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웅들’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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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영웅들’의 음악
  • 손민정 한국교원대학교·음악학
  • 승인 2021.01.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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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평]

2020년의 음악문화 현상을 정리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트로트의 열풍’이 있다. 2019년 2월부터 시작된 TV조선의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가시화된 트로트의 부활은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어 놓게 되었는데, 이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트로트 연관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과연 무슨 이유와 에너지들이 발동하여 트로트가 다시 살아난 것일까? 그렇다면, 트로트가 죽었던 적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트로트를 향한 폭풍 공감의 원천은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는 1998년 IMF 한파 시절을 애써 끄집어내어 기억하고자 한다.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국가는 부도 위기에서 국제통화기금 IMF로부터 구제금용을 받게 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어느 가정 가릴 것 없이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였다. 심지어 그즈음에 사회초년생이 되어야 했던 절망적인 청년들을 일컬어 ‘IMF 키즈’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탄의 수렁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망연자실하며 책임을 떠안아야만 했던 이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아버지들이었다. 하지만 모름지기 한국 사회에서 어른 남성은 눈물을 아무 데서나 보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에, 그리고 누구보다 강인해야 함을 강요받았던 기성세대였기에 눈물을 마음껏 흘릴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간’이 필요했고, 그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신파 악극’이었다.

오늘날 트로트 음악 프로그램을 각종 방송사에서 앞 다투며 만들어내고 있듯이, 1998년에는 서로들 신파악극을 만들었다. 1998년 1월 10일부터 시작되어 연일 매진을 기록했던 MBC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를 들여다보자. <불효자는 웁니다>는 1940년도에 발표된 트로트의 제목과 동일하다. 트로트 ‘불효자는 웁니다’는 진방남이 불렀던 노래로, 그는 1930~40년대 트로트를 형성시키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작사가 반야월의 또 다른 예명이다. 음반 작업을 위해 일본에 가 있는 동안 고향에 계신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이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있어 1940년은 IMF 한파 못지않게 비극적인 시기였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위해 조선인의 징용과 징발을 본격적으로 감행했기 때문이다. 가장 비극적인 트로트가 대거 쏟아졌던 시기 역시 1940년대 초반이었던 것, 1998년 신파 악극의 제목을 1940년도 트로트에서 가져왔던 것 모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파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에는 서울의 명문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출세하지만 사랑에는 우유부단했던 진호, 고향에 두고 온 진호의 약혼녀 옥자, 그리고 진호의 성공만을 바라며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진호는 서울에서 부잣집 딸 애리와 결혼하게 되며, 옥자는 진호의 배신을 견디다 못해 윤락녀가 된다. 진호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해서도, 사랑했던 옥자에 대해서도 무심한 채 안락한 삶을 영위한다. 그러던 중 옥자는 악당 따개비의 협박을 받게 되는데, 진호와의 관계를 세상에 폭로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옥자는 진호의 행복과 성공을 염려하며 사투를 벌이다가 따개비를 살해하게 되고, 진호의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며 따개비 대신 죽은 것으로 자처하며 여생을 망자로 살아간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밝혀지며 진호는 ‘불효자는 웁니다’를 목이 터지라 부르게 되는데, 관객은 극도로 고조된 슬픔을 느끼며 함께 눈물 흘린다.

진부한 스토리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네 ‘작은 영웅들’의 어쩔 수 없는 감정적 북받침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가장 힘든 시기에 고개를 떨궈 눈물 흘리며 서러움을 배설했던 것은 결국 ‘가족’과 ‘사랑’의 상실에서 느꼈던 애절함이었다. 오늘날 트로트를 향한 한국인의 전무후무한 공감대 형성을 이해하려 할 때, IMF 한파 속에서 신파 악극으로 받았던 촉촉한 위로를 떠올려 본다. 누군가의 말처럼, 감정은 다분히 정치적이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에는 작동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와, 한국인이 트로트에서 새삼스럽게 재발견한 것은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인 스스로가 녹여서 응축해 놓은 감정의 에너지가 아닌가 싶다.     
 
 
손민정 한국교원대학교·음악학

한국교원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작곡이론과 학사 및 석사. 미국, 오스틴-텍사스 주립대학교 음악학과 석사 및 박사. 미국,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음악학과 포닥연구원 겸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트로트의 정치학』, 『World Star Musics-쿠스코에서 도쿄까지 세계음악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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