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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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절의 기억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0.1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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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에세이]

유신 시절에 나는 대학생이었다. 대학원까지 마쳤다. 당시 기억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발 단속과 장발이었던 내가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는 모습이다. 유신 정부는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구실로 남자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자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였다. 이른 바 장발 단속과 미니스커트 단속이다. 미니스커트는 또 그렇다 치더라도 세상에 사람들이 제 머리도 마음대로 기를 수도 없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세상이란 것이 묘해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힘 센 놈이 우기면 그것이 진리로 통용되는 법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작태에 대해 국민들이 참을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을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렇게 기르지 말라는 머리를 왜 굳이 길러? 하는 태도를 보였다. 왜 굳이 길렀는지 말해 주마. 그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장발이 유행이었고, 난 유행을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꼭 유행을 따르고 싶었다기보다는 바싹 깎은 머리가 촌스럽고 긴 머리가 멋있었기 때문이다. 난 촌놈이 되기 싫었다. 더 이상 이유가 필요한가? 머리 기르는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니라 굳이 남의 머리를 가위로 싹둑 자르겠다는 그 횡포가 잘못된 것이다. 
 
장발 단속은 작은 보기에 불과하다. 대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술을 많이 마신다. 지금은 새벽까지 마시고 첫 전철 타고 집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밤 12시면 통행금지로 사람들이 다닐 수 없었다. 다니면 경찰에 잡혀가서 구류를 살거나 새벽에 훈방되어 나왔다.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통행금지라니?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이상한 제도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당연한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술 마시다 보면 정부 얘기도 나오고 대통령 얘기도 나오기 마련이다. 무릇 박근혜 문재인을 안주 삼아 질겅거리는 게 술 자리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대통령 얘기 잘못 꺼냈다 소리 없이 사라져서 고문과 고초를 겪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술 먹을 때 주위 사람이 혹시 우리 얘기를 듣지 않을까 조심조심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 군정에서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서 영원히 안 나타난 사람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70년대 후반기쯤 정부가 드디어 쌀 막걸리를 허용했다. 그 얘기를 듣고 쌀 막걸리 먹으러 술집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는 쌀이 귀하여 쌀로 술을 빚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전에는 보리나 콩, 팥 등을 섞은 밥이 순쌀밥보다 더 영양가가 많다고 정부에서 꽤나 선전해 댔다. 다 거짓말이었다. 영양소 성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쌀이 훨씬 더 우수한 곡식이다. 그만큼 쌀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중고등학교에서 도시락 혼식 검사도 하곤 했다. 촌스럽게 말이다.
 
당시에는 판자촌 철거와 강제 이주가 한창이었다. ‘무작정 상경’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좋지 않은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시골 사람들이 꾸역꾸역 서울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식모살이, 그 다음에는 공장 취업으로 살길을 찾았다. 번 돈은 고이 저축하여 시골 부모에게 보내거나 동생 학자금으로, 또 시집 장가 비용으로 썼다. 14시간 노동에 온갖 비인간적인 수모와 학대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그것이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살 데가 마땅찮으니 산비탈의 무허가 집들이 늘어났고 이를 정비하고 ‘새마을’을 만들려는 정부 정책은 입주자와 철거인부들의 충돌로 나타났다. 갈 데 없는 사람들은 피눈물과 온몸으로 맞섰다. 그래서 철거반원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이다. 급격한 도시화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1973년에 대학교 1학년이었다. 10월이 되니 갑자기 반정부 데모가 벌어졌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나?”하고 동료 학생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아니라 지난해 선포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었다. 데모대를 따라 가다 진압 경찰을 피해 가정집 담을 넘어 숨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한두 명과 같이 얼마간 그러고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집을 나와 내 집으로 갔다. 그 집 주인은 무엇하고 있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직접 경험한 첫 데모였다. 나는 학생 운동권과는 멀어서 그냥 내 옆에서 데모가 일어나면 따라가는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는 그것마저 못했다. 학교에서 이상한 낌새만 보이면 그저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모를 계획한 학생들이 잡혀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대적인 반유신 데모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79년에 가서였다.
 
덕분에(?) 내 대학 생활은 휴교가 반을 차지했다. 해야 할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이다. 데모 좀 한다고 휴교라니... 이런 폭압이 또 어디 있겠나? 오죽하면 대학원 때에는 학교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수업하는지(휴교 아닌지) 확인하고서야 학교에 갔겠나? 유신 시절은 이런 시절이었다.
 
반체제적이거나 사회고발적인 소설을 못 쓰니 소설가들은 그저 ‘호스티스 소설’에 몰두했다.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따위가 인기를 끌고 영화로 만들어져서 장미희, 이영옥 같은 배우들이 스타가 되었다. 지식인들은 청년문화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가 청년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청바지 입고 통기타 메고 기차 타고 야외로 놀러 다니거나 명동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이것이 청년문화라는 것이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그것을 표출할 통로가 없어 표피적인 소비문화로 눈을 돌렸고, 이를 서구의 반체제적 청년문화와 견주어서 한국의 청년문화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수동적이고 우울하고 체념적인 청년문화였다. 이 청년문화는 주로 대학생, 그 중에서도 좀 여유 있는 대학생에게만 국한되었고 이에 끼지 못한 ‘청년’들은 저임금과 과잉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반체제 인사들은 가혹한 탄압에 시달렸다. 정부는 반정부 학생들을 간첩단으로 몰아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더구나 인민혁명당을 재건하였다고 조작하여(‘인혁당’ 사건) 사형 선고 뒤 전격적으로 사형 집행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체제의 모순은 숨길 수가 없었고 1970년대 말에 반체제 운동이 크게 번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도 난감했을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내가 죽을 때까지 권력을 휘두를 수도 없는 상황인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심복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과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니라... 옛말을 알긴 알되 실행을 못하니, 그것이 보통 사람의 한계이고 박정희의 한계였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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