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과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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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과연 그런가?
  • 정재현 연세대·종교철학
  • 승인 2020.12.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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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말, 말]

■ 저자의 말, 말, 말_ 『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자기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해석학』, 『믿음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종교강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해석학』 (정재현 지음, 동연, 각 371쪽/395쪽, 2020.11)

Y2K로 세상이 마비될 것 같은 공포가 뒤덮었던 2000년이 지나고도 어느덧 두 번의 십 년을 보냈다. 그때의 불안은 그저 호들갑이었지만 지금 인류는 미증유의 사태를 겪고 있다. 첨단과학과 의학의 혜택을 이전 어느 시대보다 더 크게 누려왔던 오늘날의 인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생명과 건강에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다. 지구를 장악하고 우주로 날아갈 것 같았던 인간은 어처구니없게도 한갓 미물에게 포로가 된 듯하다. 그래도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고 곧 보급된다니 지금 최고조의 정점을 향해 달리더라도 터널의 끝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터널이 끝난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태학적 경고가 쏟아진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남북극에 묶여 있던 바이러스들이 언제 우리들을 공격할지 알 수 없단다. 더욱이 인간 안에 서식하는 박테리아 중 99%는 아직은 평화롭게 공존하지만 어떻게 돌변할지도 알 수 없다. 지구는 고사하고 우리 몸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알 수 없다 하니 작금의 상황이 참으로 그러하다.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코로나19만 하더라도 면역도 없는데 증상도 없이 남들을 감염시킬 수도 있고 모른 채로 감염될 수도 있단다. 없음과 모름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기실 우리는 앎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왔다. 삶을 앎으로 추리고 삶을 이루고 있는 있음을 잘 붙잡아 더 크게 만들면 더 좋은 삶이 될 줄로 알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예측을 불허하는 생태 위기는 있음에 비해 없음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모름에 비해 우리 앎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내 준다. 덮어버리고 잊어버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죽음의 그림자 같은 없음과 모름을 외면한 채 있음과 앎만으로 삶을 엮으려 했던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자가당착인지를 전율적으로 드러내 주는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모름에 대해서 보다 진솔해야 하지 않을까? 앎을 좀 더 늘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 알고 있었던 모름도 있고 아직 알지 못한 모름도 있지만, 아예 알 수 없는 모름도 있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그런 모름의 뜻을 새기면서 없음을 향해 더듬음으로써 지금 살아가는 삶을 보다 더 찬찬히 살아갈 길을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이 대목에서 오래전부터 회자되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의 시 첫 구절이다. 그러나 과연 삶이 우리를 속이던가? 삶이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데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닐까? 게다가 그런 불일치의 책임이 사실 삶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앎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내가 어찌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고 있으니 속이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다만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삶에서 앎이 나름대로 쪼가리를 추려보는데 이것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삶에 대해 수시로 어긋나니 애꿎게 삶이 속인다고 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삶을 어찌해보려다가 여의치 않으니 질러본 앎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삶이 속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속는가? 앎이 속이고 앎이 속는다. 그래서 자기모순이고 자가당착이다. 그런데 이게 앎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삶으로 봐야 비로소 힐끗 보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과 앎 사이의 어디에 걸쳐 있는가? 속이는 앎과 속지 않는 삶 사이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고 누구인가?

이런 물음을 가지고 필자는 두 권의 책을 한 묶음으로 출간했다. 한 묶음인 것은 하나의 연구과제로 썼기 때문인데 “군림하던 앎의 주체에서 내던져진 삶의 실존으로: 기만과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종교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제목이다. 먼저 <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제목의 1권에서는 앎이 우리를 속이니 자기기만에 빠지게 하고 결국 삶을 억누른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 현대철학 중 해석학을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내고자 했다. 정신에만 골몰하는 관념론에 대한 육체의 유물론적 반동을 해석학의 현대적 기원으로 읽었다. 정신을 명분으로 인간이 자연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한 결과 생태파괴를 초래했는데 그 결과로 빚어진 자연의 복수인 환경적 재앙을 돌아보게 하는 선구적 통찰이다. 아울러 그러한 이성과 정신이 도덕이나 문화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연과 생명을 억압해왔다는 고발은 앎의 속임에 의한 자기기만으로 인하여 생태 위기를 포함한 현실의 수많은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통찰이라고 새긴다. 이러한 반동은 급기야 인간과 세계 중 어느 한쪽에 주도권을 줌으로써 삶을 일그러뜨려 왔던 과거를 뒤로하고 이 둘이 서로에게 속하며 서로를 구성한다는 해석학적 성찰이 지닌 해방적인 함의를 더듬는다.

앎의 속임이라는 문제를 비판하고 삶의 해방을 도모하는 기획이 1권을 만들었다면, 2권에서는 앎의 위치에서 작동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면, 종교적인 믿음이나 정치적인 신념도 역시 우리를 속일 뿐 아니라 심지어 강박까지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제목으로 달아보았다. 앎의 논리를 따라 축소되었던 믿음을 삶의 터전으로 끌고 나오면서 의심과 회의에 주목하는 실존해석학에서 시작한다. 아울러 신의 계시를 아전인수로 주무르는 종교를 비판하는 통찰도 곱씹는다. 이 대목은 우리 사회에서 때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종교의 집단광기에 대한 성찰이 될 것이다. 결국, 해석학은 결국 앎과 믿음에 의해 벌어졌던 무수한 기만과 왜곡, 그리고 이에 의한 억압과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삶의 현실로 나갈 수 있는 길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풀이하고자 했다.


정재현 연세대·종교철학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Emory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원 종교와사회연구소 소장, 한국종교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종교철학 전공주임교수로 있다. 종교에서 인간이 어떻게 왜곡되고 억압받는지, 어떻게 해방을 도모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한다. 『우상과 신앙』, 『미워할 수 없는 신은 신이 아니다』, 『인생의 마지막 질문』,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망치로 신-학하기』, 『신학은 인간학이다』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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