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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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의 ‘무기’다.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1.01.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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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개념무기들: 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 |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432쪽

들뢰즈 사후 4반세기가 지났다. 들뢰즈의 저작들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의 해체와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읽히기 시작했다. 이후 철학은 물론이고 문학, 영화, 미술, 건축, 정치 등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 들뢰즈의 사유는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c)을 행동학(ethology)으로 읽었듯이 들뢰즈의 철학을 행동학으로 독해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실체가 슬픔으로 정동되는 수동상태를 넘어서 기쁨으로 정동하는 능동상태로 이행함으로써 구원과 지복에 이르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진화과정을 서술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이 행동학적 이행과정을 운동과 역량이라는 두 차원의 교차 속에서 규명하는 철학적 인물로 그려진다.

이 책의 각 장은, 크로노스의 시간 밑에서 아이온의 시간을 규명하고, 정념의 운동인 정서들 밑에서 정동의 떨림을 확인하고, 권력에 예속된 주체들 밑에서 전(前)인격적이고 전개체적이며 전기호적인 애벌레주체들의 우글거림을 감지하며, 이동의 속도 밑에서 이행의 속력을 식별하는 들뢰즈를 보여준다. 들뢰즈의 소수정치학은 중앙집권적 권력의 포획력에서 빠져나오는 탈영토화적 힘들의 도주역량과 그것들의 공통되기의 지도를 그리는 정치학으로 서술된다.

이 책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적 행동학은 자본의 스펙터클 공간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면서 다중이 구축해 낼 공통장의 얼개를 그려내는 지침으로 사용된다. 들뢰즈 이전에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대안운동의 이념은 사회주의였다. 그것은 전위와 대중,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라는 두 성분의 결합을 추구하되 전자의 관점과 입장을 중심으로 그 결합을 추구했다. 그 결과 그것은 점점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정당에 의한 대중의 장악과 동일시되어 갔다.

질 들뢰즈
질 들뢰즈

이 책은 들뢰즈의 실천철학 속에서 이 전통적 관점을 역전시킬 경로, 즉 위에서의 좌파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소수정치적 섭정이라는 실천방략을 모색한다. 아래로부터의 섭정이란 다중의 소수정치가 좌파정치를 전략적으로 규정하고 좌파정치가 소수정치의 전술단위로서 기능하는 관계 구도에 대한 정치적 상상이다. 이 책은 동역학과 운동학의 결합을 사유하되 동역학을 중심으로 운동학을 사유하는 들뢰즈의 실천철학이 우리에게 이러한 정치적 상상을 밀고 나갈 다양하고 유효한 개념무기들을 제공함을 명료한 언어로 밝혀 보여준다.

들뢰즈는,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로 수렴된 맑스의 과학(정치과학)이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실추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러니한 역사적 순간에 철학(정치철학)의 고유성을 다시 주장한다. 들뢰즈는 당시 일부 논자들이 주장하였던 ‘형이상학의 죽음’이나 ‘철학의 초극’이라는 말들을 ‘부질없거나 듣기 거북한 허튼소리’로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감각의 기념비를 구축하는 예술이나, 변수들 사이의 함수관계를 발견하는 과학과는 달리, 개념을 창조하는 것에 철학의 본령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함수를 창조한다. 예술은 감각의 기념비를 창조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과학과 예술과 달리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실천이다.

들뢰즈는 철학사를 섭렵하면서 차이, 다양체, 내재성, 카오스 등의 개념을 발명하고 이를 통해 칸트가 사유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던 ‘물 자체’(Ding an sich)를 사유 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감각 가능하도록 만들 개념들을 채굴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들뢰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20세기 후반의 냉전 변증법과 그 냉전적 체제에 대항하고 또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 개념무기들을 벼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들뢰즈가 제공하는 개념무기들은 어떤 것인가? 이 책에 따르면 들뢰즈는 인지적 차원에서 잠재적으로 공통적인 관계를 사적 소유와 금융적 수탈의 제도하에 종속시킴으로써 양극화된 몸을 생산하고 있는 현대의 인지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잠재적 공통관계를 현실화할 새로운 공통몸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우리의 관념을 그 구성활동에 적합한 것으로 변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사유할 주요한 개념무기들을 제공한다.

이 책의 부제는 “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이다. 들뢰즈는 행동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분자들의 빠름과 느림의 결합인 속도관계(경도)와 정동하고 정동되는 내포역량(위도)에 대한 연구, 다시 말해 상이한 사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들과 역량들의 결합에 대한 연구가 바로 행동학이라고 말한다. 행동학의 관점에서는 정동들이 사물을 위협하는가 가속하는가, 독이 되는가 영양분이 되는가, 보다 연장된 새로운 관계, 보다 강력한 역량을 구성할 수 있는가 없는가, 더 폭넓고 강력한 세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빠름과 느림의 역량을 어떤 질서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등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행동학에서 문제는 이용이나 포획이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이다.

이 책은 들뢰즈가 존재의 동역학과 운동학을 식별한 후 양자를 스피노자적 윤리학(ethics)과 불가분리한 행동학(ethology)으로 어떻게 종합하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작업을 통해 이 책은 21세기에 들뢰즈 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정치적 의미를 규명하고 자본의 스펙터클 공간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면서 다중이 구축해 내고 있는 공통장의 얼개를 더듬어 보고자 시도한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들뢰즈의 행동학은 ‘생태정치학’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20세기에 질 들뢰즈 현상은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다. 이 책에 따르면 적어도 우리는 20세기에 세 번에 걸친 들뢰즈 현상의 출현을 확인할 수 있다. 1968년에 들뢰즈는 차이의 사상가로 나타난다. 1968년과는 달리 1989년의 들뢰즈는 도주선의 철학자로 나타났다. 1999년의 들뢰즈는 시애틀의 들뢰즈, 즉 리좀과 네트워크의 정치철학자로 나타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소수문학론’), 역사(‘대중독재론’), 신학(‘해방신학론’), 철학(존재론과 형이상학), 영화 등 다양한 영역으로 들뢰즈의 사유가 확산되고 전염되었다. 그리고 최근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을 통해 들뢰즈가 다시 객체와 실재론, 그리고 유물론의 철학자로 다르게 반복되는 현상이 발견된다. 1968년 전후의 첫 번째 반복과 유사하게 차이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2008년의 전 지구적 경제위기의 충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차이를 물질, 객체, 기계 등으로 재해석한다. 이 책에 따르면 객체지향존재론은 들뢰즈 없이는 불가능했다. 들뢰즈는 이미 현실적인 것(the actual)과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모두 실재적인 것(the real)임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규명했다. 이 책에 따르면 객체는 존재론적 차이이고 욕망하는 전쟁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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