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 민주주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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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민주주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 배호남 초당대·국문학
  • 승인 2020.11.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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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얼마 전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바이든 후보는 8일 승리를 선언하는 연설에서 “선거 과정에서 보였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하는 하나 된 미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후보의 원대한 계획이 실현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도널드 트럼프 현직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결과 불복을 선언하며 우편투표를 실시한 모든 선거구에 대해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 밝혔다. 20년 전 조지 W. 부시와 엘 고어 후보 간의 법정 다툼까지 가는 선거 후폭풍이 이번 미국 대선 결과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크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방식은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이렇게 복잡한 선거 제도가 유지되는 이유는 미국이 여러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이기 때문이다. 인구가 적은 소수 주의 의견까지 공평하게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대의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데는 두 가지면 충분하다. 한 명의 독재자와 어리석은 대중.
   
플라톤은 그의 책 <국가론>에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아나키다"라고 썼다. 아나키의 그리스 어원인 '아나르코스'는 "선장이 없는 선원들의 배"라는 의미로, 무질서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 플라톤은 왜 민주주의를 무질서의 혼돈이라 여겼을까? 그는 "정치를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정치를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지도자는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선출됐다. 다수결은 그리스 시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시민이 지도할 능력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지도해도 같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한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 민주적 '평등주의'가 무질서를 가져온다고 여겼다. 정치는 그것이 가능한 자(즉 지도하는 자)와 불가능한 자(즉 지도받는 자)로 나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일군의 지도하는 그룹을 상시적으로 갖자고 주장했다. 플라톤 시대의 직접 민주주의는 모두가 정치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아무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플라톤이 보기에 사회를 무질서의 혼돈 상태로 이끄는 어리석은 제도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 mobocracy'라 이름했다.

일군의 엘리트에게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이 지금 우리에게 보편적인 ‘대의 민주주의(간접 민주주의)’다. 그런데 대의 민주주의는 일종의 불평등에 기초하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의 작동 논리는 "우리 일반인은 통치를 할 만한 능력이 없으므로 능력 있는 몇몇 사람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한다"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권리를 위임받은 소수의 엘리트는 쉽사리 선민주의에 빠진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 위임된 것이란 사실을 잊고, 자신의 능력으로 획득된 것이라 믿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야말로 이러한 선민주의에 빠진 정치인의 표상이다. 그는 자신을 자칭 스트롱 맨(Strong Man)이라 부르며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의 이미지를 퍼트려왔다. 그러나 스트롱 맨은 ‘강력한 지도자’란 뜻 이외에도 독재자(dictator)라는 부정적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 백인 남성 정치인의 이런 우월감과 선민의식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고,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정 시대부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때에도 참정권을 지닌 사람은 1%의 그리스 귀족 남성들뿐이었다. 나머지 99%는 참정권이 없던 여성과 다른 국가나 민족들로부터 약탈한 노예들이었다. 민주주의라는 동전의 앞면을 뒤집으면 언제나 엘리트주의라는 어두운 뒷면이 숨어 있다.

윈스턴 처칠의 자서전 <폭풍의 한가운데>를 보면,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의 비효율성에 대해 한탄하는 대목이 있다. 나치 독일의 폭격기가 런던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U보트 잠수함이 영국의 해안선을 봉쇄한 상황에서, 연합군의 각국 지도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이익만 앞세우며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스탈린과 아이젠하워에 대해 온갖 욕을 다 하면서도, 처칠은 이렇게 쓴다. “민주주의는 내가 아는 가장 비효율적인 통치제도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내야 할 유일한 가치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다면, 우리가 맞서 싸우는 파시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 절차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번 미국 대선을 둘러싼 갈등과 부조리가 그 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대한 많은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즉 공리(功利)에 있다. 공리의 추구를 위해 한 사회의 지도자는 대중을 설득하고 화합시킬 의무가 있다. 이 과정에서 실패하고 자신의 지도력을 과신하게 되면, 어떤 지도자든 민주주의를 망치는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배호남 초당대·국문학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 시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중국 옌타이대학교 한국어학과에 외국인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초당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유치환의 문학관 연구>, <유치환 시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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