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의 금령(禁令)과 풍기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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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의 금령(禁令)과 풍기단속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12.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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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⑬_ 한양 금령(禁令)과 풍기단속

사극 <천명>과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

“야심한 장통방 거리. 무섭게 쳐대는 천둥번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 의금부 관군들의 추격을 받으며 의식을 잃은 어린 계집을 업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달리는 사내.
찢어진 나장 관복에 봉두난발의 상투 머리, 고신의 흔적인 듯 얼굴과 목덜미의 크고 작은 상처가 번개의 번쩍임 속에 선명히 드러난다. 도망자 최원이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그의 찢어진 옷 사이로 배어나오는 피!”

2013년 KBS에서 방영된 <천명>의 제1화 도입부의 설정을 옮긴 것이다. <천명>은 인종 독살음모에 휘말려 도망자가 된 조선 최고의 딸 바보인 내의원 의관 최원이 딸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은 팩션 사극이다.

▲ 사극 천명 포스터
▲ 사극 <천명> 포스터

그런데 한밤중에 한양 도성 안에서 일어난 광경을 묘사한 위의 내용에서 필자는 도망자 최원이 당시 한양 주민들에게 내려진 금령(禁令) 두 가지를 어기고 있음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통행금지 위반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는 궁궐과 관청이 밀집해 있고, 국왕과 왕실가족, 그리고 많은 관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므로 방위를 위한 여러 가지 규제가 불가피했는데, 특히 도성 안이 훨씬 엄격했다. 당시 도성과 궁궐은 열고 닫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밤중에는 관료부터 일반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의 통행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도망자 최원은 이 통금을 어기며 장통방, 즉 지금의 종로1가 일대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도성 안에서는 관리가 말을 타고 질주하는 행위도 금지되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속도 제한과 유사한 조치인데, 관료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수도에서 소란을 막기 위해서다. 심지어 종묘 앞길이나 대궐 문 앞에서는 아예 말에서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다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세종 11년에 마련된 조치이다.

<천명>에서 극 중 최원은 의금부에 쫓기는 절체절명의 도망자로 나온다. 그의 절박한 처지를 감안한다면 도성 내 금령 준수 여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다.

한양의 여러 가지 금령

방금 한양에서 해서는 안 되는 행위 두 가지를 소개했는데, 사실 이 외에도 한양 도성 안에는 여러 금령(禁令)이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예악과 문물을 갖춘 수도의 풍기를 규제하고 방비를 보다 철저히 하기 위한 제반 조치는 불가피하다. 그럼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당시 내려진 금령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탈 것에 대한 규제이다. 앞서 도성 안에서 말을 질주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일반 평·천민의 경우는 아예 말을 타지 못하게 했다. 말뿐만 아니라 소, 나귀, 노새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일반 백성이나 천민이 소나 말을 타면 이를 압수하고 장 80대를 치도록 하였다.

또한 가마 타는 것도 엄격히 제한했다. 그래서 양반 관료와 그 가족들은 품계에 따라 탈 수 있는 가마도 달랐다. 특히 가마 앞뒤에 말을 동원하고 4명의 가마꾼을 배치한 화려한 가마인 쌍교(雙轎)는 원래 2품 이상 관리와 관찰사, 승지를 지낸 사람이 타는 것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유독 도성 안에서는 국왕과 그 가족 외에 어느 누구도 탈 수 없게 하였다.

▲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속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 쌍교(雙轎). 가마 중에 가장 화려한 이 쌍가마는 쌍마교(雙馬轎), 가교(駕轎)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이나 그 가족 외에는 아무리 높은 관리라도 도성 안에서 타는 것이 금지되었다.
▲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속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 쌍교(雙轎). 가마 중에 가장 화려한 이 쌍가마는 쌍마교(雙馬轎), 가교(駕轎)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이나 그 가족 외에는 아무리 높은 관리라도 도성 안에서 타는 것이 금지되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 건국 초기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중이 과붓집에 들어가는 것을 간통으로 간주하여 처벌했는데, 세종 때부터는 부모를 만나는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이 한양 도성 안에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무당 또한 중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1471년(성종 2) 당시 성중에 거주하던 무당들을 도성 밖으로 축출하였는데, 이후 무당들의 도성 출입이 통제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전국에 시행된 3대 주요 금령을 삼금(三禁)이라 하는데, 이는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을 말한다. 소와 말을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우금이고, 흉년에 곡식 소비를 막기 위해 술을 빚거나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금이며, 소나무를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 송금이다. 이들 삼금은 한양 도성 안에서도 주민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금령이었다.

이 외에도 신분에 어긋난 각종 사치를 금한다는 명목으로 주거, 의복, 장신구, 식생활 등에서 여러 가지 규제가 있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도성 내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법령 적용도 엄격하였고, 수도라는 지역적 특성상 특별히 시행된 규제도 많았다.

범법행위 일제 단속, 출금(出禁)

법으로 금령을 마련한다고 해도 정기적으로 단속하지 않으면 느슨해지기 쉽다. 지금도 음주 운전자에 대한 주기적인 단속이 시행되듯이 조선 한양에서 금령을 위반한 범법자들에 대한 일제 단속이 이루어졌으니 이를 ‘출금(出禁)’이라고 불렀다. 이 출금은 사헌부, 형조, 한성부 등 삼법사(三法司)가 수행했다. 지금의 감사원과 검찰을 겸한 사헌부, 법무부에 해당하는 형조,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한성부는 조선왕조의 세 개 핵심 사법기관이었다.

출금 때가 되면 세 기관의 아전들이 한양 내의 여러 곳을 돌며 단속을 시작하는데, 이들 단속반원들을 금리(禁吏)라 하였다. 이들은 단속 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나무로 만든 금패(禁牌)를 차고, 정해진 시간, 인원수를 지키며 위반자를 적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 한양 도성 안 모습.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는 출금을 담당한 사헌부, 형조, 한성부가 모두 자리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해동지도』 수록.
▲ 한양 도성 안 모습.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는 출금을 담당한 사헌부, 형조, 한성부가 모두 자리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해동지도』 수록.

또한 각 기관별로 중복해서 적발하는 혼선을 피하기 위하여 숙종 때 각 기관별 적발 대상을 서로 구분하였는데, 1688년(숙종 14)에 마련된 규정에는 다음과 같다.

형조는 육의전(六矣廛) 이외에 허가받지 않은 난전(亂廛)의 상행위 단속, 사용이 금지된 종이로 만든 신발인 지혜(紙鞋) 착용자의 적발을 주로 담당하였다. 또 한성부에서는 소나무 벌목 행위자, 호패를 차지 않은 자들의 색출을 맡았다.
반면 사헌부에서는 앞의 두 기관과 달리 단속 범위가 훨씬 광범위했는데, 의복, 탈 것, 기물, 음식 등 신분에 따라 정해진 규정을 벗어나는 사치 행위자 전반에 대해 단속하였다. 예를 들어 도성 내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행위, 관원 등급별로 허용된 범위를 초과하여 고급 가마를 타는 행위, 혼례와 제사·장례 때에 정해진 범위를 넘어 사치하는 행위, 일반 백성의 여성이 사라능단(紗羅綾緞)과 같은 고급 비단을 착용하는 행위, 주택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양반이 여염집의 주인을 내쫓고 집을 차지하는 행위 등이 사헌부 단속 대상 중 하나였다.

한편 소나 말의 도살자에 대한 색출, 경성 5리 내에 신사(神祀)를 설치한 것에 대한 단속은 세 기관이 공동으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세 기관 중에서도 사헌부가 한양 도성 내의 범금 단속의 중추 기관이었다고 하겠다.

단속에 얽힌 이야기들

삼법사의 금령 단속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예컨대 1688년(숙종 14) 11월에 훗날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어머니가 연루된 사건이다. 당시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자 그녀의 어머니가 산모를 돌보기 위해 8명이 메는 옥교(屋轎)를 타고 궁궐에 들어와서 문제가 되었다. 소의 장씨는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서 중인 출신이므로, 법대로 한다면 그 어미는 옥교를 탈 수 없었다. 원래 옥교는 고위 관료인 당상관의 어머니, 처, 딸, 며느리만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안 사헌부 지평 이익수(李益壽)는 금리 등 관속들을 보내 가마를 메고 온 종들을 붙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크게 노하여 단속을 맡은 관속들을 내수사(內需司)에 가두어 매를 때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숙종은 궁녀가 출산에 임박해서 그 어미가 궁궐 안에 가마를 타고 들어온 것은 관례이고, 또한 장씨의 어미가 ‘입(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구리패를 지니고 있어 왕명으로 입궐한 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문제 삼은 것은 왕을 모욕한 처사라며 흥분하였다. 반면 언관들은 가둬 둔 사람들을 풀어 줄 것과 가마를 불살라 왕이 스스로 법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며 맞섰다.

▲ 장희빈의 사당인 대빈궁(大嬪宮) 전경. 현재 청와대 근처에는 대빈궁을 포함하여 조선 국왕을 낳은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 칠궁(七宮)이 위치하고 있다.
▲ 장희빈의 사당인 대빈궁(大嬪宮) 전경. 현재 청와대 근처에는 대빈궁을 포함하여 조선 국왕을 낳은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 칠궁(七宮)이 위치하고 있다.

결국 신하들의 빗발치는 요구로 인해 가두었던 금리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이미 심하게 매를 맞은 두 명은 풀려나자마자 곧 죽고 말았다. 단속을 맡은 관속들이 법을 지키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셈이다.

금령이 자주 내려진다는 것은 그만큼 잘 안 지켜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중에는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조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어린이의 재앙을 물리친다는 미명으로 설날 아침에 중을 맞이하여 쌀을 시주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설날이 되면 도로가 막힐 정도로 승려들이 모여들어 문제가 되었는데, 국왕 정조는 즉위 초에 특명을 내려 승려들을 성내에 은닉한 자는 모두 법에 의거하여 유배형에 처하도록 했다.

또 단속을 맡은 사헌부 관속들이 도리어 법을 어기는 일도 있었다. 앞서 본 것처럼 무당이 도성 내에 거주하는 것은 금지되었는데, 1778년(정조 2) 사헌부 서리 이몽진(李夢鎭)이 무당 섬이(蟾伊)를 첩으로 한 사실이 발각되어 이몽진과 섬이가 각각 전라도 태인과 금구로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단속 과정에서 민폐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적발된 이들에게서 속전(贖錢) 명목으로 돈을 징수하여 단속하는 아전들이 자신들의 급료 등으로 사용하면서 큰 문제가 되었다. 금리 입장에서 금령 위반자들을 많이 적발할수록 속전 수입이 늘어나므로 정해진 횟수나 절차를 무시하고 과도하게 단속하여 백성들을 침학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이런 일들로 해서 출금 방식과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다. 출금 횟수도 한 달에 6차례로 제한하여 그 이상 과도하게 단속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신분질서와 봉건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전반적으로 도성 내 각종 규제 조치 또한 점차 실효성을 거두기 어려워졌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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