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은 왜,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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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은 왜,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가?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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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왕의 공부: 조선 왕은 왜 평생 배움을 놓지 않았을까 | 김준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32쪽

스스로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던 조선 왕은 매일 공부에 열중했다. 나랏일을 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수많은 유학 경전과 역사서, 실용서를 공부하고 쉴 새 없이 국정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배움의 수준을 시험받고 능력을 검증받았다.

조선 왕은 과연 무엇을 공부했을까? 이 책은 자신을 수양하고, 나라를 경영해야 했던 완벽한 공부의 대가, 조선 왕이 왜,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왕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고, 인재를 잘 등용해 나라를 운영할 책임이 있었다. 또한 옛 성현이나 선왕들이 남긴 교훈을 토대로 위기를 이겨내거나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 왕은 경연에 나가 신하의 의견과 비판을 잘 수용하고 경청하는 태도를 배웠다. 이처럼 평생 배움을 놓지 않았던 조선 왕의 공부에서, 무겁고 막중한 일을 해낸 원동력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왕은 평생 공부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왕은 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하는 자다. 이 과업을 완수하려면 성현의 학문을 배우고 성현의 마음가짐을 본받아야 한다.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와 난제가 산적해 있어도, 조선 왕은 정밀한 공부와 한결같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도(道)에 뜻을 두고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 세상을 태평성대로 만드는 것도 군주의 손에 달려 있고, 욕심에 뜻을 두고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 세상을 말세로 만드는 것도 군주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 것처럼, 왕이 짊어진 사명은 매우 막중했다. 그러므로 조선 왕은 스스로 성군이 되길 목표로 삼고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평생 공부했다.

저자는 왕이 왜 공부를 했는지, 좋은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마음 수양’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치우치거나 과잉되면 중심을 잃고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왕은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아무리 탁월한 왕이어도 혼자 힘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인재를 등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한편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므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능력을 갖춰야 하고,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가치 기준과 지혜도 필요하다. 임금은 이와 같은 역량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학문과 지식을 공부했다.

조선 왕은 얼마나 많은 것을 공부하고 알아야만 했을까? 이 책에서는 왕이 공부했던 학문과 지식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왕에게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대학(大學)》 등의 ‘사서’와 《역경(周易)》, 《시경(詩經)》,《서경(書經)》 등의 ‘삼경’은 사사로운 욕망을 가라앉히고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 도덕을 구현하고 마음을 맑게 해주는 필수 경전이었다. 이밖에도 《국조보감(國朝寶鑑)》, 《자치통감(資治通鑑)》, 《춘추(春秋)》,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역사서는 왕이 어떤 자세로 정치에 임하고, 왕에게 필요한 통치 기술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기출문제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병법, 어학, 글쓰기, 의학, 음악, 풍수지리 등 다양한 실용 학문까지 공부하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 결국 자신을 지키고,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모든 지식을 다 공부한 셈이다.

▲ 왕의 공부 (KBS역사스페셜 화면 캡쳐)
▲ 왕의 공부 (KBS역사스페셜 화면 캡쳐)

왕들은 경전이나 역사적인 논거도 일일이 직접 확인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 세종이 치열하게 음운학을 공부했던 것처럼, 신하들에게 맡기고 전문가에게 임무를 준 다음 확인만 할 수 있는 일도 직접 관여했다. 정말 꼭 이루고 싶은 일이라면 자신이 그 일의 최고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보조가 있다고 해도 내가 내용을 장악하지 못하면 일을 성공시킬 수 없다.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적절한 결정을 내려주려면 신하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읽고, 보고, 깨우쳐야만 했다. 책임은 전적으로 왕이 지는 것이었기에 그 중압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조선에는 ‘경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왕과 삼정승을 비롯한 의정부의 재상들, 대제학, 홍문관의 신진 관리들, 대간, 명망 높은 학자들이 모여 유학 경서와 역사서를 강론하고, 그와 관련된 정치 문제, 정책 현안을 논의한 자리다. 이 시간에는 정식 회의보다 훨씬 자유롭고 진솔한 의견이 오고 갔다. 경연을 통해 왕은 자신을 반성하고 신하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배우려 했다. 예를 들어 세종은 “경연에 임어했다”는 표현이 2,000건 이상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수시로 경연을 진행했으며, 정조는 신하들의 수준이 마뜩잖아 경연과 소대의 횟수를 줄이고 오히려 신하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경연에 참석했던 왕들이 곧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은 존귀한 자리다. 쉽게 권력에 취해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만해질 수 있으며, 자신의 말 한마디에 복종하니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이를 경계하며 세종은 “임금은 포용을 도량으로 삼아야 한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도 반드시 경청하여 그 말이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맞지 않더라도 죄주지 말아야 한다. 이는 임금이 백성의 사정을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라고 했다. 왕은 경청에 힘써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검증받고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이끌고, 만물을 교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신(日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공부하면서 제대로 수양하고, 실천하고, 고쳤는지를 살필 때 자신도 새롭게 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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