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와 〈신학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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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와 〈신학대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11.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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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23강>_ 김율 대구가톨릭대 교수의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4. 서양 고전과 그 역사적 의미 – 기독교’ 제 23강 김율 교수(대구가톨릭대 프란치스코칼리지)의 강연 중 주요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율 교수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神學大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저작인지 보기에 앞서 13세기가 어떤 시대였는가, 그 책이 쓰인 시대적 배경과 함께 “13세기 문명의 학문적인 표현”이던 스콜라 철학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먼저 살펴본다. 그에 이어 저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떤 인물인지 다룬 다음, 『신학대전』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책의 대강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는 전체 “150만 단어”에 달하는 『신학대전』 속 방대한 내용들 가운데 주요 논쟁거리라 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신학 문제와 신 존재 증명 그리고 소유권과 행복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지난 10월 24일, 김율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13세기는 어떤 시대였나

중세 문명의 정신적 표현인 중세 철학은 서방 교부를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마지막 로마인이라 불리는 보에티우스에게서 시작한다. 게르만족의 이동에 의해 로마 문화가 파괴된 이후 서양 학문은 한동안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타개된 계기가 바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다. 걸출한 학자들이 출현해 유럽의 학문을 일으켰으며,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의 칙령으로 주교좌 성당과 수도원 성당에 부설 학교들이 생겨 학문에 투신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서양사 연구자들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한계를 지적하고 서양사의 에너지가 12세기에 비로소 집적되어 분출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12세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가장 중요한 일은 이슬람과의 교류다. 아랍의 수학, 의학(특히 아비센나의 의학 정전), 연금술이 수입되었다. 영(零)의 개념, 세관, 시장, 수표 등의 용어가 유럽에 도입된 것도 이때다. 무엇보다 톨레도, 팔레르모, 나폴리, 옥스퍼드, 로마 등 각지에 번역 기관들이 세워져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 및 그에 대한 그리스 주석가와 이슬람 주석가들의 작품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저 여러 논리학자 중 뛰어난 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을 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드디어 ‘그 철학자(the philosopher)’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3세기 문명은 12세기 르네상스의 연속선상에 있다. 11세기부터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유럽의 학교들이 12세기 후반 처음으로 일부 지역(파리, 볼로냐, 옥스퍼드)에서 조합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소위 대학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대학은 13세기에 접어들며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제 학문은 귀족들의 보고(寶庫)에 간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유통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말하자면, 대학은 사상(思想)이 생산되고 소개되는 작업장이요 시장이었다. 교수는 장인 또는 상인과 같았다.

 2. 스콜라 철학이란 무엇인가

스콜라 철학은 중세 철학 전체와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인물이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학설의 체계라고 할 수도 없다. 넓은 의미에서 스콜라 철학은 ‘중세의 학교(schola)에서 연구하고 가르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12~14세기 중세 라틴 유럽 세계에서 취해진 학문의 태도, 신념, 탐구의 방법(modus inveniendi)이자 교육의 방법(modus docendi)’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부른다.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전통과 권위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학문을 하려는 자는 과거의 텍스트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참된 지식의 습득은 엄정한 이성적 대결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강조한다. 변증론을 통한 텍스트 주해가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는 이유다.

스콜라 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의 전달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앎이란 소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무엇보다 명료하게 제시하고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탐구의 방법이 교육의 방법에 체계적으로 반영된다. 그리고 교육 방법에 따라 다양한 문헌 양식들이 생겨난다. 다양한 형태의 강독 문헌 양식(commentarium, lectura, reportatio, expositio, glossa, postilla), 토론 문헌 양식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전(summa, 大全)’이라는 문헌 양식 역시 이러한 발전의 산물 중 하나다. 본래 ‘summa’라는 말 자체는 법학자들이 ‘요론(要論)’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책 제목이었다. 이 의미가 우리가 아는 현재의 의미, 즉 ‘체계적인 서술’이라는 뜻으로 바뀌게 된 것은 12세기 말이다.

3. 토마스 아퀴나스는 누구인가

토마스는 1224년 또는 1225년,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Aquino)라는 작은 마을의 로카세카 성에서 성주 란돌포 백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대략 1239년경 토마스는 나폴리 대학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학문의 기초인 자유7학과(문법학, 수사학, 변증론, 기하학, 산술학, 음악학, 천문학)의 공부를 시작했다. 나폴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토마스는 처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만나게 되었다.

토마스는 1244년경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평생을 도미니코 회원으로 살아갔다. 나폴리에서 잠시 체류한 후, 1245년 그가 애초에 도착했던 곳이 파리 대학이었는지, 혹은 처음부터 쾰른을 향해 갔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토마스는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 최고의 학자 쾰른의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밑에서 공부하게 된다.

1252년 토마스는 파리로 파견되어 신학 강사(Bakkalaureus)로서 신학 입문 과정을 강의하면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명제집』(1160)에 대한 주해서는 이 초기 교수 활동의 산물이다. 예정된 교수직을 승계하기 이전에, 오늘날까지도 존재론의 고전적인 저작으로 인정받는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를 쓴다. 토마스는 1256년 3월 3일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임명된다.

1265년까지 여러 지역의 도미니코 수도회를 순회하며 교수 및 연구 활동을 한다. 마지막으로 산타 사비나의 도미니코회 신학원의 원장으로서 2년간 로마에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을 완성했고 자신의 주저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쓰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에 대한 주해 작업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는 1268년 다시 파리로 파견된다. 파리 대학에서는 또 다른 학문적 투쟁이 공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인문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던 교수들과 신학부의 교수들 사이의 논쟁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에 대한 금지령이 1255년에 해제되어 인문학부의 교과 과정에 포함되었는데, 그 이후로 철학자들의 자의식이 성장하고 이와 함께 인문학부의 요구 또한 성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더 이상 기초적인 3학과(문법학, 수사학, 변증론)의 교재로 사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중대한 철학적 문제들을 탐구하는 작업에서 권위와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토마스의 동료이자 프란치스코회 총장이던 보나벤투라는 이미 1267년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주해자 아베로에스(1126-1198)의 가르침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서 생겨난다고 판단되는 위험한 오류들을 공표한 바 있다. 보나벤투라의 생각에 따르면, 그렇게 많은 잘못된 견해들이 생기게 되는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계승된 철학에 전형적인 테제들, 그중에서도 우주적 결정론, 모든 인간을 통틀어 그들 안에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으로서 작용하는 어떤 유일한 “유적(類的) 지성”이 존재한다는 생각, 세계에는 시초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학설들에 대한 투쟁은 마침내 1270년 12월 10일 파리 주교가 신앙에 어긋나는 13개의 테제를 단죄하고 그 유포를 금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 모든 인간의 지성은 수적으로 동일한 하나다
2) ‘인간이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3) 인간의 의지는 필연적인 방식으로 선택한다.
4) 지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천체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5) 세계는 영원하다.
6) 아담과 같은 첫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7) 인간의 형상인 영혼은 육체가 소멸할 때 함께 소멸한다.
8) 인간이 죽은 후,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지옥 또는 연옥의) 불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9) 자유의지는 능동적 능력이 아니라 수동적 능력이며, 욕구 대상에 의해 필연적 방식으로 움직인다.
10) 신은 개별적인 사물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11) 신은 자기 자신만을 인식한다.
12) 인간의 행위는 신의 섭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13) 신은 가멸적인 피조물에게 불멸성을 부여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이 갈등을 해결하는 유의미한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유산을 존중하기는 하되 그 유산 안에서 진리 자체를 추구해야 할 요구를 보지는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 맞서 ‘실질적 사태에 입각한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철학적 저작들에 대한 주해라는 과제를 ‘직접’ 떠맡는 것을 의미했다.

1273년 12월 6일, 『신학대전』 저술 작업 도중에 토마스는 받아쓰기를 중단시켰다. 토마스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 도중 나폴리 근처 마엔차에서 깊은 병을 얻는다. 그의 바람에 따라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에 있던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고, 그는 1274년 3월 7일 거기서 숨을 거둔다.

1278년 도미니코회는 소속 회원들에게 토마스의 저작들을 공부할 것을 권장 사항으로 정한다. 교회는 1323년 토마스를 시성한다. 그리고 1567년 토마스는 ‘교회의 스승’으로 추앙된다. 그러나 토미즘이 우리가 아는 토미즘으로 중흥된 직접적 계기는 1879년 교황 레오 13세가 반포한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칙은 당시까지 여러 스콜라 학자 중 한 명에 불과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를 스콜라 학자 중 가장 뛰어난 교회의 스승으로 추존하면서, 모든 신학교에서 그를 가르치고 공부할 것을 명했다.

4. 『신학대전』은 어떤 책인가

토마스가 『신학대전』 제1부를 쓴 것은 1266년부터 1268년까지다. 당시 토마스는 로마에 있는 산타 사비나 교수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제2부와 제3부는 제2차 파리 체류 기간과 제2차 나폴리 체류 기간 동안 썼다. 제3부는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고, 제자들이 보완했다.

『신학대전』은 3부(pars)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의 제2부는 다시 두 개의 편으로 나뉜다. 각각의 부는 문제(quaestio)로 나뉘며, 각각의 문제는 다시 절(articulus)들로 구성된다. 토마스가 직접 쓴 부분은 모두 2669절이다. 머리말에서 토마스는 자신의 저술 의도를 “그리스도교 신학을 초심자들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전수하는 것”이라고 간명하게 밝힌다.

서술의 질서는 현실로부터 나온다. 가장 중요한 현실은 모든 사물이 창조주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그 사실이다. 따라서 체계적 신학은 사물을 신과의 관련성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관련성이란, 모든 존재자가 신 안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이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신학대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사물들의 근원. 창조.

제2부: 자신의 근원을 향한 사물들의 회귀. 창조의 목적. 그런데 가시적인 창조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목적을 향한 인간의 질서적 관계와 그 목적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의 활동이 제2부의 대상이 된다.

제3부: 신을 향해 나아가는 길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다룬다. 신을 향한 인간의 회귀는 인간이 된 신의 아들이 가리켜주는 길, 그리고 그분 자신에 다름 아니기도 한 그 길을 거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5. 『신학대전』의 주요 문제들

『신학대전』은 어디까지나 ‘신학적’ 저작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제기했으며 그 밖의 다른 철학자들도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는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한 순간도 잊지 않지만,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철학의 가르침을 이용하고 또한 사유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사항들을 탐구한다. 또한 토마스는 순전히 신학적인 물음들을 탐구하는 순간에도 엄격한 학문적 논증의 방법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거룩한 가르침, 즉 계시 신학의 학문적 지위를 규정하는 것이 『신학대전』의 출발점을 이루는 논의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개념을 차용하여 계시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학문의 일종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원리로 받아들이되 이성적 질서에 따른 논증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학문적 논변이 빛을 발하는 대표적 부분이 신 존재 증명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신 존재 증명 역시 『신학대전』 초반부의 하이라이트다.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2문 제3절에서 그 유명한 ‘다섯 가지 길’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신 존재 증명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제2문 제1절과 제2절의 예비적 설명이다.

『신학대전』의 수많은 논의 중에 오늘 강연에서 살펴보려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사물의 사용과 소유의 권리에 대한 논의다. 사물의 사용은 인간이 아닌 자연 세계에서도 이미 관찰되는 현상이다. 물론 사물이 가장 명료하게 사용의 대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서다. 인간은 모든 사물들을 최대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다른 사물보다 완전하고, 덜 완전한 것은 더 완전한 것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여타의 사물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자연적인 어떤 것이라고 토마스는 본다. 그런데 인간은 그가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구절에서, 인간이 이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인간에게 귀속되는, 사물 세계에 대한 주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본성상 다른 사물들보다 더 완전하다는 이 성경적 근거에서 도출되는 사실이 있다. 사용의 결정적 규범이 인간을 위한 소용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그 본질상 다른 모든 이들과 평등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주권은, 모든 인간 또는 전체 인류(전체 인류란 다음 세대들도 뜻한다)의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행사되는 한에서만 올바른 질서에 맞는 것이다.

토마스는 사물에 대한 사적인 소유권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여러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써서 돌본다. 토마스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토마스의 더 중요한 궁극적인 전제는, 그 누구도 사물들을 배타적으로 자신에게만 속하는 어떤 것으로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각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공동의 것으로서”, 즉 모든 인간을 위해 정해진 것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물건이 그 본성상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들은 만인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서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공동 유익의 원칙으로 행위해야 한다. 소유물을 보유하되,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소유물로부터 유익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물의 유익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배제하는 사람은 비도덕적인 자다. 토마스는 교부 암브로시우스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충분한 소비를 넘어서는 것은 강제적으로 소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도덕적 사안을 떠나서 인간의 궁극 목적에 대한 토마스의 사상에 대해 다뤄보자. 인간의 궁극 목적, 곧 행복에 대해 토마스는 어떻게 설명했는가? 고대 철학이 ‘완전한 자기실현’이라는 행복의 이상을 정립하였다면, 중세 철학은 그 이상을 계승하되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부정의 의지를 필수적 계기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선을 행복(eudaimonia)이라는 말로 부르면서, 인간이 가진 가장 고유한 능력, 즉 지성이 원활하게 발휘되는 상태가 바로 그 행복의 경지라고 했다. 토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이 사상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유산에 중요한 변형을 가한다. 한마디로 하면 그는 행복이 이 현세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죽은 후에 비로소 가능할 뿐이라 생각한 것이다. 토마스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가 생각한, 사후의 행복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능력이 잘 발휘되기 위해서는 능력 자체도 온전해야 하지만 능력이 향하는 대상도 탁월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능력, 즉 지성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성에게 가장 완벽한 생각의 경지를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대상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신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만물의 궁극적 존재 이유인 신보다 더 고귀하고 완전한 생각 거리(인식 대상)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신을 관조하는 삶이다. 토마스도 여기까지는 동의하지만, 문제는 토마스의 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다르다는 점이다. 부동의 원동자라는 그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철학자가 학문적 탐구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우주의 보편적 원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세상의 고귀한 원인을 밝게 이해하면서 이러한 관조적 삶에 수반되는 지성적, 윤리적 탁월함을 자연스럽게 성취하는 ‘철학자의 삶’이 행복의 전범이다. 이에 반해 토마스가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신은 탐구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는 신이다. 그 신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있음 자체를 창조한 절대적 초월자이기 때문에 인간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동시에 진노하고 사랑하며 복수하고 용서하는 인격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끌어 예배의 대상이 된다. 신학자들은 계시의 전거(성경)와 이성을 사용하여 그 신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지만, 그들이 결국 알아내는 것은 ‘신은 불가해하다’는 명제다. 신자들은 신앙을 통해 그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지만, 믿음(신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 도달하지 못한 것을 향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토마스는 신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즉 행복은 현세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현세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 죽어서 가능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은 다음의 두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영혼은 동식물의 영혼과 달리 물질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지성적 영혼이다. 지성적 영혼은 몸과 결합되어 생겨나지만,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이해되는 이 결합이 죽음에 의해 해체된 후에도, 지성적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사후의 인간 영혼을 ‘[질료와] 분리된 영혼(anima separata)’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육체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영혼’으로서는 불완전하지만, 감각적 인식의 제약에 더 이상 갇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순수한 지성적 특징을 갖게 된다. 학문적 추론에 따라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나, 계시를 따라 신이 어떤 분인지를 믿는 것을 넘어, 사후 인간의 영혼에게는 보다 직접적인 신 인식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둘째 전제는 행복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바람이다. 토마스는 세상 만물이 각자의 선을 추구하며 그 선 때문에 존재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모든 인간은 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악인은 선을 무질서하게 추구하는 자다— 모든 부분적 선들은 유일한 최고선을 향한 질서 속에 놓여 있다. 최고선, 즉 행복을 향한 바람은 어떤 순간에나 모든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하고 있다. 이 말은 인간에게 완전한 신 인식을 위한 멈추지 않는 갈망이 있다는 뜻이다. 토마스는 모든 인간에게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이 갈망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본성적 바람은 공허한 바람이 아니다. 따라서 본성적 바람의 존재는 그 바람의 대상, 즉 신의 인식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사후의 영혼은 신의 빛에 의해서 자신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신의 본질을 보게 된다. 행복은 영광(gloria)이라고도 불리는 바로 이러한 상태, 즉 ‘신의 봄(visio Dei)’이다.

토마스의 행복 이론은 그리스도교라는 계시 종교의 교의에 충실히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계시된 바를 믿는 것, 즉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것은 계시된 바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의 구체적 내용을 넘어서는 계시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수긍을 포함한다. 물론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토마스 역시 십자군 전쟁과 카타리파 학살 같은 범죄를 저지르던 당대의 정신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겠지만, 그는 적어도 참된 종교의 본질이 ‘내가 아는 신’을 믿는 데에 있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신이 빛을 비춰주어 우리가 신의 봄에 도달한다 한들, 즉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신의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신적 행복을 누린다 한들, 한낱 죽을 자인 인간은 그 행복의 순간에도 신적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신에 대한 최고의 인식은 신의 불가해함에 대한 인식이다.

6. 맺으며

토마스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 적은 극히 드물었고, 또한 그의 광범위한 저작에서도 토마스 개인의 분위기는 거의 인식할 수 없다. 언제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태를 해명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신은 거의 언제나 이 사태 자체의 원경(遠景)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격정적 느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글의 이러한 문체야말로 그의 성격적 특징, 즉 엄격한 사실성과 객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성과 객관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보일 때마다 토마스는 “학설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칠 때 그 견해의 옹호자에 대한 애착심이나 반발감을 따라서는 아니 될 것이요, 오히려 진리의 확실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고에 따라, 단호하게 사실성과 객관성을 지키려 했다. 학문적 토론이란 마땅히 “두 입장이 제시하는 근거들 모두를 경청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되는” 중립적인 법정에서 일이 진행되듯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학문적 적수들에게, 그 자신이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그들의 견해를 똑같이 공개적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토마스는 자신이 속해 생활하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으며, 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권고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젊은 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형제 수사들에게 진실하게 대했고 형제 수사들은 토마스를 존경하며 도왔다. 『신학대전』에는 깊은 신앙심과 철학적 투지뿐 아니라, 수도 공동체 동료들과의 ‘친애적 삶’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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