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히즘의 숨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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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의 숨은 의미
  • 조현수 능인대학원대학교·철학
  • 승인 2020.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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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질 들뢰즈의 「마조히즘」 읽기: 마조히즘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통해 살펴본 성과 사랑과 자연의 정체』 (조현수 지음, 세창출판사, 192쪽, 2020.11)

고통 속에서 쾌락을 찾는 듯한 모습, 또한 정체 모를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과 이러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과도한 속죄 욕망의 범람, 그리고 엄마(를 상징하는 여인)로부터 가해지는 매질의 고통을 자청해서 받으려 하는 이상한 피학적인 성향, 이 세 가지가 마조히즘을 특징짓는 핵심 증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에 동의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조히스트란 여성(생물학적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나 프로이트가 주로 말하는 것은 남성(생물학적인 남성) 마조히스트의 경우이다.] 들뢰즈가 프로이트와 갈라서게 되는 것은 ‘엄마로부터 벌을 받기를 원한다’는 이 마지막 세 번째 증상의 의미나 위상과 관련해 그가 정신분석학의 이 대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차이는 마조히즘 발생의 진정한 원인론을 둘러싼 이 둘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차이로 전개된다.

프로이트에게 마조히즘이란, 본래 아버지를 향하던 것이던 주체의 사디즘적 공격성이, 주체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진 듯한 아버지라는 존재에 가로막혀, 주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이다. 즉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을 그보다 더 원초적인 것인 사디즘의 방향 전환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보편성과 근원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요구하는 바와 합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속에서, 마조히스트를 매질하는 엄마란 실은 그것의 이면 속에 아버지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 즉 주체에게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안겨주는 진짜 장본인인 아버지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러므로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로 위장하여 숨기고 있는 저 세 번째 증상이란 마조히즘의 진실 위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덧붙여지고 있는 이차적인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 Freud & Deleuze
▲ Freud & Deleuze

하지만 들뢰즈는 마조히스트를 매질하는 ‘엄마’를 ‘아버지’로 바꿔 읽으려 하는 프로이트의 이러한 독법을 거부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마조히스트를 매질하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라는 이 사실이야말로 마조히즘의 진실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논리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며, 그리하여 이 세 번째 증상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믿듯, 마조히즘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덧붙여지는 이차적인 위장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증상들에 선행하면서 이들 다른 증상들을 발생시키는, 마조히즘 발생의 진정한 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에 의해 매질 당한다’는 이 환상이 마조히즘 발생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이처럼 주장하는 것은, 마조히즘의 이 환상이라는 것이 결코 개인이 그의 삶을 통해 사적(私的)으로 겪게 되는 어떤 경험(즉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 환상이란 개인이 겪는 그 어떤 사적 경험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선험적인 것이라는 것, 즉 그 어떤 개인적 경험과도 무관하게 이미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초개인적·초경험적인 것이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삶의 개인적·경험적 차원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것의 이와 같은 선험적이고 초개인적인 존재성이 오히려 모든 개인들에게 그들 각자의 개인적 삶과 관련하여 (결코 그들 각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영원하고 불변적인 어떤 근본적인 삶의 과제를 일깨워 주고 있다는 것이다. 마조히즘의 이 환상이란 틀림없이 어떤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즉 그것에 대응하는 어떤 사실이 객관적인 외부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관의 마음속에서만 떠오르는 한낱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인의 주관이 자의적인 상상력에 의해 꾸며내는 한낱 허구나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에게, 그들이 어떤 개인적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든, 언제까지나 공통적으로 현전할 수 있는 초개인적인 환상인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초개인적인 환상’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의 무의식은 정말로 우리 각자가 어떤 경험적 삶을 살게 되건 이와 같은 경험적 차원의 사실에 관계없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변함없이 동일한 삶의 과제를 일깨우려 하는 이와 같은 초개인적·초경험적·초역사적인 차원의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을 지배하는 이성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세계 이해는 이와 같은 초개인적인 환상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탐구해 온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초개인적인 환상이란 우리가 우리 의식의 어떤 근본적인 전환을 이뤄낼 수 있을 때 그 명백한 존재성을 틀림없이 확인할 수 있는 실체험적 사실이다.

위대한 종교학자 앙리 코르뱅(Henry Corbin)은 이러한 초개인적인 환상을 가리키기 위해 ‘imaginal’이라는 말을 만들어낸다. Image와 관련되는 통상적인 말(불어)인 ‘imaginaire’가 단지 공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널리 쓰이기에, 코르뱅은 단지 주관의 내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순수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주관이 자의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허구가 아닌, 모든 개인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는 ‘초개인적인 환상’의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이 새로운 말(imaginal)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코르뱅에 따르면, 이 imaginal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실재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외부 객관 세계의 실재성을 능가하는 ‘더 실재적인 것’이며, 나아가, 이 ‘더 실재적인 것’이 외부 객관 세계의 진정한 실상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L’Étreinte (1917), Egon Schiele
L’Étreinte (1917), Egon Schiele

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종교와 과학이 보이는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초개인적인 환상의 존재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가 과학과는 달리, ‘의식의 어떤 근본적인 전환에 의한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우리에게 요구해 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와 같은 초개인적인 환상이 외부 객관 세계를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것보다 더 올바르게 우리를 세계의 진리로 이끌어 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프로이트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듯이, 생명을 이해하는 현대과학의 정설인 신(新)다윈주의neodarwinism의 이론과 완전한 정합(整合)의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사실을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를 결정적으로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이유로 받아들인다. 실로 욕망과 무의식이란 생명의 자기표현일 것이기에,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어떤 이론이 생명에 대한 현대과학의 이 정설에 의해 지지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이론의 개연성을 크게 높여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신다윈주의의 이해란 또한, 다른 한편, (생명 이외에 물질 또한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자연 전체에 대한 현대 과학의 이해와 완전한 정합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신다윈주의의 위대한 이론가인 자크 모노에 따르면, 신다윈주의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론들 중에서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현대 과학의 이해방식과 완전한 정합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며, 이 사실이 신다윈주의가 생명에 대한 이해를 두고 그것과 경쟁하는 여러 다른 이론들을 물리치고 과학의 정설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이론과 신다윈주의 사이의 정합 관계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자연 전체에 대한 현대 과학의 이해 사이의 정합 관계로 연장된다.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과 생명에 대한 현대 과학의 정설인 신다윈주의 이론, 그리고 자연 전체에 대한 현대 과학의 지배적인 이해방식, 이 세 가지는 서로가 서로를 내포하고 서로가 서로를 요구하는 한통속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어느 하나가 옳으면 다른 것들도 그럴 수 있으며,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들도 무너져야 하는 일체(一體)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대한 그의 이해를 통해 바로 이 삼각 연대의 한 축인 프로이트의 이론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를 정신병리적 현상이라는 좁은 문제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생명과 자연 전체의 본성을 다시 생각해 보려 하는 웅대한 존재론적 기획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현수 능인대학원대학교·철학

서울대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베르그송의 생명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성, 생명, 우주』, 역서로는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 있다. 현재, 철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서 수행해 가고 있는 것과 함께 켄 윌버와 같은 명상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자아초월(transpersonal) 심리학’에서 그간 철학에 기대해 왔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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