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에서 창출되고 무(無)로 돌아가는, 경제활동과 동시적인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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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에서 창출되고 무(無)로 돌아가는, 경제활동과 동시적인 화폐
  • 박만섭 고려대·경제학
  • 승인 2020.12.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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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포스트케인지언 내생화폐이론』 (박만섭 지음, 아카넷, 476쪽, 2020.10)

경제학 교과서에 따르면 (따라서 주류경제학에 따르면), 화폐의 가장 기본적 기능은 ‘교환의 매개체’ 기능이다. 화폐가 존재하기 이전에 물물교환이 있었고, 화폐는 물물교환에서 야기되는  ‘원하는 것의 이중적 일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물물교환으로 대표되는 실물적 경제활동은 논리적-역사적으로 화폐에 선행한다. 화폐는 ‘부차적’으로 부가된 경제적 도구다. 화폐는 경제에 ‘외생적’이다. 과연 그럴까?

이 책에서 상세히 소개하는 포스트케인지언 화폐이론은 화폐의 기원을 생산 활동에서 찾는다. 화폐는 생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요소다. 화폐 없이 생산 활동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0의 수준에서 시작할 때를 포함하여) 생산이 증가할 때 경제주체의 대부분은 채무에 의존한다. 그런데 채무가 발생하는 순간 화폐도 동시에 경제에 존재하게 된다. 화폐는 채무관계에서 채무항목에 대한 기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화폐의 가장 기본적 기능은 ‘회계 단위’ 기능이다. 역사적으로도, 조개나 돌 같은 것이 교환의 매개체로 사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채무관계의 기록으로서 화폐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폐는 논리적-역사적으로 경제활동과 동시적이다. 화폐는 경제에 ‘내생적’이다.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생산 활동에 따른 채무는 민간은행에 의한 대부 형태를 띤다. 은행이 대부를 승인하는 순간, 은행의 대차대조표에는 대부가 자산항목으로, 예금이 채무항목으로 기록된다. 이 기록의 순간이 해당 활동에 상응하는 화폐가 경제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채무자가 채무를 변제하는 순간, 그에 해당하는 화폐는 소멸한다. ‘화폐는 채무와 동시에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케인즈). 화폐는 무(無)에서 창출되고 무(無)로 돌아간다. 한 시점에 경제에서 관찰되는 화폐량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완결되는 경제활동에 따라 화폐가 창출되고 소멸하는 결과다.

한 시점에 경제에 존재하는 화폐량을 조절하려는 중앙은행의 시도는 민간부문의 대응으로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민간부문의 경제활동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공급하려고 하면, 경제주체들은 필요 이상의 화폐를 기존의 채무를 변제하는 데 사용한다. 반대로 필요한 수준 이하로 화폐량을 공급하면, 민간부문은 필요한 화폐량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화폐’를 만들어낸다. 현대 금융시장이 끊임없이 개발하는 금융기술은 이런 준화폐의 창출을 매우 용이하게 만든다. 중앙은행의 으뜸 역할은 ‘최종 대부자’ 역할이다.
 
지불준비금 제도가 정립되어 있는 경제체계에서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이 요구하는 대로 지불준비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수 있고 결국 경제 전체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경제에 존재하는 화폐량은 민간부문의 화폐수요에 따라 결정된다. ‘초과 화폐공급은 존재하지 않는다’(칼도). 중앙은행이 보유한 유효한 정책변수는 화폐량이 아니라 이자율이다. 이제, 화폐시장에서 외생적 변수는 화폐량이 아니라 이자율이다. 화폐량은 순전히 내생적으로 결정된다.

‘수직의 화폐공급곡선’은 외생적 화폐공급의 상징적 표현이다. 화폐의 가격인 이자율을 수직축에, 화폐량을 수평축에 표현할 때, 화폐공급이 수직의 직선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우하향하는 화폐수요곡선이 겹쳐지면 이자율이 결정된다. 반면 내생적 화폐공급의 상징적 표현은 ‘수평의 화폐공급곡선’이다. 중앙은행이 정책적으로 결정하는 이자율에 상응하는 수평축의 한 점에서 시작하는 수평의 직선으로 화폐공급이 표현된다. 여기에 화폐수요곡선이 겹쳐지면 경제 내에 존재할 화폐량이 결정된다. 화폐 외생론자들을 ‘수직주의자’로, 화폐 내생론자들을 ‘수평주의자’로 부르는 이유다.

주류 거시경제학의 많은 주요 명제들이 화폐의 외생성에 근거한다. 포스트케인지언 내생화폐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명제들은 역전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대부가 먼저 행해지고 예금은 대부의 결과로 창출된다. 중앙은행의 지불준비금 공급은 민간은행의 활동을 통제하는 유효한 수단이 아니다(현재 많은 국가에서 예금에 대한 지불준비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대부가 예금에 의해 제약되지 않으므로, 투자는 저축에 대해 인과적으로 우선한다. (주류경제학이 관찰하는 바대로) 단기에 화폐량의 변화는 명목소득보다 먼저 발생한다. 그러나 ‘시간에 앞선다고 인과성에서도 앞서는 것은 아니다.’ 화폐량의 변화는 명목소득의 변화에 따른 결과다. 인플레이션은 초과 화폐공급으로 인해 발생하는 화폐적 현상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소득분배를 둘러싼 사회계급 간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실물적 현상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조절을 위한 정책은 소득정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자율이 중앙은행의 정책변수로 사용되더라도, 이자율은 인플레이션 조절에 비효과적이다. 이자율 정책은 기본적으로 자산소득자들의 소득을 조절하기 위한 소득분배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은 화폐의 내생성을 통해 그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단기는 물론 장기에서도 불완전고용은 존재할 수 있고 그 원인은 유효수요(특히 투자)의 부족이다.

주류경제학의 테두리 안에서도 화폐의 내생성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존재한다. 새 케인지언의 ‘신용관점’이나 최근 주류 거시경제학의 기본 분석틀로 자기 매김을 한 ‘새 합의 모형’이 그런 예다. 그러나 이들이 화폐 내생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포스트케인지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에게 화폐는 여전히, 화폐 외생성에 굳건히 근거하는 통화주의 이론에서처럼, 경제활동에 ‘부차적’이다.

이 책은 포스트케인지언 내생화폐이론을 상세히 다루는 국내 최초의 단행본 연구다.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제1부는 화폐가 경제의 본질적 요소로 작동하는 화폐적 생산경제의 개념(제1장), 화폐 내생성이 갖는 여러 의미에 대한 정리(제2장), 포스트케인지언 내생화폐이론이 형성되기 이전에 전개되었던 화폐 내생성 논의들(제3장)을 다룬다.

제2부는 네 개의 장을 통해 포스트케인지언의 내생화폐이론을 상세히 소개한다. 화폐 내생성에 대한 포스트케인지언 접근법은 크게 포트폴리오 접근법과 본원화폐 접근법으로 나뉜다. 제4장은 래드클리프 보고서와 하이먼 민스키의 논의를 통해 포트폴리오 접근법을, 제5장은 조운 로빈슨, 니컬러스 칼도, 배즐 무어의 논의를 통해 본원화폐 접근법을 살펴본다. 이 두 접근법 간의 차이는 1980년대에 포스트케인지언 그룹 내에서 ‘구조주의자’와 ‘수용주의자’의 논쟁으로 나타난다. 제6장은 수용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구조주의자의 반박 형태로 이 논쟁을 정리하는 한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이 공통적으로 갖는, 그리고 주류경제학의 내생적 화폐 접근법과 차별되는 특징들을 정리한다. 제7장은 케인즈 경제학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몇몇 주제들과 관련하여 수용주의자-구조주의자 논쟁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한다.

화폐 내생성에 대한 여러 접근법들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제3부에서 세 개의 장이 할애되었다. 제8장과 제9장은 각각 ‘신용관점’과 ‘새 합의 모형’에서 이해하는 화폐 내생성을 포스트케인지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한다. 제10장은 하나의 모형 안에서 포스트케인지언의 수용주의자와 구조주의자, 새 케인지언의 신용관점 그리고 이 입장들의 일부 요소들을 혼합한 관점을 분석하고 비교한다. 시간의 제약이 있는 독자들은 이 열 개의 장 앞과 뒤에 있는 서론과 결론을 읽는 것만으로도 포스트케인지언 내생화폐이론이 주류 화폐이론에 대해 갖는 차별성과 파괴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류 화폐이론에는 화폐와 실물적 관계를 분리하는 ‘고전적 이분법’이 자리 잡고 있다. 현실에서도 이분법이 존재한다. 화폐의 외생성을 역설하는 (주류)경제학자와 화폐의 내생성을 피부로 느끼는 경제실무자 사이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이 책이 경제세계에 존재하는 이런 이중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데 일조하기를 바라본다.


박만섭 고려대·경제학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 맨체스터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리즈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주류의 경제학, 좁혀 말해 스라피언 경제학과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의 관점에서 경제학의 여러 문제들을 연구한다. 그밖에 경제 학설사·사상사와 경제학방법론 분야도 지속적인 연구 대상이다. 『경제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경제의 교양을 읽는다: 현대편』(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2003년 한국경제학회가 수여하는 제20회 청람학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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