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물 따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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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물 따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골짜기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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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경북 문경 선유동계곡
▲ 선유구곡 9곡 옥석대. 왼쪽 바위에 새겨진 선유동 각자는 고운 최치원의 글씨라 전한다.

서늘한 계곡에 인적은 드물었다. 단풍은 대부분 졌지만 솔 많은 산이어서인지 숲은 짙푸르고 차분했다. 눈처럼 흰 바위들은 크고 넓고 낮거나 높았고 투명한 계류는 가르릉 거리거나 쾅쾅 소리를 내며 자신을 드러냈다. 이곳은 문경 선유동(仙遊洞) 계곡, 신선이 노닌다는 곳이다. 문경과 괴산을 경계 짓는 대야산에서 내려오는 골이 그 동쪽에 있는 둔덕산에서 내려오는 골과 만나 이룬 길고 아름다운 골짜기다. ‘여지도서’에 ‘대야산 동쪽 6-7리에 선유동이 있다’고 ‘온 골짜기 모두가 흰 바위와 맑은 시내로 어우러져 그 안에 훌륭한 경치의 구곡이 있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대야산 서쪽을 괴산 선유동, 동쪽을 문경 선유동이라 불렀다는데, ‘대동여지도’는 괴산 선유동을 내선유동, 문경 선유동을 외선유동이라 했다. 어느 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신라사람 고운 최치원도 이곳을 거닐었다고 전한다. 그가 새겼다는 ‘선유동’ 각자가 큰 바위의 가슴께에 남아 있으니 명성의 내력이 깊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이곳에 와 감탄하며 외쳤다 한다. ‘골짜기가 탁 트여 창자가 시원하다(可以浣腸云)’

▲ 선유동계곡의 학천정. 영조 때 학자인 도암 이재를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 8곡 난생뢰. 물줄기가 현처럼 바윗돌에 새겨져 계곡이 통째로 악기다.

선유동계곡의 아홉 굽이를 ‘선유구곡’이라 한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저마다의 구곡을 경영하고 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누구인지, 구곡의 완성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금 알려져 있는 선유구곡은 고종 때 사람인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이 정리한 것이다. 큰물에 사라진 이름은 스스로 짓고, 계류에 숨기를 반복하는 이름은 건져내고, 이끼에 가려진 이름은 찾아내었다. 그것이 1곡 옥하대(玉霞臺), 2곡 영사석(靈石), 3곡 활청담(活淸潭), 4곡 세심대(洗心臺), 5곡 관란담(觀瀾潭), 6곡 탁청대(濯淸臺), 7곡 영귀암(詠歸巖), 8곡 난생뢰(鸞笙瀨), 9곡 옥석대(玉舃臺)다. 고운의 ‘선유동’ 각자는 옥석대 옆에 위치한다. 맞은편에는 학천정(鶴泉亭) 정자가 계류를 바라보며 서 있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도암(陶庵) 이재(李縡)를 추모하기 위해 1906년 향토 사림이 옥석대 곁에 세운 것이다.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한 강력 노론의 중심이자 배후였던 그는 때때로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몇 개월씩 보냈다고 한다. 바위벽에 기댄 정자는 돌담위로 턱을 치켜들고 있다.  

▲ 난생뢰에서 영귀암으로 가는 낙엽 쌓인 오솔길.
▲ 7곡 영귀암. 그늘진 계곡에 물은 비취빛이고 바위는 얼음 같다.

어찌 저리도 반듯할까. 절편처럼 넓고 흰 옥석대. 옥석은 옥으로 만든 신발로 ‘도를 얻은 사람이 남긴 유물’을 의미한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진시황 때의 안기생(安期生)이라는 사람이 ‘붉은 옥으로 만든 신발 한 켤레를 남긴 채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고운 역시 신던 신발과 쓰던 갓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가야산으로 기억한다. 그는 먼저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했을지도 모르겠다. 물 따라 계곡의 한 굽이를 돈다. 8곡 난생뢰다. 난생(鸞笙)은 선계에서 연주되는 대나무 악기로 만물이 소생하는 소리는 낸다고 한다. 뢰(瀨)는 여울이다. 흘러 여울지는 물소리가 신선의 피리소리 같다는 의미다. 바윗돌에 물의 흐름이 현처럼 새겨져 있다. 바위는 통째 물과 함께 흐르고 계곡은 통째 악기다. 그 소리 청아하다. 이제 잠시 계곡을 벗어난다. 낙엽 쌓인 오솔길로 접어들어 완만하게 굽이진 계곡을 내려다본다. 7곡 영귀암이다. 그늘진 계곡에 물은 비취빛이고 바위는 얼음 같다. 영귀는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뜻이다.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증점(曾點)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 6곡 탁청대. 손재 남한조가 세심정을 지어 은거했다 한다.
▲ 관란담 가는 길. 바스러지는 햇살 속에 고래 같은 바위.

또 한 굽이돌면 6곡 탁청대다. 거인의 빨래판 같은 바위다. 탁청은 ‘물 맑으면 갓끈 씻고, 물 흐리면 발 씻는다’는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한다. 조정에서 쫓겨난 굴원은 ‘온 세상이 혼탁하나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으나 나 홀로 깨어 있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추방당했다’고 탄식하면서 ‘어부사’를 통해 현실과의 타협을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굴원은 결국 타협을 거부하고 투신해 죽었다. 현재를 감당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못한 이의 말로다.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가 탁청대 서쪽에 세심정(洗心亭)을 지어 은거했다 한다. 그는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은둔하면 후진 양성에 힘쓴 인물이다.

▲ 5곡 관란담. 손재가 옥하정을 지었다는 곳. 물결을 본다.

다시 계곡과 살짝 떨어진 오솔길이다. 바스러지는 햇살 속에 고래 같은 바위 하나가 턱 하니 놓여 있다. 계곡으로 향하다 사람의 기척에 뚝 멈춘 모양새다. 그의 앞길을 재빨리 지나쳐 제5곡 관란담 앞에 선다. 물살이 세차게 떨어져 차츰 잔잔한 못을 이루는 곳이다. ‘관란’은 ‘물결을 본다’는 의미다. 이곳에도 손재가 지은 옥하정(玉霞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물가 둔덕진 자리에 현대의 사각 정자가 있다. 저곳이 옥하정 터일까. 그 앞쪽에 ‘구은대유적비(九隱臺遺跡碑)’가 서있다. 일제강점기 때 순천김씨 아홉 노인이 ‘세상에 얽매인 너더분한 일에 관여하지 않고 ’이곳에 숨어들어왔다는 설명이 있다. 맞은편 바위에는 아홉 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선유구곡을 정리한 외재 정태진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만세운동 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유림의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 중 한분이었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힘쓰다 광복 후인 1947년 봄에 이곳을 찾아왔다. ‘10년을 꿈꾸다 이렇게 한 번 찾아오니/ 선유동문 깊숙한 곳 흥취가 끝이 없네.’ 구곡은 아래로 이어지지만 여기서 돌아선다. 수년 만에 찾아 선유하고 이제 증점처럼 노래하며 돌아가리니, 창자는 한결 시원하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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