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장벽이 오고 있다(The Wall is 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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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장벽이 오고 있다(The Wall is Coming)!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2.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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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장벽의 문명사: 만리장성에서 미국-멕시코 국경까지, 장벽으로 본 권력의 이동과 세계 질서 | 데이비드 프라이 지음 | 김지혜 옮김 | 민음사 | 408쪽

역사학 교수이자 장벽에 관한 독보적 전문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프라이가 벽(wall)이라는 주제를 통해 지난 수천 년간의 인류 문명사 전체를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4000여 년 전에 세워진 고대 시리아의 장벽에서 출발해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 중국, 로마, 몽골, 아프가니스탄, 미시시피강 하류,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오늘날의 미국-멕시코 국경에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온 벽의 양면성을, 즉 안전을 보장하는 폐쇄성과 교류를 촉진하는 개방성을 모두 강조한다. 또한 전염병과 마약, 불법 이민자 같은 가장 최근의 불안 요소들이 어떻게 21세기에 벽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를 불러왔는지 주목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벽과 우리 사이에 있는 놀라운 연결 고리를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흥미로우면서도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장벽이 문명을 가능하게 했는가? 우리는 벽 없이 살 수 있는가? 오늘날 장벽을 쌓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책은 유라시아 대초원에 숨겨진 장벽들로, 로마 병사들이 지키는 제국 최북단의 방벽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할리우드 스타들의 낙원 말리부로 우리를 이끈다. 스파르타인들의 기괴한 영웅주의에서, 베를린을 무대로 한 스파이 영화에서 우리는 벽과 그 시대정신을 발견한다.

▲ 출처=민음사 블로그
▲ 출처=민음사 블로그

최초의 장벽 안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전사일 필요는 없음을 깨달았다. 많은 남자가 무기를 내려놓고 전사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장벽이 없었다면 중국의 학자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도, 그리스의 철학자도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발명도 문명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벽보다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벽 안의 삶도 녹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벽 안에 웅크린 채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 바로 문명을 만든 사람들이었다.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도시를 토벽으로 둘러쌌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진흙 바구니를 이고 나르며 벽 쌓기를 멈추지 않았다. 벽 쌓는 일이 고단하기로는 중국도 만만치 않았다. 로마인들도 벽을 쌓는 사람들이었다. 장벽으로 보호받는 로마 제국은 학문과 미술, 과학의 낙원이었다. 장벽에는 큰 수고를 들일만 한 가치가 있었다.

▲ 미국 멕시코-국경 장벽(출처=민음사 블로그)
▲ 미국 멕시코-국경 장벽(출처=민음사 블로그)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벽만큼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메시지가 있을까?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영화 「퍼시픽 림」에서 벽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벽의 붕괴와 함께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고, 위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1453년, 그 운명의 날에도 벽은 무너졌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파괴된 성벽을 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로 진입했다. 특히 오스만 측의 신무기인 대포는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헝가리인 기술자가 만든 무시무시한 대포 앞에서 옛 시대의 유물인 낡은 성벽은 무력하게 묘사된다. 만주족은 중국을 정복했지만, 만리장성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의 장군이 문을 열어 준 뒤에야 비로소 장성을 넘을 수 있었다. 오늘날 관용어로 살아남은 마지노선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기갑부대는 마지노선을 피해 우회했을 뿐,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마지노선을 지키던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선전하다가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항복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살던 시대에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급격한 감소는 큰 문제였다. 조지 워싱턴은 사라져 가는 인디언들을 보호하려면 ‘중국식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해 장벽을 지어야 한다는 이러한 발상은 장벽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 한가운데에 떠 있는 자본주의 진영의 섬이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동독인들에게 서베를린은 매력적인 탈출구였다. 동독 정부는 자국민의 이탈을 더는 두고 보지 않았다. 철조망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장벽이 서베를린을 통째로 에워쌌다. 장벽을 건설함으로써 동독 정부는 체제의 우월성을 두고 벌인 경쟁에서 패했음을 시인한 셈이 되었다. 그 장벽은 공산주의가 얼마나 억압적인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증거였다. 저자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 정부에 해롭기만 했던, 역사상 가장 쓸모없는 벽이었다고 단언한다. 1989년의 요란한 희극과 함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의 콘크리트 파편은 기념품에서 흉물로 전락했다. 이제 장벽을 언급하는 것은 촌스럽고 비효율적인 일로 보였다.

이처럼 쇠락하는 듯했던 장벽은 놀랍게도 21세기에 들어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인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튀니지, 리비아, 에콰도르 등에서 새로운 장벽이 솟아나고 있다. 난민의 대량 유입, 테러, 전염병, 마약 등에 대한 두려움이 장벽 건설을 전 세계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트럼프 이후에도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의 건설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통념적으로 다리는 연결의 상징으로, 장벽은 단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반대인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강 건너편을 침공하기 위해 다리를 건설했다. 그에 반해 저자는 장벽이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고 개방과 평화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스파르타인들이 성벽을 거부했기에 오히려 자유를 잃었음을 떠올려 보면 장벽의 역설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장벽 건설은 다음과 같은 선택지만을 제시하는 듯하다. 고립될 것인가, 고립시킬 것인가? 무엇을 고르든 고립은 피할 수 없다. 각국이 유형과 무형의 장벽을 쌓아 올림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지금, 이 책이 보여 주는 통찰력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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