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소통에 끌려 들어가면 단순한 영혼의 낙원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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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소통에 끌려 들어가면 단순한 영혼의 낙원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 김건우 해외통신원/빌레펠트대학 박사과정·사회학
  • 승인 2020.11.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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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논평]_ 니클라스 루만 『사회적 체계들』 논평
▲ 니클라스 루만 (Niklas Luhmann, 1927 ~ 1998)
▲ 니클라스 루만 (Niklas Luhmann, 1927 ~ 1998)

1. 루만 체계이론에서 『사회적 체계들』의 위치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체계들』(1984)이 재번역 되었다. 타계하기 1년 전인 1997년 출간된 『사회의 사회』가 2014년 번역된 것까지 하면, 우리 지성계는 이제 루만의 가장 중요한 두 저작에 대한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루만은 신생 대학인 빌레펠트 대학의 첫 번째 교수이자, 독립적인 사회학과 소속으로서 서독의 첫 번째 사회학 교수이며, 전공 분야를 사회학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사회이론’으로 했던 독일의 첫 번째 사회학 교수였다. 1968년 10월 1일 부임한 이후 그는 1993년 2월 9일까지 빌레펠트 대학 사회학과 정교수로 재직했다. 잘 알려진 일화이지만, 교수로 부임하면서 그가 대학에 제출한 연구계획(Forschungsvorhaben)은 “대상: 사회이론,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었다. 따라서 1984년에 출간된 이 책 『사회적 체계들』은 공식적으로 사회학자로 활동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자신의 연구기간 30년의 정확히 반을 통과한 시점에 제출한 저작이자, 교수로 부임하기 이전인 1958년의 첫 논문 <행정학에서의 기능개념> 이후 25년간 연구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이 1983년 12월에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루만이 15년과 25년이라는 기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추정하게 된다.

1985년의 한 라디오 대담에서 이 책의 집필 기간에 대한 질문에 루만은 “기본적으로 개념을 구상하고 쓰는 데 일 년 걸렸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문체를 수정하는 데 걸린 일 년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론은 개념 파악과 진술들이 내용상으로 관련된 곳에서는 거의 저절로 쓰인 반면, 나는 배열 문제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많은 숙고를 했다. 독일연구재단이 지원해준 덕분에, 나는 일 년간 이 과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잘 알려진 그의 사회학적인 무기고이자 사회학적 사유의 성좌를 언제든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메모 상자 없이는 불가능했지만, 원서로 675쪽, 국역본으로 919쪽에 달하는 이 대작을 구상하고 쓰고 완성하는 데 보인 압도적인 생산성과 지적인 역량 앞에서 독자와 연구자들은 숭고한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실제로 그는 1988년 슈투트가르트 시에서 제정한 ‘헤겔 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수상 기념 강연 「패러다임 상실: 도덕에 대한 윤리적 반성」), 작업의 크기와 깊이, 도달한 추상성과 『사회적 체계들』의 부제 ‘일반이론의 개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사회이론’의 일반성을 고려할 때, 대표적으로 슬로터다이크가 그랬듯이 그를 우리 시대의 헤겔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포함하여 변증법적 이론은 여전히 ‘선형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할 뿐 아니라, 19세기의 거대한 이론적 성과들인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들이 모두 차이에서 출발하지만, 그 이론 도정의 귀결에 비판적인 입장을 체계이론으로 정립한다. 단적으로 헤겔이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을 변증법적으로 이론화했다면, 체계이론은 체계와 환경의 차이, ‘체계/환경-차이’ 이론으로서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Differenz von Identität und Differenz)를 이론화한다고 정식화한다. 이것이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론적으로 정초되는 ‘새로운 주도차이’(Leitdifferenz)이자, ‘자기준거적 체계이론’, ‘자기생산적 체계이론’ 형성의 주도적인 원리가 된다. 사회적 체계는 자기준거적 체계로서 그 재생산은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를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루만은 이것을 “이론적 문제가 아니며 전적으로 실천적인 문제”라고 본다. 익숙한 용법을 빌리면, 이 저작은 이론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은 모두 이론생산의 제로-시리즈(Null-Serie)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사회적 체계들』을 예외로 하자면 말이지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2. 체계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이론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사회적 체계들』 서론은 ‘체계이론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정식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체계’가 개념적으로 사용되기 이전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표상, 즉 전체를 부분들의 총체 또는 부분들의 단순한 합계 그 이상으로 파악하면서, 전체 안에서 전체 자체를 ‘재현’하는 지배적인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파악을 검토한다. 전체를 재현하는 부분으로서 정치나 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강조, 부분/전체 도식을 수단/목적의 연관으로 사고하면서 전체의 본질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수단으로서 부분의 표상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계층적 분화에서 기능적 분화로 이행하면서, 이런 표상과 관념은 사회구조적인 전환에 따른 ‘구조의 깊이’에 상응하지 않는다. 구조의 복잡성과 더욱 멀어질수록 더 강하게 요청되고 여전히 고수되는 이런 관념과 표상은 성취되지 않은 조건들을 전제로 삼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성취되지 않을 조건들을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가능한 체험과 행위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무능력하다. 이는 사회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 따른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전체와 부분’이라는 전통적인 차이는 ‘체계와 환경의 차이’로 대체될 때, 사회 안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사회적 관계의 우연하고 복잡한 양상을 더 잘 파악하고 관찰하며, 이론화할 수 있다. 『사회적 체계들』의 부제인 ‘일반이론 개요’는 사회를 풍부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이론의 이름이다.

이렇게 전체/부분 도식을 체계/환경 도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전자의 도식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체계 안에서 체계와 환경의 차이의 반복이 발생한다는 체계분화의 메커니즘과 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그렇게 기능적으로 문제를 전환하는 것이다. 체계이론으로의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체계분화가 그런 것처럼, 다시 그 패러다임 안에서 ‘자기준거적 체계이론’(Theorie selbstreferentieller Systeme)으로 전환한다. 그 전환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가 체계이론 안에서의 주도차이(Leitdifferenz)가 되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루만은 “적절한 학문적 분석을 방해하고 충족될 수 없는 기대를 산출하지만, 이렇게 약점을 알면서도 대체할 수 없는 전통의 부담”으로 정리한다. 이를 참고하면, 체계이론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은 우선 체계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즉 부분/전체 도식의 체계/환경 도식으로의 전환을 전제하며, 그 전환 안에서 다시 자기준거적 체계이론으로의 전환이 내부적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충족될 수 없는 인식론적인 기대와 이를 제약하는 전통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체계들』에서 시도하는 체계이론적 작업은 이런 점에서 인식론적인 새로운 기대를 산출하며, 또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사고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3. “체계들이 있다”와 이론의 보편성

『사회적 체계들』은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로 1장을 시작한다. 이 문장은 서문의 첫 문장 “사회학은 이론의 위기에 갇혀 있다.”와 함께 강한 인상을 남긴다. “체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 사회학을 이론의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곧바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체계들이 있다”는 것은 “체계 개념의 적용을 정당화하는 특징을 드러내는 연구 대상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루만이 이 저작에서 시도하는 것은 연구 대상들, 즉 사회적 체계의 층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들’, ‘조직들’, 그리고 ‘사회들’이라는 대상이 체계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이론화하면서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루만은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개념적’ 추상과 같은 구조를 대상 자체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대상의 ‘자기’ 추상을 구별하고 그 중첩을 이론화한다. 사건으로 사회적 체계를 구성하는 사회의 작동 역시 이론적 차원의 개념적 추상과 구조적 차원의 대상의 자기추상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8장 ‘구조와 시간’을 주목하게 된다. 사회학 전통에서 구조는 행위의 대당 개념, 그러니까 고정된 구조와 고정되지 않은 행위, 거시적인 구조와 미시적인 행위의 구별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구조를 시간과 연관 짓는 것에서 루만의 사회학적 사유의 탁월함과 독창성, 그 깊이의 현재성을 단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사회적 체계 또는 일반적으로 체계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고정성, 전체성과 루만의 자기준거적 체계이론에서의 체계는 무관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도 단번에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도 “기능주의적 체계이론이 초월이론적 전통과 변증법적 전통과 갖는 관계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여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체계이론의 맥락에서 이론의 보편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루만은 총체성에 대한 전망 대신, 사회적 체계는 소통에 기초한 작동적 폐쇄성을 갖는다는 점과 사회에서 형성되는 기능체계들은 작동적 폐쇄성에 의존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 원칙을 실현시켜야 하고,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상이한 사안에서 비교가능성을 산출하는 동일한 구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별 체계들은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각 체계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그 방식은 특수하다. 각각의 체계는 ‘특수한 보편주의’로 세계를 구성하고 전체 현실을 마주한다. 이를 루만은 “거대이론(Supertheorie)은 보편주의적인 요구들을 가지는 이론들이다.”라고 말한다. 보편주의적인 요구들을 차이를 통해 다루는 사회적 체계는 복수의 세계, 또는 중심이 부재하거나 다(多)중심의 세계를 구성한다.

패러다임 전환을 한 ‘슈퍼이론’으로서 자기준거적 체계이론은 “대상의 복합적 실재를 완전하게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이론은 대상의 모든 인식 가능성들을 ‘완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이론 시도들과 달리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배타성’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이론은 대상 파악에서는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 이론은 사회학이론으로서 ‘모든’ 사회적인 것을 다루지, 조각들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보편성을 주장한다.” 사회적 체계로서 사회 그리고 그런 사회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체계 역시 자기 자신을 조건화하는 특수한 종류의 자기생산체계이며, 이때 그 대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 즉 ‘사회적인 것’의 자기생산을 다룬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4. 사회의 복잡성과 사항색인

독자들은 이 저작을 포함하여, 모든 루만의 저작에는 ‘인명 색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신 언제나 ‘항목 색인’만 있다. ‘사회적인 것’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다른 이론가들의 논의와 주장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의 작동을 통해서만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가령 파슨스가 어떤 이론화 작업을 했는지, 마르크스에 대해 어떤 비판을 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이중의 우연성’(doppelte Kontingenz: 3장)을 어떻게 개념적 추상과 자기추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인물들, 학자들 간의 조합이 아니라, 문제들 간의 의미연관과 복합체가 사회학적으로 중요하다.

루만이 파악하는 근대 사회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다. 근대성 역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며, 언제나 다르게도 가능한 방식, 필연적이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은 우연한 방식으로 계속 자신의 경계와 지평을 구획하고 확장한다. 그 완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학 이론의 위기를 초래하는 이 문제는 고전사회학자들 이론들의 ‘조합놀이’(Kombinationsspielen)로 해결되지 않는다. 가령 탈주체화나 재주체화로 강조점을 변경시키면서 전문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작업은 그것대로 학적으로 유의미하지만, 사회학의 대상으로서 사회에 대한 이론이나 그에 대한 개념적인 파악 대신에, 이론들 간의 조합만 증가하는 순수한 복잡성(pure Komplexität)만을 산출할 뿐이다. 하지만, 루만이 관심을 갖는 복잡성은 이런 조합놀이에 따른 복잡성이 아니라, ‘사회의 복잡성’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막스 베버가 생각한 것보다 이념과 현실과의 관계가 더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1971년 출간된 하버마스와의 논쟁에서 전체사회분석의 형식으로 체계이론의 현대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체계이론적인 진보의 기준’으로 사회의 복잡성을 제시한다. 이때 사회적 복잡성은 가능한 체험과 행위의 수와 종류의 증가일 뿐 아니라 그 풍부한 조합 가능성을 말한다. 이 현실이 “체계가 있다”가 마주하는 대상이다.


5. 체계‘포비아’로부터의 해방과 관찰자

『사회적 체계들』은 반드시 선형적인 순서에 따라 읽을 필요는 없는 책이다. 책의 장을 순서대로 썼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읽을 수 있지만, 사실 책의 이론 자체는 다른 순서로도 집필될 수 있었을 것이어서, 독자는 이 책의 이론을 순서를 바꾸어 쓰고자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의 순서는 유일하게 가능한 순서가 아니라, 다르게도 가능한 순서여서 독자에게 상당한 자유를 선사한다. 겉보기에 인간을 이론화하지 않고 체계를 이론화하기 때문에 인간을 부정하는 이론이 아니라, 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 선택을 달리 조건화하는 자유를 이론화하는 것이 루만의 체계이론이며, 『사회적 체계들』에서 시도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목표다. 체계에 대한 통상적인 반감과 원한에 대해 이 저작은 그런 체계‘포비아’에 대한 사회학적 계몽을 시도하고 있다.

<서문>에서 상당히 두터운 구름층 위에서 비행을 하고 있다고 우리의 상황을 관찰자로 그리고 있는 루만은 단지 몇몇 단서만으로 비행 조종에 충분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체계들』과 함께 다양한 고도에서 상이한 구름층을 통과하면서 야간 비행을 할 수 있다. 이 대작의 마지막 문장에서 루만은 부엉이가 더 이상 구석진 곳에서 흐느껴 울지 말고 야간 비행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야간 비행을 감시할 도구들을 가지고 있고, 현대 사회의 정찰이 관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마무리된다. 루만의 부엉이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기 시작하는 헤겔의 부엉이를 떠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부엉이를 『사회의 예술』(국역: 『예술체계이론』)에서 다시 등장시키는 루만은 “미네르바는 한 마리 이상의 부엉이를 날게 하며, 각각의 관찰자는 세계의 구성자로서 관찰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의 담지자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관찰자를 사회학적으로 의미화하고 개념화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찰되기 위해서 출판한다.”는 루만의 언급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관찰자 루만은 또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 관찰자인 사회적 체계를 관찰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관찰을 우리는 다시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체계들』에도 예외 없이, 아니 오히려 더욱 철저히 적용되는 운명이다.
 

6. 번역과 그에 대한 기대

체계이론에서 보자면, 근대적인 의미에서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관찰을 관찰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루만 역시 관찰자이며, 텍스트의 출판 역시 관찰자인 학문체계의 자기생산의 작동이다. 이런 점에서 번역자는 관찰자일 뿐 아니라, 관찰자의 관찰자다. 이 저작을 번역한 두 학자는 이번 작업 이전에 이미 루만의 두 권의 저서 『예술체계이론』(2014)과 『사회의 교육체계』(2015)를 공역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공역은 두 역자의 상호신뢰 속에서 진행된 세 번째 작업이다. 사실 이번에 번역된 『사회적 체계들』은 처음 국역된 것이 아니다. 역자 중 한 명인 제주대학교의 박여성 교수는 2007년에 『사회체계이론 1, 2』(한길사)로 이 저작을 번역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공역은 매우 선구적인 이 작업에서 드러난 여러 어려움들을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서 축적되고 진화한 루만 연구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 하나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역자는 이에 대해 이번 작업을 ‘완전 개역판’이라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특히, 공역자이지만 초벌 번역을 한 동양대학교 이철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루만의 사회학을 사회학의 범위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사유 전체를 전복하고 급진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이라는 학적인 입장을 조탁하면서, 독자적이고 치밀한 루만 해석과 연구의 지평을 확보하고 확장해 왔다. 이에 더해 감수자인 경북대학교의 노진철 교수 역시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루만 제자로서, 독일식으로 하면 루만을 Doktorvater로 하는 국내 유일한 사회학자다. 두 역자는 감수자가 80년대에 작성한 루만의 강의 노트에 기반하여 지난 3년간 진행한 강독회에서 보여준 정밀한 개념 이해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루만-노진철’이라는 표현으로 그 깊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번 번역본은 현재 우리 학계가 도달할 수 있는 루만 연구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의 이론을 번역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학문 활동이며, 개념적인 작업이다. 가령, 체계라고 옮긴 System의 경우도 통상적으로 쓰는 것처럼, ‘시스템’이라고 옮길 것인지 ‘체계’라고 옮길 것인가 하는 선택은 그 자체로 연구를 전제하는 결과다. 마찬가지로 Kommunikation을 ‘커뮤니케이션’으로 할 것인지, ‘소통’으로 할 것인지, 이번 작업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Einheit에 대해서도 왜 그것을 ‘통일성’이 아닌 ‘(차이)동일성’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론적인 문제다. 이런 점에서 매우 정성스럽게 쓰인 작은 논문이라 할 수 있는 두 역자의 <사건이론적 차이 이론과 번역어 문제들>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기왕에 공역으로 출간된 『예술체계이론』과 『사회의 교육체계』의 역자 해설뿐 아니라, 역어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변화는 곧 지난 10여 년간 루만 체계이론 연구의 축적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전 작업에서 ‘근대’가 이번 작업에서 ‘현대’로 바뀐 것, ‘구별’이 ‘구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소통’으로 대체된 것 등의 문제, Selbstreferenz에 대해 경합하고 있는 두 역어 ‘자기지시’와 ‘자기준거’의 문제, 성찰(Reflexion)의 역어 선택, Reflexivität 과 Rekursivität에 대해 각각 재귀성과 회귀성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더불어, 이번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루만의 원 텍스트에는 없는 제목을 절마다 부여했다는 점이다. 가령 4장 ‘소통과 행위’를 구성하는 10개 절 각각에 해당 절이 다루는 내용을 루만의 개념으로 정리한 제목으로 제시하는 식이다. 그 난해함과 별개로 루만 이론의 선명함 때문에 역자들이 부여한 절의 제목은 정확성을 강제하는 이론적 제약 속에서 선정되었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싶다. 원 텍스트에 없다는 점 그리고 독자의 연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독자와 연구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획이라고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물론 애초에 루만의 저서가 그런 것처럼 이 제목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을 수도 있고, 자신이 더 좋은 제목을 부여하면서 읽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실제 독일에서 『사회적 체계들』이 출간되었을 때, 중요한 서평을 쓴 디르크 베커의 <한국어판 서문>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기록이다.

루만이 『사회적 체계들』에서 체계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론화했듯이 국내에서도 이 번역본이 루만의 사회학과 체계이론 연구의 분기점이 될 뿐 아니라, 사회이론과 이론 일반에 있어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루만의 문장을 변형하면, 관찰자인 우리는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배우기 위해, 그렇게 관찰되기 위해서 관찰하고 기술할 것이다. 루만은 “한 번 소통에 끌려 들어가면 단순한 영혼의 낙원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영혼의 낙원에 대한 향수 대신, 사회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을 관찰하고 소통하면서 사회이론 뿐 아니라 사회 역시도 확장할 것이다.


김건우 해외통신원/빌레펠트대학 박사과정·사회학

현재 독일 빌레펠트 대학 사회학과에서 사회학이론과 국가사회학을 연구 중이다. 칼 슈미트와 니클라스 루만의 국가와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교수신문> 독일 통신원을 지냈고, 루만과 부르디외, 최인훈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썼다. 퇴니스의 논문 [법치국가와 복지국가]를 옮겼으며, 루만의 [근대의 관찰들]과 [체계에서의 권력]을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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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2020-12-02 13:24:55
ㅇ멋진 소개 잘 보았습니다.
ㅇ김건우, "루만은 '한 번 소통에 끌려 들어가면 단순한 영혼의 낙원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ㅡ단순한 영혼의 낙원에 대한 향수 대신, 사회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을 관찰하고 소통하면서 사회이론 뿐 아니라 사회 역시도 확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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