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선조들의 험난했던 발자취…역사가 살아있는 원주 용소막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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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선조들의 험난했던 발자취…역사가 살아있는 원주 용소막 성당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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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강원도 원주 용소막 성당
▲용소막 성당. 원주 8경 중 제7경이며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용소막 성당. 원주 8경 중 제7경이며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신들의 숲’이라는 신림면(神林面),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신들이 내려와 관리하던 땅에 용의 형상을 한 용소막 마을이 있다. 이따금 드물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마찰음마저 환청이 아닐까싶은 고요와 적막의 마을이었다. 겨울이어서, 아니 어쩌면 이 괴이한 시절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불안과 불평을 소리치는 데 의욕을 잃은 이들이 일제히 입을 꼭 다문, 그런 적막이었다. 그러한 공기를 뚫고 높고 뾰족한 첨탑이 솟아 있었다.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무성한 빈 가지로 감싸 거의 투명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붉은 벽돌의 벽체와, 아치형 통로와, 채색 유리가 있는 작고 오래된 성당이었다. 비신자의 눈과 마음에 그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용소막 성당의 내부. 아치형 천정에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다.
▲용소막 성당의 내부. 아치형 천정에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창기 모진 박해의 시대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강원도에 처음 세워진 성당은 횡성의 풍수원 성당이다. 두 번째는 원주성당(현 원동 주교좌)이며 세 번째가 용소막 성당이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던 신자들이 하나 둘 용소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3년 무렵이었다. 그들은 용소막에서 원주 본당 소속 공소(公所)로 모임을 시작했고 1904년에는 독립된 성당이 되었다. 처음에는 용의 발 위에 초석을 놓은 10칸 규모의 초가집이었다.

▲용소막 성당의 부속 건물들. 왼쪽부터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 두루의 집, 피정의 집, 오른쪽 석벽 동굴은 성체 조배실이다.
▲용소막 성당의 부속 건물들. 왼쪽부터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 두루의 집, 피정의 집, 오른쪽 석벽 동굴은 성체 조배실이다.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했다. 신자들은 장마 때 물길을 이용해 주변의 배론산, 학산, 치악산 등지에서 목재를 옮겨왔고 지역의 흙으로 벽돌을 구웠다. 그렇게 1915년 현재의 모습과 같은 벽돌조 양옥 성당이 완성되었다. 1941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했다. 1943년 대동아 전쟁 때 일제는 성당에 있는 쇠붙이를 모두 빼앗아갔다. 종은 물론 제대와 회중석을 구분하던 난간까지. 한국전쟁 때의 피해는 더 컸다. 성당은 인민군들의 식량창고가 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은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다. 성당 천장도 총탄의 세례를 받았다.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의 문서는 모두 불에 탔다. 그러나 신자들은 끝까지 성당만은 지켜냈다.

▲용소막 성당과 느티나무.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용소막 성당과 느티나무.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 마당에 다섯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다. 150년이 되었다는 나무는 성당보다 먼저 이곳에 서 있었고 성당과 함께 참혹한 시대를 살았고 이제 성당을 수호하듯 건강하게 서있다.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매끄럽고 윤이 흐르는 마루에 서늘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팔각의 가느다란 기둥 14개가 받치고 있는 아치형 천장은 총탄의 자국 없이 높고 깨끗하다. 제단 한쪽에는 성탄절 트리가 서있고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로부터 은은한 빛이 스며들어 약간 무거운 질감으로 퍼져 있다. 그러나 부드럽다. 부드러움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성당의 과거도,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세계의 모든 악도, 이 공간에서는 생각나지 않는다. 부드러움 때문에 온갖 엄격함과 갖은 분노가 다 걸러진다. 소소한 걱정거리부터 깊은 서러움까지도 무심히 잊는다.

▲성당 옆 언덕 위에 건립된 사제관.
▲성당 옆 언덕 위에 건립된 사제관.

성당의 좌측에는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이 있다. 용소막 성당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그는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된 구약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한 성경학자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내용 중에는 자국어를 사용한 미사의 허용과 분리된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는 교회의 연합 등이 있다. 이때부터 세계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에서는 선종완 신부가 이미 10년 전부터 한국어로 단독 번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최초로 창세기가 출판된 것이 1958년이었다. 한편 그는 1960년에 수녀회를 설립했는데 당시 수녀원 지원 시 필수 조건이었던 ‘학력’에 대한 제한을 없앴다고 한다. 그의 이념은 노동에 근거한 철저한 자립과 봉사였다.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과 동상.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과 동상.

1968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들과의 일치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일환으로 성경을 공동번역하게 된다. 구약을 번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 즉 고고학과 히브리어, 희랍어에 능통한 이는 가톨릭 측에서는 유일하게 선종완 신부였고 개신교 측에서는 문익환 목사였다. 1968년 11월부터 1976년 7월 초까지 9년 동안 번역 작업이 이어졌다. 그 긴 시간의 끝 무렵 선종완 신부는 간암 말기임을 알게 된다. 그는 성모병원에 입원해 1주일 동안 하루 1시간 잠을 자면서 교정을 했고 마지막 교정을 마친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유언은 합심, 인내, 겸손, 가난, 봉사, 그리고 겸손이었다. 유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낡은 책상을 비롯한 유품 380여점과 각종 서적류 300여권이 보관되어 있다.

▲용소막 성당 뒤쪽 언덕에 있는 십자가의 길.
▲성당 뒤쪽 언덕위에 조성되어 있는 성모동산.

유물관 뒤쪽 잣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룬 언덕진 자리에는 사제관이 있고 그 뒤쪽에 수녀원이 자리한다. 피정의 집과 교육관을 지나면 언덕으로 오르는 숲길이 환하고 더욱 깊어진 고요로 들어가듯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언덕은 용의 머리다. 용의 머리 꼭대기에는 성모동산이 펼쳐져 있다. 숲 광장에 성모상이 서 있다. 용소막 성당의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한 기적의 성모 마리아. 언제나 기적은 필요하지만 바로 지금이 여느 때 보다도 훨씬 더 기적이 필요한 때이지 않나요. 들리시나요.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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