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소띠 해, 생태학적 통찰의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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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소띠 해, 생태학적 통찰의 해가 되기를
  • 임재해(林在海) 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
  • 승인 202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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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로 보는 신축년]

상징과 의미는 사실보다 중요하다. 사실에 부여된 의미가 사실을 재인식하게 만들고 사실이 지닌 상징의 힘이 사실을 재구성해 주기 때문이다. 새해라고 해서 물리학적으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역사적 인식으로는 새로운 해이다. 다가오는 신축년에 소띠해라고 하는 의미가 부여되고 소의 상징성이 더 보태지면, 한갓 물리적 주기로 반복되는 한 해가 오롯이 독자적인 새해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까닭이다.
12지 띠 동물 가운데 소는 유일하게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 가축이다. 소는 농우로서 일꾼 몫 이상의 노동력을 제공할 뿐 아니라, 농가의 재산 목록 1호 구실을 하므로, 흔히 ‘농가의 밑천’으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소가 머무는 외양간은 사랑방 가까이 배치되어 있거나 번듯한 아래채의 한 칸을 차지했다. 가족들의 끼니를 차려내는 부엌이 안방 아궁이와 더불어 있었던 것처럼 소여물을 끓이는 부엌은 사랑방 아궁이와 함께 별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소여물을 마련하고 보관하는 헛간도 양식을 저장하는 뒤주나 고방처럼 별도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꾼들이 산골짜기로 나무하러 소달구지를 끌고 갈 때는 으레 점심 도시락을 챙겨 가는데, 이때 점심용 소여물도 들통에 챙겨 싣고 간다. 힘든 일을 할 때는 소도 3시 세끼를 챙겼던 것이다. 암소가 송아지를 낳을 때는 산모가 아기를 출산할 때처럼 삼신상을 차려놓고 비는가 하면, 대문에 금줄을 쳐서 부정한 출입을 막기까지 했다. 소 삼신을 아기 삼신처럼 섬겼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소는 사실상 가축이면서 가족처럼 사람과 대등한 지위를 누렸다.
소의 의리도 사람 못지않게 기릴 만해서 죽으면 묘지도 쓰고 비석도 세워 준다. 선산 지역의 의우총(義牛塚) 전설이 그 보기이다. 농부가 산골짜기 밭을 갈고 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자, 소가 나서서 호랑이와 맞서 싸워 주인을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상주에서는 최근의 실화가 전한다. 늘 여물을 챙겨 주던 할머니가 죽자, 소가 그 무덤에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빈소를 찾아가 조아렸다는 것이다. 2007년에 이 소가 죽자 상주시에서 무덤을 만들어주고 비석을 세워 소의 의리를 기렸다. 옛말에 ‘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아내에게 한 말은 난다’고 하여 아내보다 소에 대한 신뢰를 더 높이 사기도 했다. 
소의 미덕은 고대로 갈수록 더 크게 인식되었다. 고대에는 소가 제천의식에 쓰였으며, 전쟁이 있어서 군사를 일으킬 때는 소를 제물로 바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발굽의 상태로 점을 치기도 했다. 따라서 제물로 바치는 희생(犧牲)의 두 글자에는 한결같이 소를 나타내는 우(牛)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소는 예사 가축과 달리 고대 농경사회에 신성한 존재로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물에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소의 속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적지 않다. 소의 미덕이 성실함과 충직함이라면, 우직함과 미련함은 소의 단점으로 인식된다. 흔히 ‘소귀에 경 읽기’나 ‘소 발에 쥐잡기’라고 하는 옛말에는 ‘소같이 미련한 놈’의 뜻을 넘어서 어리석고 무지한 속성까지 갈무리되어 있다. 게다가 고집까지 세어서 흔히 고집 센 사람을 ‘쇠고집’으로 일컫기 일쑤였다. 
고집이 정의와 진실에 입각한 긍지 높은 신념일 때는 세태에 흔들리지 않는 지조가 될 수 있지만, 교만과 위선에 의한 헛된 권위 의식의 표출일 때는 다른 사람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횡포가 된다. 고집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고집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듯이 소도 마찬가지이다. 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소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올해는 신축년 소띠 해이되 5행에 따라 흰 소띠 해라고 한다. 흰 소는 특히 귀해서 더 신성시된다. 그러므로 새해는 더 밝은 전망을 가져도 좋으리라 생각되지만, 코로나19에 따른 팬데믹 상황의 지속으로 여전히 어렵고 힘든 한 해가 될 수 있다.
소는 비교적 유순한 편이나 화가 나면 무섭게 들이받는 난폭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가 농가의 일소로서 유익한 것은 유순한 성질의 소를 잘 부린 까닭이다. 코로나19도 잘 부려야 유순하게 잠재울 수 있다. 코로나19의 창궐은 사람들이 빚어낸 산물이다. 종교 생활이든 생업활동이든 사람들이 집단적인 모임과 무분별한 이동을 한 결과 감염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 까닭이다. 교회든 상가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곳에는 코로나바이러스도 모여들기 마련이다. 사람이 없는 곳에는 코로나도 없으며, 사람이 가지 않는 곳에는 코로나도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코로나 확산은 순전히 사람들의 행동반경과 활동상황에 비례할 따름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팬데믹 상황이 아니다. 팬데믹에 골몰하느라 지구 가열화에 따른 기후위기를 제대로 절감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세계 지성들은 코로나19 확산의 원인도 지구생태계의 교란에서 찾는다. 사람들이 살기에 알맞던 유순한 지구생태계가 사람들의 가혹한 수탈과 오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열을 올리고 있다. 일시적으로는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를 2, 3년 주기로 인간사회에 계속 침투시킬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는 지구생태계 전체를 흔들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발붙이고 살 수 없는 세계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유순한 소를 인간이 잘못 부려서 날뛰게 만든 꼴이나 다르지 않다. 열을 가라앉히고 생태계를 순조롭게 회복하려면 지구 체온 유지에 전 지구적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학사회도 펜데믹 상황에 쩔쩔매고 있다. 사회변화와 상관없이 강단강의에 안주해 온 탓에 디지털 매체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가 원격강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더 문제는 지구 가열화나 기후위기에 관한 현실 인식의 결여라 할 수 있다. 눈앞의 현안에 골몰하느라 근본적인 위기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자연관의 혁신이 절실하다. 소를 가족처럼 여겼듯이 자연 생명을 인간과 대등하게 존중하고 생태계를 건강하게 가꾸어야 한다. 모든 분과학문은 생태학적 문제의식과 함께 생태주의 체제로 대전환을 이루어야 길이 열린다. 
2019년에 유럽의회는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기후위기’를 선정했다. 우리 교수들이 만드는 신문은 여전히 현실정치에 관한 시사적 문제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는 일을 줄곧 해오고 있다. 탈중심주의 시각에서 보면 소가 웃을 일이다. 소는 잘 웃지 않는 동물이다. 그러나 웃지 않는 소라도 정말 경탄할 만한 일을 보게 되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신축년 새해에는 소도 웃을 비범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세계사적 분기점을 자각하고 학문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하는 과제를 안고 뒹굴어야 마땅하다. 대학사회는 학과체제의 변혁을 일으키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가로질러 모두 생태학적 문제의식에 사무치는 학술 활동을 골똘하게 펼쳐야 한다. 새해는 생태학적 통찰의 분기점이 마련되는 역사적인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임재해(林在海) 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

영남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대학교 인문대 민속학과 교수로 있는 동안 민속학연구소장, 박물관장, 인문대학장을 역임하고, 실천민속학회장, 한국구비문학회장, 비교민속학회장,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장 등의 학회활동을 했다. 현재 민속학과 명예교수,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공동대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사 일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민속문화를 읽는 열쇠말』,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마을문화의 인문학적 가치』, 『고조선문화의 높이와 깊이』, 『고조선문명과 신시문화』 등 33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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