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투표권을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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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투표권을 허(許)하라
  • 정익중 이화여대·사회복지학
  • 승인 2020.11.29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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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이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자고 하면 피식 웃는 경우가 많다. 투표는 민주사회에서 국민의 가장 높은 시민적 권리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아동이 투표를 통해 최선의 이익을 대표하고 정책에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권리와 의무가 매우 제한되고 있다. 그러나 아동의 의견도 사회를 이루어가는 중요한 목소리가 될 수 있으며, 이들의 생각 또한 좋은 아이디어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동이 참여하지 않는 아동 정책은 성인의 관점만이 반영된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투표권의 연령 기준을 하향하고 있다. 이미 약 217개 국가에서 18세 이하에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다. 17세 이하에 투표권을 부여하는 나라는 아직 5.6%에 지나지 않지만, 선진국에서는 지속적으로 투표 연령의 하향을 시도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투표권 확대의 과정이었다. 여성과 흑인도 투표권 운동을 통하여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아동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반대 논리는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하기에는 어리고 자율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투표권은 시민권이기 때문에 치매 등으로 적합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성인이라도 박탈되지 않는다. 만약 투표에서 지적 능력이 중요하다면 성인을 포함한 모든 유권자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성인들은 여전히 아동이 잘 투표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세상에 잘못된 투표는 없다. 모든 유권자는 투표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이유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결정을 내릴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투표 연령 하향은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아동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아동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단지 예산 문제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 체제가 아동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야 정치권이 이구동성으로 아동학대 근절이라는 의제에 동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의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빈 약속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더 강력한 집단들의 요구가 산재해 있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부족한 아동들의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뒤처지게 된다. 아동투표권이 실현된다면 정치인들도 더 아동 친화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동투표권은 합리적인 검토를 통해 제한된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와 기성세대에 의하여 막연히 제한되었다. 아동투표권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고수해온 아동의 미성숙에 대한 우려와 전통적인 질서 유지의 보수적인 시각에 대한 도전이 되리라 생각된다. 여전히 아동의 투표 참여가 너무 이른 것은 아닌지에 대해 우려하는 입장도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책임감 있는 민주 시민은 한순간에 획득되는 자질이 아니라 다양한 배움과 기회를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상기해볼 때 더 이상 연령을 이유로 아동의 투표권 참여를 제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동이 학교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를 반영할 수 있는 환경이 가정, 학교, 지역사회 수준에서 조성되어야 한다. 설령 아동의 정치적 판단능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국가는 아동투표권을 막연히 제한할 것이 아니라 이 판단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아동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물론 투표 연령을 낮추는 것이 아동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투표권을 통해 아동에게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부여한다면 미래에 좀 더 적극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날 수 있다’, ‘여성이 투표할 수 있다’ 등과 같이 예전에 수용하기 어려웠던 생각들이 현재에는 상식이 되었다. 과거에 모두가 똑같은 사고에 머물고 새로운 사고의 기회를 차단했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은 변화해왔고 발전해 왔다. 아동투표권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생각일 수 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상식이 되는 때가 분명히 다가올 것이다.


정익중 이화여자대학교·사회복지학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화여대 아동가족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사회복지연구회 편집위원장, 한국아동복지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갤럽학술논문상 우수상(2016)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아동복지론 제3판(공저), 사회조사론(공저), 아동실종의 이해(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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