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취약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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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취약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0.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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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 이택선 지음 | 미지북스 | 352쪽

이 책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관점에서 객관적,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는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따라 핵심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 재정 및 조세 기구의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과 국제정치적 배경을 살폈다. 21세기의 국가 건설 사례들과 비교해보아도 턱없이 부족한 자원을 가졌던 대한민국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모범적이면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또한 취약국가에서 출발하여 숱한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노출된 취약성이 어떻게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을까?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 중 하나인 ‘수정주의’는 한국이 처음부터 과대 성장 국가로 출발했다고 말해왔다. 과대 성장 국가론은 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시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에 근대적인 관료 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국가기관들이 비대하게 성장하여 사회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국은 처음부터 물적ㆍ인적 자원이 부족하여 국가기구가 허약한 취약국가로 출발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한국은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모든 자원이 부족한 취약국가였다.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 같은 안보 자원뿐만 아니라 재정과 인력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족에 허덕였다. 국가는 부족한 물적 자원의 대체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군사적 위험, 국내에 발생한 광범위한 저항과 반란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 이념은 수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국가는 부일 세력과 우익 단체를 국가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안보 위기를 넘겼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력과 유혈, 국가범죄로 인해 정치적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념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민족주의적 대의명분과 정치적 정통성은 높으나 국가 관료로서의 능력은 떨어지던 인물들이 국가 건설 과정 초기에 기용되면서 국정 운영에 차질과 비능률이 발생했고, 전문가들이 이들을 대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그 이후로도 반공과 반일이라는 이념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었고, 건국 초기부터 노정된 취약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분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토지개혁과 의무교육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귀속감이 증대했다. 이를 지켜본 중도파들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가 건설에 대거 참여해 정치적인 정당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성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ㆍ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책으로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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