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정신은 인간의 본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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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정신은 인간의 본성인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12.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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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26강>_ 이진우 포항공과대학교 석좌교수의 「인간의 본성과 정신: <빈 서판> <인간 등정의 발자취> <사피엔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5. 근대 과학과 인간의 삶’ 제 26강 이진우 교수(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의 강연 중 주요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진화하는 정신은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동물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교수는 “지식의 발전 단계에서 특히 ‘과학(episteme)’과 ‘기술(techne)’이 인간을 독특한 동물로 만들었다”고 할 때, 즉 ‘앎’이라고 이를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오늘날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과학과 기술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인간 본성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다시금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지적 도구로서는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세 책의 논의를 빌려온다. 그렇게 하여 “우선 인간 본성에 관한 현재의 논의를 핑커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고 “브로노우스키와 하라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본 다음, 끝으로 21세기 새로운 인간을 꿈꾸는 문명 전환기에 인간 본성의 필요성”을 알아보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 지난 11월 14일, 이진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11월 14일, 이진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인간 본성의 질문이 필요한 시대

인간의 본성과 정신을 얘기할 때마다 직면하는 첫 번째 어려움은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는 철학에서 도덕을 거쳐 정치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함의를 갖고 있다. 광범위하다는 것은 특정할 수 없기에 동시에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인간이 ‘본디부터’ 가진 특성과 성질을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그 처음부터 인간이 자연스럽게 가진 특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본성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가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존재’라는 개념에 대한 세 가지 선입견은 ‘인간 본성’에도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본성 역시 가장 보편적이고, 정의될 수 없으며, 자명한 개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철학적, 도덕적, 정치적 맥락에서 진부하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하여 인간 본성에 대해 물어야 하는가? 지금 기계가 인간을 넘어서는 특이점이 다가온다고 한다. 우리는 휴머니즘이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넘어가는 문명의 전환기를 마주하고 있다. 문명 전환기에 위태로워진 것은 ‘인간 본성’이다. 현재의 인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과 기술에 의해 향상된 능력을 갖춘 새로운 인간, 즉 인간을 넘어선 인간인 포스트휴먼이 탄생하려 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추구하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인간 본성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이 새롭게 제기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한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확실할 때, 우리는 대개 과거를 되짚어본다. 인간 본성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인간 본성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미래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과거로 되돌아간다. 한 가지 질문이 이 역사적 성찰을 동행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였는가?’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철학자들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역사학자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Sapiens)』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대서사를 얘기하고 있으며,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빈 서판(The Blank Slate)』에서 인간 본성을 부정하는 현대 사상과의 대결을 통해 인간 본성의 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인류의 초상화를 그리고, 13부작으로 구성된 BBC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를 통해 과학의 대중화에 많은 영향을 준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는 인간의 문화적 진화를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신’과 ‘인간 본성’이다. 셋은 모두 인간이 정신을 가진 특이한 생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인간은 정신과 함께 비로소 출현하고 등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독특한 재능인 ‘정신’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인가?

이러한 원천적인 재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앎의 학문 ‘과학’이다. 오늘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물론 철학도 앎의 학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철학으로부터 과학으로의 이행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앎의 진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이 오늘날 인간 본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과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첫 문장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추구한다. 지각에 대한 사랑이 이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유용성이 없는데도 지각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앎은 인간의 본성이다. 지식의 발전 단계에서 특히 ‘과학(episteme)’과 ‘기술(techne)’이 인간을 독특한 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 본성이라면, 오늘날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과학과 기술은 무엇인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인간 본성은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우리는 우선 인간 본성에 관한 현재의 논의를 핑커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브로노우스키와 하라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본 다음, 끝으로 21세기 새로운 인간을 꿈꾸는 문명 전환기에 인간 본성의 필요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인간 본성의 과학적 인식: 인간성은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인간 본성(human nature)’이라는 용어 자체가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어진 ‘자연(nature)’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 본성이 어떻게 발전되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가 과학적 방법으로 인간 본성을 해명하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언어 역시 진화를 통해 발전된 내부 장치(모듈)로서 일종의 본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정신 현상이 이미 진화의 산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간 본성도 자연 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진 선천적 메커니즘으로 이해된다.

핑커의 인간 본성 이론은 인간에게는 진화를 통해 형성된 보편적인 정신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압축된다. 핑커에 의하면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간 본성 이론은 ‘빈 서판’으로 대변된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고유한 구조와도 무관하며, 사회나 그 자신이 그 위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새겨 넣을 수 있다”는 현대의 확신을 핑커는 “빈 서판”이라 지칭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적 확신은 간단히 말해 “인간 본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종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의 이론들도 종교가 담당했던 몇몇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빈 서판은 현대의 지식 세계에서 세속 종교가 되었다”라고 한다.

핑커는 현대 지식 세계를 지배하는 빈 서판의 종교적 성격을 파헤침으로써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지과학, 행동 유전학, 진화 심리학 같은 새로운 과학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거의 종교적으로 확신하는 빈 서판 이론은 어떤 것인가? 핑커에 의하면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의 이론은 “논리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실제로는 함께 발견되는” 세 가지 학설로 대변된다. 핑커는 철학에서 각각 경험론, 낭만주의, 이원론으로 불리는 이 학설들을 훨씬 더 감각적으로 “빈 서판(The Blank Slate), 고상한 야만인(The Noble Savage),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으로 명명한다. 이 학설들은 각각 존 로크, 장자크 루소, 르네 데카르트를 기원으로 하지만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및 행동을 학습이라는 매우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공통 전제로 압축된다. 인간의 행동은 궁극적으로 학습을 통해, 다시 말해 경험과 환경을 통해 결정된다는 ‘행동주의’가 세 학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믿음과 욕망과 같은 인간 본성을 완전히 추방하고 그것을 자극과 반응으로 대체했으며, 사회과학은 인간이 사회와 문화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회 구성주의’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핑커에 의하면 정신과 의식이라는 비물질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적어도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경험적 증거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사상과 행동은 자연 법칙을 따르며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핑커는 이 점에서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강화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

오늘날 인지과학, 신경과학, 유전학과 같은 새로운 마음의 과학들은 마음이 일종의 물리적 과정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마음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마음은 물리적 세계와 분리되지 않으며, 뇌라는 장치로 설명된다. 현대적 인지혁명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명제로 압축된다. “정신세계는 정보, 연산, 되먹임(feedback)의 개념을 통해 물리적 토대를 가질 수 있다.” 이제까지 인간만의 독특한 정신 작용이라고 생각했던 추론, 지성, 상상, 창조는 뇌의 정보 처리 형식들이며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물리적 과정이다. 마음의 현대 과학은 마음의 빈 서판에 이제 진화를 통해 형성된 학습 메커니즘을 써넣는다.

진화에 대한 믿음 여부가 결국 인간 본성을 둘러싼 전쟁의 전선을 형성한다. 핑커와 같은 진화심리학자는 진화를 믿기 때문에 마음도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마음 과학들이 인간 본성의 인식 지평을 넓혔다는 것은 확실하다. 핑커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인간 본성이 갈수록 마음의 과학, 뇌, 유전자, 진화 등에 의해 설명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평등, 진보, 책임, 개인의 가치라는 우리의 이상에는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 마음이 설령 진화로 형성된 적응 특성이라고 하더라도, 이 적응 능력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화 현상은 적응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평등, 진보, 책임, 개인의 가치와 같은 인간의 이상은 어떻게 진화한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결국 인류의 시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3. 인간 본성의 역사: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인가? 또는 언제부터 더 이상 인간이 아닌가?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이기 시작하였으며, 왜 다른 동물과 다른 본성을 갖게 되었는가를 물을 때 비로소 인간 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 본성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우리가 인간 본성의 역사를 성찰할 때 비로소 인간 본성에 관한 물음이 철학적 문제가 된다. 이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첫 문장이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즉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를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와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진화를 믿지만, 핑커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인간 진화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핑커에게 진화의 역사가 사람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동일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동일성의 역사’라면,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진화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차이의 역사’이다.

인류의 등정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는 ‘뇌’에 있다. 숲이라는 3차원 공간에 살기 위하여 영장류의 복잡한 뇌가 발전한 것처럼, 인간은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훨씬 더 복잡한 뇌를 진화시켰다. 오늘날 인간의 사상과 행동의 기원과 원인으로 인식되는 뇌의 진화가 인간을 탄생시킨 것이다. 문명의 가능성을 이해하려면 뇌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뇌가 커져서 인간이 된 것인가 아니면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 때문에 뇌가 커진 것인가? 7만 년 전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탄생한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인 인간은 어떻게 오늘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는가? 한때 그것도 오랜 기간 동안 사바나의 패배자였던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하라리와 브로노우스키는 똑같이 이 질문을 제기하면서 “인간은 엉성한 생존 장비로 모든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는 인간 조건의 역설”에 주목한다.

문제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발전했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이 뇌를 갖고 어떻게 진화하였는가의 물음이다. 인간이 단순히 환경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일련의 발명을 통해 자기 환경을 개조해왔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브로노우스키가 ‘인간의 등정’을 얘기할 때 그것은 “생물학적인 진화가 아니라 문화적인 진화”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 환경에 적응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엄청난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등장한 문화는 생물학에서 독립하여 끊임없이 발전한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의 발전과 변화를 역사라고 부른다. 이 역사는 인간을 독특한 위치에 올려놓은 “인간의 정신사”이다. 하라리는 “인지혁명 이후에는 생물학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 서사가 호모 사피엔스의 발달을 설명하는 일차적 수단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였는가? 인간을 비로소 인간으로 만든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은 무엇인가?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은 상상력의 자질 때문에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상상력 덕택에 서로 다른 재능을 결합하여 계획을 세우고 발명과 새로운 발견을 한다. 브로노우스키에 의하면 상상력은 미래를 예측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상상력은 외부 환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브로노우스키는 “세계 속의 세계”라는 장에서 물질의 내부 구조를 인식하는 과정에도 상상력이 엄청난 역할을 하였음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 밑에 놓여 있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항상 상상적인 것이며 이미지의 유희이다. 자연에서건, 예술에서건, 과학에서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해서 달리는 얘기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정신사는 상상력의 역사이다. 인간은 상상력 덕택에 엉성하기 짝이 없는 생존 수단을 갖고서도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하라리는 인류 문화가 발전해온 역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사피엔스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정복의 역사다. 하라리는 세 개의 혁명이 이러한 역사의 진로를 형성하였다고 말한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이런 혁명을 통해 지구의 주인이 된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혁명을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혁명이 인간을 비로소 인간으로 만드는 특성을 산출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언어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종차적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로 표현된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동물이다(zoon logon echon).” 사피엔스의 언어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사피엔스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사피엔스의 언어는 우선 환경에 관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둘째로 무리에서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뒷담화를 통해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며, 셋째로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함으로써 대규모의 협력을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게 한다.

인류의 등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 인간의 상상력을 통한 허구적 이야기라면, 오늘날 과학은 전 인류를 하나로 묶는 신화가 되었다. 현대인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새로운 힘을 획득할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정치와 경제의 연대, 즉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동맹을 통해 실현된다. 하라리는 현대 과학과 전통적 지식의 차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용의;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3. 새 힘의 획득.”

그런데 현대인에 의한 무지의 발견은 결코 겸손과 자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학적 연구와 그 대상을 무한히 확대한다. 과학혁명은 무지의 역설이다. 이러한 태도는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협력하게 만들어주었던 신화에까지 적용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적인 가치와 취향, 종교적 태도가 다르더라도, 또 개인이 속한 국가가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을 추구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믿음은 한결같다. 하라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과학 자체도 스스로의 연구를 정당화하고 자금을 공급받으려면 종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에 의지해야 한다면”, 과학은 이제 오늘날 대표적인 세속적 종교가 되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완전히 별개의 분야이던 과학과 기술이 결합하여 오늘날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학과 기술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기술 시대’이다. 21세기의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죽음의 문제마저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과 기술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과학과 기술이 진보의 믿음과 유토피아의 이상과 결합함으로써 진화의 과정마저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변화의 끝은 어디일까? 인류 문명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이 지점에서 하라리와 브로노우스키는 인류의 진화가 시작된 과거를 바라본다.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이 된 동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후기에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 본성을 보존하려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 창조된 미래의 인간을 예견할 수 있는 상상력을 그 어느 때보다 필요로 한다.

4. 인간 본성의 미래와 미래의 역사

오늘날 마음에 관한 과학적 발견과 마음의 진화 과정을 서술한 역사적 서사는 모두 마음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인류의 역사를 자유 의식의 진보로 파악한 헤겔이 일찍이 인식하였던 것처럼 마음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마음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구조, 즉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인간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가 간단하게 천명한 것처럼 인간은 확정되지 않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확정되지 않은 동물, 미래의 방향이 철저하게 열려 있는 동물에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 본성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역사를 그려보려면, 우리는 인간 본성의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인간 본성의 미래는 어떠한가?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은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 의해 인간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 생명과 진화의 게임 규칙을 바꾸려 한다. 하라리에 의하면 “지금 인류는 자연 선택을 지적 설계로 대체하고, 생명을 유기적 영역에서 비유기적 영역으로 확장할 태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의 긴 과정을 통해 형성된 본성 덕택에 지구의 주인이 된 인간이 이제는 자신의 본성을 바꾸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찰은 인간 본성을 뒤돌아보게 한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정신’(마음)이 있기 때문에 생물의 역사인 진화와 함께 정신의 역사인 문화가 있다. 마음의 현대 과학과 인류의 역사학은 모두 이 점에 동의한다. 인간의 문화적 진화는 어떻게 가능하였으며, 인간 본성은 이 정신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인간 본성과 인간 문화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 본성은 미래의 바람직한 인간성에 관한 성찰의 토대이고 동시에 그 결과이다.

인간 본성은 차이의 성찰이다. 핑커는 인간 본성에 관한 빈 서판 이론을 비판하면서 “인간에게는 본성이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역사이다.”라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핑커는 빈 서판 이론을 발전시킨 로크의 본래 의도를 오해한 것처럼,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명제를 왜곡한다. 로크는 결코 내부의 정신 작용을 주도하는 구조가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을 토대로 어떻게 지식이 형성되는가의 문제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명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가진 것은 본성이 아니라 역사뿐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의 인간적 가치는 우리의 본성을 갖고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본성과 인간적 문화적 가치의 차이다.

스티븐 핑커는 생물학적 본성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 본성”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을 달고 있는 3부에서 인간 본성의 미래를 성찰할 방향을 암시한다. 핑커의 의도는 물론 빈 서판 옹호론자들이 인간 본성을 반대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다. 핑커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 본성을 반대하는 것이 네 가지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 첫째, 인간의 모든 차이와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빈 서판 옹호자들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인간 본성을 받아들이면 차별 자체를 합리화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그러나 빈 서판을 부정하는 새로운 마음의 과학자들은 실제로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는 심리학적 통일성에 더 주목한다. 사람들은 질적으로 같지만 양적으로만 다르고 그 양적 차이도 생물학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생물학적 인간 본성 이론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우리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이라는 본성을 받아들이면 도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을 수 있다.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에 진화의 산물은 그 자체 정당화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자연주의적 오류는 자연과 가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것이 생물학적으로 설명된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가치는 무엇이 인간적인가에 대한 이해와 평가의 문제이지 설명의 문제가 아니다.

셋째, 우리의 행동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인간 본성 이론을 따르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개인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행동유전학과 진화심리학은 특정한 행동을 인간 본성의 맥락에서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행동의 무죄를 입증하지는 않는다. 결정론이 생물학적 문제라면, 자유의지는 도덕적 철학적 문제다.

넷째, 인간 본성을 받아들이면 결정론이 미래에까지 확대되어 우리의 삶이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발생한다. 브로노우스키와 하라리는 인간을 독특한 지위로 올려놓은 것이 미래에 대한 예견과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설정하고, 미래의 목적을 세운다. 인간은 좋고 싫은 것을 선택하고, 인간에게 선을 가져다 줄 목적을 선호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을 도덕관념이라고 한다. 인간 본성은 종으로서의 인류가 갖고 있는 보편적 특성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구체적 삶과 행위의 주체인 개인의 실제적 동기를 고려해야 한다.

모든 시대는 자신의 인간 본성 이론을 갖고 있다.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인간은 자신이 어떤 인간이기를 바라는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류의 목소리가 아니라 개인의 목소리다. 인간 정신이 다양성을 향해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개성과 차이를 증대시키는 정신문화가 미래에도 가능할지 모른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이러한 차이를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인간 본성을 만들려고 한다.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수치화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오만 때문일 수도 있다.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이 신의 지식을 갖고자 할 때” 이런 짓을 한다고 경고한다. 하라리는 이미 “신이 된 동물”을 예견한다. 하라리의 경고는 단순하지만 섬뜩하다. “우리는 몸과 뇌를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할 것이다.” 실제로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인간 인류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들의 마음이다. 우리가 주어진 생물학적 조건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존재를 만드는 것은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정신을 가진 동물인가? 아니면 정신이 없는 기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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