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단테가 받아쓴 사랑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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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단테가 받아쓴 사랑의 언어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12.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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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24강>_ 박상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의 「단테 <신곡>」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4. 서양 고전과 그 역사적 의미 – 기독교’ 제 24강 박상진 교수(부산외국어대 만오교양대학)의 강연 중 주요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박상진 교수는 단테의 『신곡』을 “문제적 개념으로서의 ‘정전’으로, 즉 전통적으로 불변의 권위를 확립한 고전보다는 현재의 맥락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가면서 계속해서 변하는, 그러나 그 원래의 정체는 간직”하는 “가변적 본질 같은 것으로” 대할 것이라고 밝힌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신곡』 자체가 “열린 정전이기 때문”이며 그런 생각은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단테 탐사 여정”에 동행하는 데서 비롯하였다고 얘기한다. 이는 단테에게 “사랑의 정령(Amore)”이 “그의 삶과 문학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을 기독교의 성령이나 문학적 영감으로 보는 전통적 해석”에 더하여 “생명의 숨 또는 공기를 뜻하는 프네우마(pneuma)로” 볼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으로, “그 순간 단테의 언어는 거대한 선회를 그리며 지금껏 내보인 적 없는 부분”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 지난 10월 31일, 박상진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4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10월 31일, 박상진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4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머리말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정치학자, 언어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행정가, 군인, 외교관 등 다양한 측면에서 활동했고 그에 필적하는 다양한 성격의 글들을 남겼다. 대표작 『신곡』에는 그 다양한 활동과 글들의 내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신곡』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참조하고 고려해야 한다. 베아트리체에게 바친 『새로운 삶』 이외에 모든 글을 20년의 망명 기간 동안 썼고, 『신곡』 집필은 그 기간 전체에 걸쳐 있으니, 『신곡』이 단테의 사고와 경험의 종합임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단테는 철학자였으나, 적어도 『신곡』과 『새로운 삶』 및 『시집』의 저자로서 우리는 그의 문학 세계를 철학적 개념으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그 자신의 정념과 재현, 상상, 그리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시적 언어와, 그 언어를 독자와 공유하는 문학 과정을 더 봐야 한다. 단테의 정치적 주장이나 종교적 견해, 행정가와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은 그의 문학 세계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분파적 대립과 도그마적 독단, 그리고 직접적인 성과를 넘어서서 더욱 보편적 차원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이루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윤리를 이어받고 보에티우스의 명상에 잠기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의 하느님을 경외하는가 하면,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 루카누스의 상상적 가능 세계를 공유한다. 또한 아퀴나스, 조토, 프란체스코 다시시, 귀도 카발칸티와 같은 동시대의 인물들과 함께 고전과 중세의 유산을 이어받는 동시에 넘어서는 과도기적 지식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단테는 전해 내려오는 인간의 지성을 망라하며 자신의 문학 세계를 세웠다. 그 세계에는 문학, 예술, 역사, 철학, 신학, 신화, 천문, 지리와 같은 넓고 다양한 분야가 담겨 있다. 작가 단테는 가히 종합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런데 단테의 종합을 이어받거나 그 한 부분을 궁구하는, 단테 이후의 예는 잘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종합을 더 이상 권장하지 않는 분과 학문의 시대가 이어졌다. 데카르트의 지성이 단테의 지성에서 무엇을 가져왔는지, 칸트의 도덕이 단테의 도덕을 어떻게 참조했는지, 흄의 정념이 단테의 연민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작가 단테는 근대의 문학과 예술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주었다.

요컨대 우리는 ‘근대에 사로잡힌 단테’라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예로, 단테를 사사하다시피 했던 토머스 S. 엘리엇은 『단테』라는 짧지만 탄탄한 책에서 단테를 보편적 시인이라 정의했지만, 그 방식은 분명 단테가 원래 지니고 있던 보편성이 아니라 서구 근대성에 의해 상상되고 주조된 측면이 훨씬 더 크다.

하나의 문학 텍스트가 출발점에 서고 거기서 비롯하는 선조적 질서와 중심 지향적 통일성의 구도는 문화적 소통이 다양하고 폭넓게 이루어지는 ‘우리’ 시대의 흐름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중이다. 엘리엇의 ‘우리’가 고전의 유일한 상속자임을 자처하는 배타적이고, 따라서 특수한 주체라면, 횡단적이고 수평적인 소통을 이루는 ‘우리’는 타자를 포용하는 보편적 주체다. 결국, 단테의 보편성을 말한다면, 정전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타자의 감수성에 한껏 열려 있는 그의 문학 텍스트 자체를 진정한 타자의 입장에서(예로, 비유럽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단테가 남긴 글은 단테 자신을 어느 한 공간은 물론 어느 한 시대에 국한시키지 않는 보편적 지식인 작가의 표상을 보여준다. 단테는 앞선 시대에서 발생한 지적 산물을 넓고도 깊게 끌어안아 『신곡』에서 재구성했다. 『신곡』은 죽음 이후의 세계 여행기이면서 또한 인간이 이루어낸 문학, 철학, 역사, 신화, 신학, 천문, 지리에 걸치는 탐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신곡』은 정교한 문학 장치와 웅장한 건축 구조, 섬세한 언어 작용, 그리고 역동적인 소통 과정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텍스트다. 『신곡』이 담고 있는 주제와 개념, 인물과 사건, 정념과 상상, 이치와 추론은 끝없이 펼쳐진 듯 보인다. 또한 『향연』, 『제정론』, 『속어론』, 『땅과 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같은 다른 학술 저서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세계의 도저함을 더한다.

정전은 고정되고 선험적이며 불변의 것이라는 정전의 속성은 안정된 지침을 주지만, 또한 우리를 그 안정성 속에 도사리게 만든다. 우리는 정전을 더욱 유연하고 열린 차원에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러한 유연성과 열림을 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전이 어떻게 정전이 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정전을 역사와 사회, 문화의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변용하는 실체로 상상할 수 있다. ‘변용하는 실체’라는 모순 어법이 정전의 열림이라는 문제적 사고를 추동시킨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단테 탐사 여정은 단테의 문학 텍스트들을 정전의 열림이라는 맥락에서 다시 들여다보는 데 좋은 참조가 된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공부의 출발과 기저에는 세밀한 문헌학적 탐구가 자리한다. 그 탐구의 대상으로 단연 돋보이는 작가가 단테이며, 그 탐구의 기반을 이루는 문제의식은 정전의 열림이다. 아감벤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문제로 계속 이어가는 자세로 단테를 대한다. 나는 『신곡』을 문제적 개념으로서의 ‘정전’으로, 즉 전통적으로 불변의 권위를 확립한 고전보다는 현재의 맥락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가면서 계속해서 변하는, 그러나 그 원래의 정체는 간직하는, 그러한 가변적 본질 같은 것으로 대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곡』 자체가 그러한 열린 정전이기 때문이다.

단테에게 사랑의 정령(Amore)은 그의 삶과 문학의 처음과 끝이었다. 그 사랑을 기독교의 성령이나 문학적 영감으로 보는 전통적 해석에 더해 아감벤은 생명의 숨 또는 공기를 뜻하는 프네우마(pneuma)로 보고자 했다. 그 순간 단테의 언어는 거대한 선회를 그리며 지금껏 내보인 적 없는 부분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 시적 언어

1) 말로 할 수 없음의 경험

시적 언어의 생장 과정은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ità)’의 문제에 직면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단테는 천국에 오르면서 언어가 침묵으로 무너지는 체험을 겪었고, 그 체험을 ‘말로 할 수 없음’이라는 용어로 직접 표현했다. 언어의 무력함에 직면하여 단테는 지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면서 언어가 말하는 바를 지성이 파악하지 못하고, 반대로 지성이 이해하는 바를 언어가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관계에 들어섰음을 깨닫는다. 바로 그 관계, 즉 지성과 언어가 합치하는 지점이 아니라 분기하는 지점에서 시적 사건(시적 언어의 생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천국에 오른 단테가 ‘말로 할 수 없음’이라는 용어로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 분기다.

인성을 초월한다는 것은 말을 통해서
가리킬 수 없으니, 은총이 경험을
보존해줄 때까지 그 예로 족할 것이다. (「천국」, 1. 70-72)

단테에게 인성의 초월(trasumanar)이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지상에서 확고하게 분리되는 경험이며 그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는 지옥에서 출발해 연옥을 거치면서 구원의 변신을 거듭해왔다. 이제 천국에 오른 그는 지옥과 연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임을 직감하고서 자신의 “말”을 재정비하고자 한다. 그 재정비의 내용은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인성을 초월한다는 것”은 단테가 만든 신조어다)과 비유를 통해 말을 하는 것(“그 예로 족할 것이다”)이다.

단테는 자신의 언어가 천국의 그림자를 새기는 한에서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말로 할 수 없음의 세계를 말로 하고, 그에 따라 그 세계의 이해를 전달하는 그의 시작(詩作) 방법은 무엇이었던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나의 사고는 ‘지극히 달콤하게 울리는데’, 나의 영혼, 즉 나의 애정은 그것을 언어로 기술하고자 열망한다.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없기에, 나는 영혼이 “불쌍하도다! 난 힘이 없으니”라고 말하며 탄식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말로 할 수 없음이다. 즉, 언어는 지성이 보는 것을 완벽하게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듣고 느끼는 영혼을 말하는데, ‘듣는 것’은 말에 관련하고, ‘느끼는 것’은 소리의 달콤함에 관련한 것이다. (『향연』, 3. 3. 14-15)

단테는 자신의 지성이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욕망할 때 그 말은 “지극히 달콤하게 울리는데”, 그것을 말로 기술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언어가 지성이 아는 것을 완벽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지성은 언어를 완벽하게 받치지 못하는 이런 상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영혼에 더 큰 힘을 주어 영혼이 언어를 듣고 느끼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이때 듣는 것은 말(어휘)이고, 느끼는 것은 소리의 달콤함이다. 영혼은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의 달콤함을 느껴야 한다. 바로 그때 언어는 지성을 우회하면서 [뭔가에 대해] 말하고, 지성은 언어가 멈추는 지점에서 [뭔가에 대해] 이해한다.

2) 언어와 지성

언어 생산 과정에는 그 과정에 참여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의도를 실어 나를 매체로서의 기호(언어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가 필요하다. 즉, 언어는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와 그 사람이 사용하는 기호가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단테가 ‘말로 할 수 없음’이라 부른 것은 바로 그러한 언어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아감벤이 ‘지성과 언어의 분기’라 부른 상태라 생각된다. 아감벤에 의하면, 단테는 언어와 지성을 이중적이면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운동으로 보면서 그들의 분기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천재성을 내보인다.

언어가 던져지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언어와 이해가 서로를 충족하는 완전한 단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단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해, 그 도달 자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의 표현이다.

욕망은 자신의 완전함을 욕망함으로써 바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욕망할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모순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계속적인 욕망을 욕망하고, 자기 욕망을 절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향연』, 3. 15. 9)

자체의 완전을 욕망하는 것은 자체의 불완전을 욕망하는 것과 같다. 자체가 불완전해야 완전을 계속해서 욕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을 묘사하려는 단테의 문학적 욕망과 거기서 나온 언어는 늘 불완전하게 남아 완전한 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욕망은 스스로 완전해지고자 하지만, 완전을 향한 욕망의 성취는 도달이 아니라 도달 가능성에 의해서만 기대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절대자에 도달하려는 단테의 욕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욕망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그의 언어를 음미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단테가 언어와 지성을 봉합하는 방식에 접근할 수 있다. 언어와 지성의 분기라는 아감벤의 개념은 단테가 경험한 ‘말로 할 수 없음’의 상태, 즉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 말을 실어 나르는 매체로서의 기호가 결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될 말의 차원으로 오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단테는 의도란 사랑이 불러주어 마음에서 일어나는 한편, 기호는 그 불러주는 것을 받아쓰면서 외부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사랑이 불러주는 것은 지성으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불러주는 언어는 뭔가를 말하고 있는 한편, 그 불러주는 것을 받아쓸 때 언어가 잠시 ‘멈추면서’ 거기서 지성은 뭔가를 이해한다.

이때 언어와 지성은 서로 넘나드는 관계를 형성한다. 언어는 지성으로 이해함이 없이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받아 적어 언어를 잠시 멈추게 하는 가운데 지성은 이해한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들은 것을 받아 적는 것. 그것이 청신체 시인으로서 단테가 구상했던 창작 원리다. 그렇게 사랑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은 문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만들어지지만(즉 이해의 욕망이 불완전하게 남지만), 바로 그 지점, 즉 이해의 욕망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말로 할 수 없음, 즉 언어와 지성의 분기의 봉합이 시작된다.

3) 언어의 불안정성

우리는 언어활동의 순수한 실존, 즉 우리가 말을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나아가 언어의 한계에 직면하여 저항하는 것이 곧 윤리적인 행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깨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거기 있고 언어가 거기 있을 때, 세계와 언어의 있음에 대해 끊임없이 캐묻는 행위가 우리 삶을 구성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 삶이 윤리적인 한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주체는 “주체 자체를 자체에 지속적으로 관련시키는 가운데 태어나고”, 윤리적·정치적 행위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이는 언어와 현실에 대한 주체의 끝없고 끊임없는 응답에 따라 성취된다.

단테가 천국에서 경험한 ‘말로 할 수 없음’은 일종의 “유아기”적 경험이었다. 그것을 아감벤은 언어 실험이라고 지칭하는데, 언어 자체를 경험하는 것, 즉 언어의 자기지시성(또는 자기참조의 기능)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사실상 이것이 천국의 비물질성을 몸이라는 물질로 경험하는 단테의 대처 방식이다. 그것은 언어로부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자체의 잠재력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천국에 올라선 단테가 천국의 소리를 몸으로 듣고자 했고, 그래서 천국의 구원을 인간의 목소리로 구성된 다성악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까닭은 목소리가 있는 곳에 몸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는 작가의 목소리가 작가의 몸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직결된다. 따라서 단테가 「천국」에서 경험한 ‘말로 할 수 없음’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받아쓰는 일의 불완전함의 경험이며, 목소리를 문자로 정착하는 과정의 어려움 또는 근원적 불가능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과 호소가 곧 그 자신의 문학을 이루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단테의 목소리는 문자로 분절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문자 속에 안착하지 않고 그저 거기에 내던져져 있다. 문법 없이 내던져져 있는 이러한 공허와 소리 없음의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언어는 윤리성을 실어 나른다. 아감벤은 단테가 ‘말로 할 수 없는’ 순수의 세계와 대결하는 모습에서 “호모 사피엔스 로퀜디(말하면서 생각하는 인간)”의 존재를 발견한다. 「천국」에서 단테는 언어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면에서, 즉 성찰을 계속해서 가동시킨다는 면에서, 순수한 단일 공통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에 의문을 표한다. 그런 언어에 기대어 천국을 재현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그에게 없었다. 대신 자신의 목소리가 언어와 균열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생장하는 불순과 혼성의 언어를 소통시키고자 했다. 아감벤은 모든 소통이 현실태로 있는 공통된 무엇의 소통이 아니라 잠재적인 소통 가능성의 소통이라고 말한다. 언어의 역량이 있다면 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존재만 있을 수는 없고, 언제나 다수가 자리한다. 그러한 인민의 잠재적 존재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온 단테의 문학은 근원적으로, 이미, 윤리적이었고, 그 윤리성은 언제든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그의 언어 속에 잠재되어 도사린다. 단테의 언어의 진정성은 바로 그 잠재성에 있다.

4) 언어와 호흡

단테는 자신의 시를 스스로 “거룩한 시”라 칭하지만, 천국을 묘사하는 능력은 때로는 완전하지 못할 수 있다. 신의 완전성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성이 그의 ‘거룩함’을 지탱한다.

순례자 단테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게 만든 “잠(sonno)”에서 시작하여(「지옥」, 1. 1-12) 엠피레오에 이르기까지 “높은 환상(l’alta fantasia)”을 고양시킨다(「천국」, 33. 142). 잠은 지성의 정지인 반면 환상은 지성의 실현이다. 그러나 지성의 정지는 일시적이며 잠재적이다. 단테의 세계 전체에서 지성은 결코 무(無)로 떨어진 적이 없다. 다만 잠시 멈췄다 다시 움직인다. 따라서 단테의 잠은 언제든 깨어날 준비를 갖춘 상태이며, 그런 면에서 환상으로 이어지는 지성의 활동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또한 지성의 실현은 『신곡』의 끝에 가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엠피레오에 오른 단테는 “높은 환상”이 지성의 실현과 함께 완성되는 대신 힘을 잃었다고 느낀다. 지성은 단테의 순례 내내 그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깨달은 것은 그의 지성을 이미 사랑(Amore)이 돌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묘하고 완벽한 질서로 움직이는 천체처럼 그 모든 움직임의 근원으로서의 사랑에 단테는 이미, 처음부터, 속해 있었다. 그러한 단테의 깨달음에서 우리는 사랑이 “높은 환상”을 그의 내면에서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국에 오른 단테는 거룩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뜨거운 힘을 숨을 불어넣어 피리를 부는 모습에 비유한다. 단테는 시종일관 『신곡』에서 숨을 불어넣는 육체적·물질적 행위를 사랑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출발시키고 진행시키는 원동력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장소는 심장이다. 심장은 들이마신 숨을 필요로 하고, 그 숨은 심장에서 흘러나와 기관에 부딪히며 목소리를 내게 한다.

단테의 언어는 베아트리체에게 이식한 자신의 심장에서 연원하는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그 상호 작용 과정을 담당한 것이 “나는 너의 신”이라고 천명한 호흡으로서의 사랑(Amore)이고, 그것이 단테의 시적 언어를 이끄는 길잡이다. 이 과정에서 단테의 열정은 증폭되고 시적 언어로 변주되며, 이 시적 언어는 사랑의 신이 불어주는 호흡으로 생장한다. 사랑의 신을 매개로 삼는 것은 『새로운 삶』이나 『신곡』(사실 이 둘이 단테의 주요 ‘창작물’이다)의 주된 창작 방식이다. 이를 두고 아감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무형과 유형, 표면과 존재 사이의 파열을 극복하기 위해” 매개를 거친다고 이해한다. 시적 언어를 호흡 활동 결과로 보고 사랑과 시어의 독보적인 공모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단테가 살면서 언제나 성취하고자 했던 구원의 핵심이었다. 그런 한에서 단테는 사랑의 목표와 행복이 “나의 여인을 칭송하는 언어 속에”(Vita nova, 18. 6) 들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어는 사랑을 완성하는 장소가 되고, 그렇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심장에 깃들어 있는 사랑의 신이다. “내 마음에 속삭여주는” 사랑의 신은 언어로 변하고, 단테는 “사랑에 대해 얘기할 줄 아는 그대여” 하고 부르며 언어로 하여금 사랑을 말하게 한다. 사랑을 말하는 언어는 곧 사랑을 품은 언어 자체에 대해 말하고, 단테는 그 숨으로 형성된 목소리를 듣고 받아쓴다. 그렇게 언어가 언어 자체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 몸을 실은 채 단테는 책을 쓴다. 그리고 그 책을 완성하면서 그의 구원의 순례가 이미 처음부터 천국의 꼭대기 엠피레오의 빛에 휩싸여 있었음을, 그 빛과 하나가 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3. 단테의 저공비행

단테에게 문학은 언어가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는 장소다. 이른바 ‘시적 언어’가 자기회귀와 자기참조의 언어를 뜻하는 한에서 그의 언어는 ‘시적 언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단테는 사랑(Amore)이 그의 심장을 베아트리체에게 먹이고, 그의 심장을 담은 채 천국에 오른 베아트리체가 그의 순례의 처음과 끝에 서게 만들며, 그 모든 여정을 사랑(Amore)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고 고백한다. 그를 순례에 나서게 하고 순례의 끝까지 이끌어준 베아트리체는 바로 단테 자신의 심장이었고, 그가 받아쓴 사랑의 목소리는 바로 자신의 심장에서 출발한 호흡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단테는 다름 아닌 자신의 몸과 존재의 펼침으로 순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례하는 내내 그는 자신의 변신을 가늠하고, 순례를 마친 이후에 변한 모습으로 출발점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한다.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았던, 그래서
나를 오랜 세월 쇠약하게 한,
거룩한 시가 언제라도 일어난다면,

내가 양으로 잠든 포근한 우리 밖으로
쫓아낸 잔악한 마음, 싸움을 거는
늑대들을 적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 나는 다른 목소리와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나의
세례의 샘에서 모자를 쓰리라. (「천국」, 25. 1-9)

단테는 『신곡』을 쓰는 오랜 세월 동안 몸이 쇠약해졌다. 그는 열심히 글을 읽는 바람에 시각 정령이 쇠약해져,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고 말한다(『향연』, 3. 9. 15). 작가는 자신의 “거룩한 시”를 쓰는 일이 자신을 쇠약하게 만들 정도로 힘든 이유가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토로하지만, 그런 시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일어난다면”) 자신을 추방한 “잔악한 마음들”과 자신에게 “싸움을 거는 늑대들”에게 승리를 거둘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는 “다른 목소리와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고하거나 확신한다.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거룩한 시”를 쓰는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미 돌아와서 “거룩한 시”를 ‘지금 여기서’ 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예고 혹은 확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순례자로서 여행하는 현재의 내세에서 이제 앞으로 돌아가리라고 다짐하는 미래의 현세, 그러나 이미 돌아와 있는 현세를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맥락에서 그가 돌아갈 곳이 피렌체가 아니라 “거룩한 시”를 쓰는 현장, 즉 어디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순례의 정령”을 벗삼아 살아가는 ‘망명’의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거룩한 시”란 하느님의 축복이 깃든 완성된 영광 혹은 성취의 무엇 이전에 어떤 구체적인 시련의 현실에 직면해서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자유로운 실천 혹은 그 과정을 가리킨다. 그 실천은 필멸의 육체의 존재로서 그의 심장 및 호흡과 함께 유지된다. 「천국」 25곡을 쓰며 쇠약해진 자신을 말할 때 그는 육신의 소진을 느끼지만 새로운 목소리를 지닌 시인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한다. 그의 심장이 뛰는 한,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실천적 지식인 작가로서의 임무를 다할 생각이다. 솔개의 고공비행보다 제비의 저공비행을 꿈꾸면서(『향연』, 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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