으로 중재하는 모습은 민족에 대한 새로운 담론 형성과도 직결된다. 이에 저자는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인종적 민족(ethnic nation)을 탈피한 “시민적 민족(civic nation)”을 중심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즉 진정으로 강한 민주 시민은 민족성과 같은 문화적 정체성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민주 시민은 민족성을 다문화공동체의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정신의 중요한 요소로서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개인들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유롭게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의식의 육성을 강조한다. 이 속에서 꽃 핀 시민적 민족주의야말로 바로 다문화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때 시민적 정체성의 중요한 기반은 인종이나 종교가 아니라 특정 공동체가 지향하는 민주적 삶과 시민적 전통의 형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579).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의 교차와 분화 속에 제기되는 소수 집단의 대표성에 대한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합의제 민주주의와 시민적 민족주의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합의제의 대표적 형태로서 “협의체 민주주의”는 다양한 하위 집단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 수립될 수 있다. 협의체 민주주의는 각 집단의 대표자들이 규모에 따른 비례성과 상호거부권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대연정”의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578). 전통과 혈연을 강조하는 인종민족주의적 관점과 달리, 합의제적 민주주의하에서 시민들은 다양한 정체성의 공존과 포용적 정의가 이루어지는 민주적 공동체의 삶 자체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을 통해 “시민적 민족성”을 형성하게 된다(576). 이는 단순히 규범적 요청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정체성의 정치와 개인적 다원성을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강한 시민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다. 이 맥락에서 저자는 민주주의의 강함은 “엘리트의 기획에 의해 프로젝트로서 만들어지는(making) 정치가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 자라나는(grow up) 정치”일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민적 민족성과 이에 기초한 민주주의 문화는 다문화 시대에 광범위해지는 대표의 범위를 확장하면서 다수와 소수의 대립을 지속적으로 극복해나가는 시민적 역량을 확보한다(556). 이렇게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의 연대를 통해 기존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강한 민주주의 모습은 다문화 상황에서 타협의 필요성을 새롭게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에서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개인적 자유의 관점에서 집단의 문화적 권리를 비판하는 시각, 반대로 개인의 삶에 일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적 정체성과 권리를 옹호하는 두 입장의 의견을 검토한다. 그리고 이 두 입장 간의 논리적 충돌은 결국 조화되기 어렵고, 적절한 방식의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문화 시대 민주적 시민의 힘은 타협적 관점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적 관점과의 일상적 충돌을 감내하면서 동시에 토론과 대화를 적극적으로 감행 할 수 있는 심의의 노력 속에서 발휘된다. 이처럼 문화적 권리에 관한 대립적 진영을 포괄하는 민주적 역량을 저자는 “심의다문화주의”로 표현한다(88). 심의다문화주의의 입장은 문화적 권리에 대한 비판 혹은 존중의 이분법적인 선택이라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문화가 개인적 인권과 민주공동체 전체의 발전 모두에 기여한다는 “문화의 도구성”에 초점을 맞춘다(81). 그러나 여기서 문화는 단순히 민주주의를 위한 보조수단적 역할에 머무르기보다, 보다 포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다원성을 지탱하고 시민적 삶의 방식을 창출하는 제도적 환경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과 소수의 권리 보호라는 두 원칙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제도적 힘과 역량을 지녀야 한다. 저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역량은 다문화의 필연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동체의 정치적 규칙을 존중하면서 때론 불가피한 희생을 감내할 줄 아는 강한 시민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83). 결국 문화집단 간 불평등의 문제나 개인적 지위 문제,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이주자 문제 등 다문화주의 정책의 해결 방향은 시대를 초월해 모두가 의지할 보편적 기준에만 의존하기 어렵다. 이때 문화 간 상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공동선의 추구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며, 문화적 관점들 간의 지속적 충돌과 갈등을 조율할 정치적 힘의 부여는 개개인의 자유와 민주공동체의 안정적 유지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심의 다문화주의의 타협적 접근은 더 나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창출하기 위한 문화적 환경에 대한 중대한 통찰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은 결국 현실 속 인간 존재가 진공상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자아(encumbered self)임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57).

오늘날 지구화의 움직임은 국경을 넘는 자본과 노동의 흐름과 함께 수반되는 다문화적 상황에 대한 고민을 회피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지구화 속 다문화주의의 증대는 역설적으로 탈지구화의 반작용을 초래하며 고립주의와 배타주의를 초래하고 있다(45).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를 넘어 다시 우리네 일상적 삶의 방식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화는 결국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간적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개인들의 삶은 지구화와 탈지구화의 긴장 속에 배태되는 혼란, 좌절, 절망의 지속과 극복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23). 저자는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이 통찰력 있는 저작 속에서, 다문화주의와 민주적 삶의 필연적 연관성은 결국 우리의 일상의 모습에 대한 숙고에서 출발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혼란과 좌절 속에서도 일상의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은 소수와 다수, 개인과 집단을 아우르는 시민 개개인의 정치적 힘에서 출발해야 함을 제시한다. 새로운 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본 개인은 단순한 보편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타자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상원 인천대·정치사상

연세대 졸업. 클레어몬트 대학원 대학(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정치사상 전공으로 인천대 윤리교육과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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