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령 반포 전후 우리의 법문화는 어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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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 반포 전후 우리의 법문화는 어떠했는가?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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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왕권과 법: 한국 고대 법제의 성립과 변천 | 김창석 지음 | 지식산업사 | 380쪽

율령 반포 전후 우리의 법문화는 어떠했는가? 이 책은 비문, 목간으로 실감하는 고대사이자, 옛 법으로 보는 사회문화사로 율령법 이전의 고법古法의 실체를 규명하여 한국 고대 법제를 체계화시킨 역작이다. 고대 유통경제와 대외교역이라는 굵직한 주제에 몰두해 왔던 저자는 이 책에서 법이라는 창窓을 통해 고대 집권체제의 관제 및 행정 기능 변천에 따라 고대 법의 발달 단계를 체계화시킨다.

지금까지의 한국 고대 법제 연구에서는 대부분 신라 율령의 계통성에 집중해 왔다. 외래법(계수법繼受法)과 고유법을 상하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우선 율령 반포 이전의 고법古法에 착안하는 것으로 그 돌파구를 찾는다. 고유법 자체의 발전과정을 탐색함으로써 계수법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이때 왕권은 법제의 추이와 연관되는 핵심어가 된다. 이에 따라 제사장이기도 했던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제정 미분리 사회의 신정법神政法의 관습법 단계였다면, 점차 왕권이 세속권력화한 진한辰韓 소국 이전부터 이사금기는 소국법小國法 단계로 규정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국왕의 상황 판단과 명령 하달이 행정의 발단이며 가신家臣과 같은 존재들이 행정의 전면에서 활약했다.

‘형성’의 관점에서 고대 법속의 단계를 추적해 나가는 저자가 중요한 전환기로 꼽는 것은 3~5세기 사로국이 고대국가로서 성립되는 과정이다. 그간 이 시기의 법과 행정기능의 연관성은 주목받지 못한바, 저자는 가신이 아닌 관료집단, 곧 초기 관부 성립에 따른 행정구조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사로국이 연맹체에 소속된 소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남당南堂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6부의 협의체제가 성립되면서 주요 정책이 공론共論을 거쳐 “교敎→령令”의 흐름으로 하달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교령법敎令法”이라고 명명하고, 〈포항 중성리비〉와 〈포항 냉수리비〉에서 그 실례를 입증하면서, 소국법의 국지성局地性 극복과 함께 판례의 축적이라는 교령법의 의의를 언급한다. 부체제部體制 시기의 법체계인 교령법은 역설적으로 부의 사법권을 왕권으로 집중시킴으로써 부체제를 허무는 결과를 낳았고, 마침내 율령법의 성립으로 왕권 중심의 일원적 체제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비문으로 교령법을 분석한 다음 저자는 목간을 통해서 백제와 신라 율령법의 성격을 논증해 나간다. 지방관부가 작성하여 수발한 공유지 요역 수취 공문서라고 할 수 있는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에서는 7세기 초 직접지배 방식을 통한 지방 지배의 단면이 확인된다. 가야5598 목간은 60일 동안의 역역이 도중에 중단된 경과와 내역에 대한 보고로, 지방 행정의 집행 과정을 추론케 하며 행정령 가운데 ‘某法’ 형식으로 표기된 법률의 추가 사례로 대법代法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저자는 신라 중대 율령 단계에서는 중고기와 달리 수·당의 제도를 지향했다면서, 7세기 중엽 당으로부터 수용된 격·식은 추보追補로 율령법을 보완해 나가는 방식을 더욱 수월하게 하였음을 한눈에 보여 준다.

“법체계 자체의 발전선상”에서 율령을 재해석하는 이 책은 단선적 이해의 틀에 갇혀 있었던 기존의 율령 연구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풍성하고도 논리적인 방법으로 우리 법문화를 조명한다. 특히 저자가 언급했듯이, 고대 정치체에서 확인되는 교령법이 동아시아 차원으로 범위를 넓혀 고찰된다면 동아시아 율령 논의를 한 단계 성숙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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